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학회는 못 가도 (2)
금요일 아침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새벽 5시 30분. 드레싱을 해야 하는 시간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하지만 최철한과 회진을 돈 후에는 일요일과 똑같은 여유가 생겼다. 이때가 기회였다.
후다닥 일을 마친 김지훈이 병동 의국으로 들어갔다. 의자 몇 개를 길게 이어 붙이고는 잠을 청했다. 불편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인 것처럼 무거웠다.
김지훈이 머리가 바닥에 닿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했다.
3시간쯤 잤을까?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한참을 울린 후에야 김지훈은 간신히 눈을 떴다. 머리가 멍한지 전화기를 든 채 한참을 이마를 주물렀다. 응급실 인턴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귓가에서 앵앵거렸다.
“응, 아뻬가 의심된다고. 뭐, 아뻬?”
정신이 번쩍 든 김지훈이 부랴부랴 응급실로 달려갔다.
아뻬 환자가 왔다.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티를 받은 최철한이 신중하게 환자를 본 후 수술 결정을 내렸다. 삐삐를 쳐 어렵사리 연락이 된 박경일 과장이 오케이 사인을 냈다. 김지훈은 휘파람까지 불며 일사천리로 수술 준비를 했다.
환자가 수술실에 들어서기 전 수술 계획을 세우며 과정을 상기했다. 이젠 몸에 익어서인지 자연스럽게 터졌을 때와 농양을 형성했을 때까지 가정하며 계획을 세웠다.
수술이 시작됐다.
윤서연이 마취를 유지하고, 그 옆에 김진호가 앉았다.
한참 수술을 진행하던 최철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경일 과장에게 김지훈이 생각보다 상당히 능숙하다고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함께 수술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음성에서 좀 서 봤고, 과장님께 다시 배웠다고 해도 이 정도면 1년차의 손이 아닌데. 정말 손재주를 타고났나? 아니면 음성에서 생각보다 퍼스트를 많이 섰던 걸까?’
잠시 샛길로 샜던 최철한이 고개를 흔들며 수술에 집중했다. 아뻬 정도는 쉽게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최철한과 숱하게 퍼스트를 선 김지훈이 만났다.
빠르고 정확하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 너 제법이다.”
최대한 감정을 숨긴 최철한의 말에 김진호가 웃었다.
“지훈이 이 자식, 확실히 손재주가 있어. 음성하고 구미에서 얼마나 서 봤다고 이 정도로 보조를 맞추냐. 철한아, 너도 그렇게 보이지?”
농담인지 너스레인지 모르지만, 김지훈으로서는 얼굴이 빨개질 일이었다.
“예. 처음 같이 수술을 했는데 너무 편하네요. 3년차 정도 되면 칼바람 좀 날릴 것 같습니다. 자식, 부럽다.”
김진호의 말에 최철한이 솔직하게 속마음을 드러냈다.
윤서연까지 자기 일처럼 좋아해 부담 백배였다.
자신을 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수술이 더 뜨기만을 바랐다. 이왕이면 아뻬 말고 다른 수술로!
“선생님, 혹시 복막염이 뜨면 우리 둘이 수술할 수 있을까요?”
“케이스에 따라 다르지만, 힘들걸. 나도 과장님이 안 계시면 조금은 부담스럽고. 퍼스트 서는 거하고 집도는 차원이 다른 문제야.”
왜 모르겠는가?
아무리 작은 수술도 전신 마취를 해야 하는 수술은 집도의에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김지훈도 음성에서 아뻬를 할 때마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느꼈던 문제였다.
‘솔직히 그렇긴 하네. 문제라도 생기면 수술실에 들어오지도 않는 과장님이 책임을 져야 하잖아. 지금은 보면서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아쉬워하는 기색이 가득한 김지훈을 본 김진호가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복막염이 오면 하면 되지. 철한이하고 지훈이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수술 잘하면서 엄살은.”
최철한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었다.
한 케이스를 끝으로 아쉬운 금요일이 지났다.
