제3화 기쁨 (1)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김지훈을 음성에 보낸 것이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 됐지만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준영 선생님 말씀대로 어떻게든 문제가 되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데, 쉽지 않네.’
신상민 교수에게 장례식장 문제를 들었을 때도 마음 한편으로는 설마설마했었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의 일부터 시작해서 금경태 과장의 최근 행적까지, 조금씩 알아 가면서 분노와 실망에 치를 떨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김지훈이었다. 이준영 과장의 말대로 금경태 과장은 결코 자신이 입은 손해를 잊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김지훈의 꿈과 희망을 짓밟고도 남았다. 전공의 수련을 맡은 이후, 가장 기대를 하고 있는 젊은 인재를 이런 식으로 잃을 수는 없었다.
해결 방법은 명확했다.
김지훈을 제대로 키워 누구에게나 확고히 인정을 받게 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울러 금경태 과장의 아성을 무너뜨려 부당한 힘을 행사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러나 금경태 과장은 지금도 견고한 성을 쌓은 채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고 있었다.
이번 학회 일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핑계로 라이벌인 오상익 교수의 참가를 막았다. 전공의들도 파트에 상관없이 자신이 총애하는 전공의들만 참가를 허락했다.
심지어 키워야 할 인재라면 연차를 가려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1년차인 신현수까지 데리고 왔다. 핑계일 뿐이었다. 신동석 이사의 아들이고, 자신의 출세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항의하지 못했다. 반기를 들었다가 되돌아올 불이익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혁민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함부로 나섰다간 자신은 물론 김지훈까지 다치게 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아무리 철옹성을 쌓았다고 해도 언젠가는 틈을 보이겠지. 아니, 기필코 내가 틈을 만들어 내고야 만다.’
다행이라면 금경태 과장은 이혁민 교수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도리어 자신의 수족처럼 생각하며 궂은일들을 맡겼다.
금경태 과장이 어떤 사람인지 안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야 자신도 살고 김지훈도 살 수 있었다. 그것이 곧 일반 외과를 위한 길이기도 했다.
오늘도 거만하기만 한 금경태 과장의 태도를 참지 못해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어제부터 기분이 안 좋아 미리 구미 병원의 상황을 살피고 싶다는 말까지 해 둔 참이었다.
‘김지훈, 끝까지 지금처럼 해야 한다.’
“선생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구미에 거의 다 왔습니다.”
박경일 과장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깬 이혁민 교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응? 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병원에 다 온 건가?”
“예. 조금 있으면 톨게이트로 들어갑니다.”
“그래, 생각보다 빨리 왔네. 그런데 최철한하고 유석재는 일 잘하나?”
“그럼요, 든든합니다.”
이혁민 교수가 자연스럽게 김지훈을 거론했다.
“다행이네. 김지훈은 어때? 첫 3개월을 음성에서 보내 꽤 걱정이 돼. 뭐라도 좀 배웠는지 모르겠어.”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음성의 일은 자신도 모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좋았다. 내심 김지훈이 어떻게 일하는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다.
박경일 과장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인턴 때도 상당히 열심히 해서 구미 과장들이 모두 엄지를 치켜들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이론에 관한 것들도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선생님 말씀대로 열심히 혼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열심히 한단 말이지. 100일 당직 연장 때문에 걱정했는데 마음이 좀 놓이네.”
이혁민 교수가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체력적으로 좀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아직까지 의욕만큼은 최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음성에서 퍼스트를 제법 섰던 것 같습니다.”
“음성에서? 그게 무슨 소리야?”
“수술 트레이닝을 시키느라 몇 번 퍼스트를 세웠는데 상당히 능숙해서요. 어떤 면에서 보면 제가 무엇을 할지 미리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정도 되려면 솔직히 재주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혁민 교수가 짐짓 놀라는 척을 했다.
