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소소할지라도 자만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3)
은밀한 불법의 대가는 너무도 달콤했다.
삼겹살이 이런 맛이었나?
상추에 콩나물 무침을 얹고, 잘 익은 고기 두 점을 올린 후, 마늘과 고추를 곁들인 맛은 환상이었다. 깻잎은 또 어떤가?
가히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 소주 한 잔 생각이 났다. 홀짝홀짝 소주를 마시는 유석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딱 한 잔만 하면 피로가 싹 풀릴 것 같았다.
‘쩝! 딱 한 잔만 하고 싶다. 어휴! 이것도 고문이네.’
유석재가 귀신같이 눈치를 챘다.
“술 먹고 싶으면 먹어. 그 대신 일 빵꾸 나면 죽는 거야.”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지금 상태로는 아마 소주 반 잔에도 뻗을 것이다. 그 대가는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뻔했다.
“선생님도 참! 100일 당직인데 술을 어떻게 먹어요.”
“나도 딱 세 잔만 하자.”
마지막 잔을 비우며 유석재가 피식 웃었다.
역시 고기는 위대했다. 든든한 배를 두드리며 병원으로 들어간 김지훈이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일을 끝낸 후 재빨리 잠자리에 들었다.
유석재는 나직하게 코를 골며 꿈나라를 달리고 있었다. 잘 수 있을 때 자야 했다. 하지만 역시 구미는 아뻬의 밭이었다. 월요일 새벽, 아뻬 환자가 2명이나 왔다.
김지훈도, 유석재도 토끼 눈을 한 채 한숨을 쉬었다.
“어이구! 죽겠다. 100일 당직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저도 바라고 있습니다. 근데 이제 일주일 지났네요. 선생님, 어떻게 하죠?”
공연히 김지훈이 미워진 유석재가 헤드록을 걸었다.
캑캑거리며 용틀임을 해 머리를 빼낸 김지훈이 재빨리 병동으로 향했다.
“드레싱 갑니다. 선생님, 한 시간이라도 주무세요.”
유석재가 웃고 말았다.
100일 당직이 연장됐으면 하루 종일 얼굴을 찌푸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웃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김지훈만큼 유쾌한 놈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침 회진 후 둘 다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박경일 과장이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철한아, 어디서 고기 냄새 안 나냐? 삼겹살 같은데.”
“삼겹살 냄새요?”
코를 킁킁거리며 두리번거리던 최철한이 잠깐 멈칫하더니 스윽 유석재를 보았다.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유석재, 내가 작년에 안 걸리면 살고, 걸리면 죽는다고 했지. 이것들을 그냥 확!’
최철한의 매서운 눈초리에 김지훈과 유석재가 움찔거렸다.
“과장님, 나긴 나는 것 같습니다. 병동에서 이런 냄새가 나면 안 되는데 제가 누군지 알아내서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래, 확실하게 해. 그래도 죽이진 마.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겠냐.”
김지훈은 하루 종일 최철한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역시 죄를 짓고는 못 사는 모양이었다. 일과가 끝나고 난 뒤 유석재가 심각한 표정으로 김지훈을 불렀다.
“지훈아, 최철한 선생님이 나부터 오란다. 넌 일하고 있어.”
‘어후! 삼겹살 한 번 먹고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어깨가 축 처진 김지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잠시 후, 유석재가 숙소에 들어서자 최철한이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석재야. 지훈이 지금 100일 당직 연장 근무 중이다. 아차 하면 완전히 나가떨어질 수 있다는 거 알고 먹은 거지? 만일 그런 문제가 생기면 그건 다 우리 책임이야. 지훈이 잘못이라고는 우리 말을 따른 것밖에 없어. 알지?”
“예, 선생님. 잘 알고 있습니다. 긴장 풀리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알아서 잘해. 그리고 인마, 어제 진달래 식당에서 과장님하고 장 과장님 둘이서 식사하셨단다. 아무리 구석방에서 드셨다고 해도 어떻게 그걸 못 보니. 너 소주 몇 잔 먹었는지도 아시더라.”
어떻게 그걸 못 봤을까?
유석재가 할 말을 잃었다. 최철한이 웃으며 침대에 막 누웠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탕수육 왔나 보다. 지훈이 불러.”
“갑자기 웬 탕수육을 시키셨어요?”