드레싱과 회진 이외에는 일이 없어 간만에 잠을 좀 잤다. 최철한의 눈을 피해 숨어서 자야 했지만, 이럴 때 자지 못하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인 덕에 머리는 좀 맑아진 것 같았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던 김지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같은 아뻬라도 선생님들의 수술하는 방식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다르구나. 확실히 이준영 선생님이 수술을 제일 잘하시는 것 같네. 그나저나 언젠가는 암 수술 퍼스트를 서야 할 텐데, 세컨만 서면 어떻게 수술을 배우지?’
아직 먼 일이었지만 은근히 걱정되는 문제였다.
‘그건 그거고, 일단 환자부터 와라. 역시 퍼스트는 서야 수술실에서 기분이 나네.’
그날 밤 툭하면 응급실에서 콜이 왔다. 그때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부리나케 달려갔지만, 심한 장염이나 다른 질환으로 내원한 환자들뿐이었다. 아쉽기만 했다.
‘아직 이틀이나 남았다.’
김지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토요일 아침, 때아닌 비보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박경일 과장이 오후 서너 시면 돌아온다는 연락을 한 것이다.
“에엥? 내일까지 학회잖아요. 왜 벌써 오신대요?”
“이혁민 선생님께서 오신대.”
“이혁민 선생님이요?”
“오늘 오전에 주제 발표가 다 끝나시나 봐. 그동안 구미에 한 번도 오신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겸사겸사 오시는 걸지도 몰라.”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이혁민 교수를 본 지도 벌써 4개월 가까이 됐다. 비록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멘토로 삼은 이혁민 교수를 본다니 가슴이 설랬다.
‘이혁민 선생님은 어떤 식으로 트레이닝을 시키실까? 배울 게 정말 많은 것 같은데, 제대로 배우려면 기본은 확실하게 익히고 서울로 가야겠지?’
서울은 마지막 텀이었다. 아직 먼 일이었지만 준비는 아무리 빨라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인턴 때 리포트를 받은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김지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땐 힘들었지만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점심때가 지나 기다리던 응급실에서의 콜이 왔다.
1시가 거의 다 지났다. 불과 두세 시간 후면 박경일 과장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자칫 퍼스트가 아니라 세컨드를 서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마음이 급해진 김지훈이 번개처럼 달려갔다.
우하하하!
아뻬 환자가 둘이나 왔다.
60세 여자와 20세의 건장한 남자였다.
입이 찢어질 것처럼 좋아하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마지막으로 언제 드셨다고요?”
“9시에 아침 먹었는데요.”
아니, 배가 상당히 아팠을 텐데, 먹을 생각이 나나?
전신 마취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 6시간 이상의 금식이 필요했다. 초응급이라면 모르지만, 아뻬 환자에게는 철칙이었다. 그런데 간절한 바람도 무색하게 환자 2명 모두 아침을 먹은 것이다. 빨라도 3시는 돼야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정말 재수도 지지리 없었다.
‘어후! 과장님이 3시에 오시면 안 되는데. 제발 4시 넘어서 오세요, 과장님.’
최철한에게 오더를 받은 후 스케줄을 제출했다.
윤서연이 오프를 가는 바람에 김진호가 스케줄을 받았다.
“60세 여자 환자부터 정확히 3시에 올려.”
수술 순서를 정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경우에는 나이가 가장 큰 요소였다. 어린아이가 최우선이었고, 다음으로는 노인이었다. 젊은 환자는 당연히 뒤로 밀렸다.
“예, 알겠습니다.”
“근데 김지훈, 표정이 왜 그래?”
김지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과장님이 3시에 오실까 봐요. 세컨을 서면 졸려서 미치겠어요.”
“난 또 뭐라고. 하여간 수술 욕심은 많아 가지고. 그건 그렇고, 지훈아, 알지? 철한이한테 전해라. 응급이 연장이다.”
김진호의 말에 김지훈이 힘차게 대답을 했다. 수술이야 어찌 됐든 김진호가 1년차인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문득 최철한이 준 계란 프라이가 생각났다.
“옙, 맥주 한 박스 대령하겠습니다.”
김지훈의 말을 들은 최철한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바로 맥주 한 박스를 마취과 의국으로 올려 보냈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시계가 3시를 알리는 순간, 김지훈이 간호사들까지 재촉하며 환자를 올렸다. 노티를 받은 박경일 과장은 아직 오지 않았다.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술이 시작됐다.