김지훈 때문이라면 굳이 속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이 다시 수술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금경태 과장의 귀에 들어가는 일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지만, 사람 속은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구나 혁신 위원회 위원장이기 때문에 이준영 과장을 음성에서마저 쫓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금경태 과장은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이 이상으로 추락하는 것은 이혁민 교수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라면 존경하는 선배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평생 후회할지도 몰랐다.
이혁민 교수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재주가 있는 모양이지. 음성이 그렇게 수술이 많은 병원이 아니잖아. 과장님하고 단둘이 있었는데 얼마나 수술을 했겠어.”
“그렇긴 합니다만, 하여튼 처음에는 많이 놀랐습니다. 꼭 2년차나 3년차하고 수술을 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 정도로 퍼스트를 잘 서나?”
이혁민 교수에게도 박경일 과장의 말은 의외였다. 이제 1년차를 시작한 전공의들에게 3개월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해도 김지훈 역시 예외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직접 보시면 많이 놀라실 수도 있는데 지금쯤 수술이 다 끝났을 것 같습니다.”
아쉽다는 표정을 짓던 박경일 과장이 허리춤을 뒤졌다.
“어, 수술실에서 여러 번 연락이 왔었네요? 아뻬라고 했는데, 무슨 일이 있나?”
어느새 구미 병원 입구였다.
이혁민 교수가 눈을 반짝였다.
“딱 병원에 도착해서 그걸 보네. 일단 수술실도 구경할 겸 같이 올라가지.”
잘하면 김지훈이 어떻게 수술에 임하는지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과연 박경일 과장의 말처럼 재주가 있는지도 궁금했다.
‘후천적인 노력에 타고난 재주까지 있으면 금상첨화겠지. 이준영 선생님이 어떻게 가르치셨는지도 궁금하네.’
이혁민 교수와 박경일 과장이 유석재와 함께 응급실을 먼저 들른 후 수술실로 올라갔다. 서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규모였지만 상당히 체계가 잘 잡혀 있었다. 박경일 과장을 비롯한 스태프들의 자긍심과 노력이 엿보였다.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곧 수술실로 올라 덧 가운을 입고 수술실을 살폈다. 아뻬라면 이미 첫 수술은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회복실에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수술 중인가 보네.”
“그런가 봅니다, 선생님. 왜 아직 첫 번째 수술도 안 끝났지? 뭔 일 있나?”
앞장서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던 박경일 과장이 깜짝 놀랐다. 아뻬라고 노티를 받았는데 최철한이 막 맹장을 자르고 있었다. 박경일 과장이 급히 수술복으로 갈아입으려 하자 이혁민 교수가 슬그머니 막아섰다.
“박 과장, 최철한하고 김지훈이가 어떻게 하는지 좀 보자. 믿을 만한 놈들이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김지훈은…….”
“미숙하면 그때 손 바꿔도 늦지 않아.”
수술을 하던 최철한이 흠칫 놀라며 손을 멈췄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과장님, 연락이 안 돼 일단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지훈도 급히 인사를 했다.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박경일 과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수술 부위를 보며 물었다.
“최철한, 뭔데 대장까지 건드려? 아뻬라고 했잖아.”
“아뻬는 맞는데 원인이 맹장에 발생한 종양이었습니다.”
맹장만 제거하면 되니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대장을 자른 후 장과 장을 연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무조건 수술에 들어갔을 것이다.
‘철한이 정도면 이 정도 수술은 충분히 할 수 있겠지만 김지훈이 문젠데. 이혁민 선생님은 무슨 생각으로 지켜보자는 거지?’
자신의 수련을 담당했던 교수의 말이었다. 노련함은 따라갈 수도 없었다. 전공의를 보고 판단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시간만 지체될 뿐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아냐, 괜찮아. 계속해.”
박경일 과장이 손을 저으면서도 불안한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졸지에 수술실이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이혁민 교수를 본 김진호까지 일어나는 통에 결국 모든 시선이 수술 부위로 향했다. 김지훈이 인사를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새로운 긴장이 확 다가왔다.