“남들이 욕할까 봐 시켰어, 인마. 얼마나 안 먹였으면 아래 연차들끼리 몰래 고기를 먹었겠냐고 할 거 아냐?”
잠시 후,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최철한이 탕수육을 내밀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지훈, 많이 먹어.”
난데없는 탕수육에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유석재를 보았다. 표정이 나쁘지 않아 안심은 됐지만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놈의 탕수육은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
눈치를 보면서도 꾸역꾸역 먹어 대는 김지훈을 보던 최철한이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김지훈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었고, 연장된 100일 당직은 거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서울에서 1년차 트레이닝을 담당했던 유석재도 이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니 김지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구미에서의 2주차 근무 역시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전 주보다 정규 수술이 많았던 데다 응급실까지 바빠 침대에 누워 보지도 못했다. 급기야 수술실에서 어시스트를 서다 조는 바람에 무릎까지 꺾였다.
“얼씨구! 잘한다고 했더니 바로 졸아?”
박경일 과장과 선배들의 살벌한 눈초리에 김지훈이 비상수단을 강구해 냈다. 간호사에게 부탁해 수술 중 졸음이 몰려오면 찬물을 등에 부어 달라고 했다.
과연 잠이 확 깰까?
수술복 안으로 얼음을 넣어도 잠시뿐이었다.
이제는 일과의 싸움이 아니라 졸음과의 싸움이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졸다가 깨지기를 반복한 김지훈이 멍하니 차트를 보다 탁자에 엎드려 머리를 파묻었다.
‘어휴! 요새 같으면 정갑수가 옆에 있어도 감사하겠다. 다들 잘 지내겠지? 일석아! 보고 싶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의국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깨닫고 있었다. 바로 동료의 소중함이었다. 외과 의사만큼 서로 간의 협조와 이해가 필요한 의사는 없었다.
혼자서 모든 수술을 할 수는 없다. 가능하다고 해도 언젠가는 실수를 하게 되고, 이는 환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자신과 환자를 위해서라도 동료들을 믿고 함께해야 했다.
동료에 대한 불신은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의 목을 위협할 뿐이었다. 하기에 스스로도 동료들의 신뢰를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외과 의사였다.
갑자기 동기들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던 김지훈은 어느새 코를 골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측은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3개월도 넘게 오프도 없이 이렇게 일하면 로봇이라고 해도 못 버티겠다. 전에 있던 병원에서도 되게 힘들었다는데, 과장님도 너무해. 숙소에서 편하게 주무시라고 깨울까?”
“아냐, 깨우지 마. 아직 할 일이 잔뜩 남았는데 김지훈 샘이 숙소로 가시겠어? 잠깐이라도 더 주무시는 게 더 나을 거야.”
30분 정도 지났다. 김지훈이 뭔가에 놀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핏발 선 눈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부랴부랴 찬물에 세수를 하고 차트를 들었다.
김지훈은 밤이 깊어지도록 병동을 떠나지 못했다.
이런 생활이 트레이닝의 전부라면 아무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김지훈 역시 즐거움이 있기에 힘을 낼 수 있었다.
음성에서 초턴 근무를 한 후배들이 모조리 구미로 왔다.
안호석이 일반 외과를 돌아 은근히 마음이 편했다.
특히 성형외과를 도는 서도진만 보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당직실에서 때아닌 고함 소리가 울렸다.
“으아아! 죽고 싶다.”
“왜 그래, 인마?”
“선생님, 혹시 작년에 구미에서 성형외과 안 도셨어요? 장성기 과장님, 정말 너무하게 태우시네요. 선생님도 음성에서 심하게 타셨잖아요. 어떻게 버텼는지 노하우 좀 알려 주세요.”
김지훈도 이미 경험을 한 일이었다. 괴로워하며 소리를 지르는 이유가 뻔했지만 짐짓 모른 척하며 말했다.
“나도 작년에 돌았는데 수처 때문에 태우셔? 이상하다. 난 그냥 칭찬받으면서 처음부터 얼굴 수처했는데.”
“정말이요?”
서도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형이 수처 좀 하잖냐. 잘하는 데 왜 태우시겠어.”
“그러니까요. 나도 형, 아니 선생님 덕분에 음성에서 수처 좀 한다고 인정받고 왔는데 말이 돼요?”
“말이 되지. 너도 어떻게 하면 안 탈 수 있는지 인계했을 거 아냐. 근데 탔어. 그럼 당연히 못하는 거지.”