순조롭게 배를 열고 아뻬를 확인하던 최철한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지훈아, 맹장 좀 만져 봐.”
김지훈도 이상했던 참이었다. 맹장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충수 돌기에 염증이 심해도 맹장까지 염증이 퍼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의아한 눈으로 맹장을 만지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밤톨만 한 덩어리가 만져졌다.
충수 돌기염의 원인 중 하나로, 맹장에 발생한 종양이 있다.
양성인 경우에는 충수 돌기와 함께 종양을 포함한 맹장을 제거하면 끝이었다. 반면 악성인 경우에는 원래 우측 대장까지 광범위하게 절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악성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대장 내시경은 물론 복부 CT까지 찍어야 한다. 하지만 충수 돌기염이 발생한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대장 내시경을 하기 위해서는 이삼 일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검사를 하는 동안 충수 돌기가 터지면 암도 문제지만, 변이 새어 나와 치명적인 복막염이 발생하게 된다.
더욱이 상황에 따라서는 암 세포가 터진 부위를 따라 주변으로 퍼질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일단 양성 종양에 준해 수술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맹장은 대장의 시작 부분으로 소장과 연결된 부위 하방에 위치한 대장을 가리킨다. 이름도 한쪽 끝이 막혀 있기에 장님 맹 자를 붙여 맹장(盲腸)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제거한 후에 절제된 단면을 장과 연결할 필요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절제된 부위를 봉합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이었다.
최철한이 이를 몰라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아뻬를 포함해 맹장까지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최철한도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김지훈이 더 문제였다. 아뻬와 대장 일부를 절제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수술이었기 때문이었다. 퍼스트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다.
‘퍼스트가 제대로 장 봉합을 도와주지 못하면 샌다. 그러면 환자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어. 욕심은 나지만 일단 과장님에게 연락을 하는 게 맞아.’
“간호사, 과장님에게 연락 좀 해 줘요.”
마취과 간호사가 몇 번이나 연락을 시도했다.
고속도로에 있는지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었다.
김진호가 재촉을 했다. 김지훈이 충분히 퍼스트를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불안한 기색도 없었다.
“최철한 선생, 수술 진행합시다.”
“선생님, 맹장을 제거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우리 둘이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우려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럼 10분만 더 기다려 보고, 그때도 연락이 안 오면 진행합시다. 이대로 수술을 중단할 수도 없고, 마취 시간이 늘어나면 환자에겐 좋을 것이 없어요.”
평소와는 달리 김진호가 같은 연차지만 까마득한 학교 후배인 최철한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 지금은 최철한이 집도의라는 것을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째깍째깍!
시계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약속했던 10분이 다 지나도록 박경일 과장은 연락을 해 오지 않았다. 최철한이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김지훈, 퍼스트 설 수 있겠어?”
“예, 해 보겠습니다.”
의외로 자신 있는 대답이었다. 그래도 1년차였다. 못 미더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만일 김지훈이 미숙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 최철한이 수술을 다시 진행했다.
“간호사, 과장님께 연락이 오면 수술 상황에 대해 바로 말씀드리세요. 김진호 선생님,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십시오.”
최철한은 긴장감 때문에 김진호의 목소리에 여유가 넘친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김지훈, 하라는 대로 잘해야 돼. 실수하면 수술한 부위 샌다. 배 속으로 변이 새어 나오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예, 선생님.”
김지훈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수술에 임했다.
생각해 보니 대장을 봉합하는 수술은 들어간 적이 없었다. 소장 봉합을 해 본 경험과 음성에서 읽었던 책, 그리고 이준영 과장이 지나가 듯 설명한 방법에 의존해야 했다.
***
그 시간, 이혁민 교수는 구미로 향하고 있었다. 한동안 묵묵히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긴 채 말이 없었다.
자신의 발표는 오전에 끝났지만 이번 학회는 다른 때와 달리 매우 다양한 주제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특히 최근 크게 관심을 두고 있던 유방과 갑상선 질환에 대한 최신 지견들을 듣고 토론하고 싶었다.
김지훈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경주에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