‘어후! 실수하면 안 되는데, 보는 사람이 많으니까 되게 떨리네. 이혁민 교수님가지 계셔서 그런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최철한과 손을 맞췄다.
맹장이 절제됐다. 그동안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던 박경일 과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최철한이 실수 없이 원칙대로 수술을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맹장은 이런 식으로 자르는구나. 배워야 할 게 산더미네.’
김지훈이 눈가를 좁히며 절제 과정을 머릿속에 박았다.
이제 한쪽이 뻥 뚫린 대장을 봉합할 차례였다.
가장 중요한 과정이었다. 조그만 실수로 인해 나중에 변이라도 새어 나오면 최악의 경우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었다. 세균 덩어리인 변으로 인해 나이가 많은 환자의 경우 삽시간에 패혈증이 유발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긴장된 눈으로 수술을 지켜보았다. 특히 김지훈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대장 봉합 과정은 집도의만큼이나 퍼스트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점점 표정들이 묘해졌다.
‘어, 저놈 뭐야?’
공통된 생각이었다. 1년차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하게 퍼스트를 서고 있었다.
마침내 대장 봉합이 끝나자 박경일 과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타고난 재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경험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김지훈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병원은 단 한 곳뿐이었다.
“김지훈, 너 음성에서 퍼스트 어디까지 섰어?”
“궤양 천공으로 인한 복막염 수술까지 서 봤습니다.”
“대장 봉합 케이스가 있었어?”
“대장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님께서 원칙은 알려 주셨습니다.”
박경일 과장은 물론 이혁민 교수도 놀랐다. 대장은 같은 장이라고 해도 위와 소장을 봉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위험도가 큰 만큼 어려운 술기였다. 경험이 없다는 김지훈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묵묵히 수술이 마무리되는 것을 지켜보던 박경일 과장이 아뻬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침 간호사가 다음 환자를 올리라고 응급실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
문득 이번 기회에 첫 수술을 주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장된 100일 당직은 어느 순간 김지훈의 의욕을 꺾어 버릴 수도 있었다.
모든 1년차들이 바라 마지않는 수술을 받는다면 새로운 활력을 얻을 것이 뻔했다. 내심 수술을 어떻게 하는지 보고도 싶었다. 솔직히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흐음! 너무 빠른 것 같은데. 하지만 이 정도로 퍼스트를 설 수 있다면 꼭 시기를 지켜야 할 필요는 없잖아. 사기를 살려 줄 때도 됐고.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던 박경일 과장이 낮은 목소리로 이혁민 교수의 생각을 물었다.
“선생님, 김지훈에게 수술을 줘도 될까요?”
“그건 박 과장이 결정할 문제 아닌가? 난 서울 트레이닝만 관리해.”
안 되는 일은 결코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 이혁민 교수였다. 특히 전공의 수련에 관한 한 예외는 없었다. 그런데 박경일 과장에게 결정을 넘겼다는 것은 자신이라면 수술을 주었을 것이란 말이었다.
‘수술을 빨리 받았다고 자만할 놈이 아니다. 도리어 더 열심히 할 놈이야. 이 정도로 퍼스트를 설 줄 안다면 훗날을 위해서라도 조금 빠르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디, 수술은 어떻게 하는지 보자.’
잠시 고민하던 박경일 과장이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술을 끝낸 최철한이 수술 가운을 벗으며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잘했어. 이젠 나 없어도 웬만한 수술은 다 하겠다.”
칭찬을 아끼지 않은 박경일 과장이 김지훈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간 퍼스트를 서고 나면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침착한 모습으로 무언가 생각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김지훈,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예? 아! 방금 전 수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박경일 과장이 넌지시 물었다.
“퍼스트를 선 게 그렇게 감격스럽냐?”
“예, 감격스럽습니다. 그래서 확실히 기억해 두려구요.”
외과 전공의다운 말에 박경일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