급기야 서도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어후! 정말 그런가. 죽겠네. 그렇다고 성형외과 돌면서 얼굴 수처를 안 할 수는 없잖아요.”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후배 놀려 먹는 재미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며칠 더 놀려 줄까? 아니지. 자식! 내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변상훈 과장님께서 말씀하신 필살기를 전수해 주마.’
김지훈이 서도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일어났다.
“도진아, 열심히 해. 3주밖에 더 타겠냐.”
“예, 선생님.”
서도진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당직실을 나서던 김지훈이 나가다 말고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신 있게 해. 얼굴이라고 주저하면 끝날 때까지 탄다.”
“예, 선생님.”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대답한 서도진이 이마를 주무르다 벌떡 일어났다. 문득 자신 있게 하라는 말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든 것이다.
‘형, 땡큐!’
서도진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응급실을 나서던 김지훈이 히죽 웃었다. 방금 전까지 숨이 넘어가던 서도진이 속이 후련해진 것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자식! 좋아하기는. 하긴, 나도 저랬었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괴롭다고 여긴 일들이 곧 즐거움이었고, 그간 바라 마지않았던 일이었다.
이론에 대한 갈증을 달래 주는 리포트 작성과 발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반 외과 수술의 향연.
든든하기만 한 선배들과 후배들.
‘희한하네. 생각하기에 따라 괴로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힘들다고 여기지 말고 즐거운 쪽으로만 생각하자.’
마음을 달리 먹은 덕일까?
온몸에서 힘이 펄펄 나며 눈빛까지 살아나는 일이 생겼다.
박경일 과장이 수술 케이스를 봐 가며 퍼스트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자식, 눈이 초롱초롱하네. 그렇게 재밌어?”
“예, 과장님.”
김지훈이 한 번이라도 더 서 볼 욕심에 눈에 힘까지 주며 대답을 했다. 그동안 숱하게 1년차들을 보아 온 박경일 과장이 노련하게 일정을 조정했다.
김지훈이 힘들어 하며 지친 기색이 역력할 때마다 적절하게 퍼스트를 세웠다. 채찍과 당근 수법이었지만 김지훈에게는 생명수이자 생활의 활력소였다.
박경일 과장도 김지훈을 퍼스트에 세울 때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 이상으로 매끄럽게 어시스트를 해 마치 이삼 년차와 수술을 하는 것 같았다.
‘이놈하고 수술을 하는 게 갈수록 더 편하네. 음성에서 이 정도로 트레이닝을 시킬 수는 없을 텐데, 놀라워.’
집도의가 편안하게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경함이나 재주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수술에 대해 잘 알아야 할 뿐만이 아니라 집도의가 어떤 식으로 수술을 하는지 잘 잡아내야 했다.
이제 두 번째 텀을 도는 1년차들에게서는 정말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갈수록 지쳐 가고 힘들었다. 하지만 정식 트레이닝 과정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다소나마 버틸 수 있는 여력을 얻었다.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들이 눈에 선했다. 그만큼 일 처리 속도가 빨라져 단 10분이라도 절약할 수 있었다.
주말을 맞아 간만에 고경아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 너무 피곤해 고경아고 윤서연이고 당분간은 신경을 쓰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더구나 수술실에서 툭하면 윤서연을 보다 보니 은연중 부담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찾아온 일요일의 여유가 고경아를 떠올리게 했다.
“그동안 전화 자주 못해서 미안해요. 서운해요?”
(아니요. 바쁘시니까 그렇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섭섭해하는 기색이 목소리에 잔뜩 묻어 있었다.
“사실 시간이 거의 없어요. 100일 당직이 연장됐거든요.”
(네? 그럼 오프도 없이 근무를 하신단 말이에요?)
수술실에서 근무하는 덕에 외과 전공의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고경아였다. 특히 100일 당직 중에 쓰러지지 않는 것이 용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고경아가 한걱정을 했다.
(힘들어서 어떻게 해요.)
“그래도 해야죠. 시간이 갈수록 모자란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배워야 하는 건 다 배워야 나중에 좀 편해지지 않겠어요?”
고경아가 맑게 웃었다.
(지훈 씨는 매사에 긍정적이라 참 좋아요.)
“안 그럼 벌써 쓰러졌을 겁니다.”
잠시 통화를 하던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밀린 일을 정리하고 입원 환자들을 보려면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