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소소할지라도 자만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2)
그깟 몇 번의 수술과 일천한 경험을 믿고 자만했다.
치질 환자든 아니든 간에 항문 출혈은 직장 수지 검사가 원칙이었다. 기본과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자만 말고는 다른 이유를 댈 수가 없었다.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이준영 과장이 그렇게도 강조했던 것을 잊은 것이다.
알량한 지식을 믿고 까분 것이 창피했다.
김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머리를 감싼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야 왜 이렇게 피곤한지 알았다.
욕심만 앞세웠다. 어쩌면 음성에서 퍼스트를 서고 복막염까지 수술한 것을 당연하게 여겼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은연중에 내심 자랑을 하며 1년차의 일을 우습게 여겼던 걸지도 몰랐다.
‘난 지금 기본을 익히는 중이다. 음성에서의 일은 예외적인 일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준영 과장님도 자만하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를 하셨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이준영 과장을 스승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음성의 상황에 맞춰 최선을 다했고, 그 방식이 정식 트레이닝과는 달랐을 뿐이었다. 다른 병원이었다면 이준영 과장도 결코 그와 같은 방식으로 트레이닝을 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불과 일주일도 안 돼 자만하고 기본까지 잊다니, 반성하고 또 반성할 일이었다. 환자를 앞에 두고 실수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밤하늘에 빛나는 2개의 별이 보였다.
한참 동안 그 별들을 응시하던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늦지 않게 깨달았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토요일, 리포트 발표를 하는 김지훈의 목소리가 힘찼다. 시뻘건 눈에 피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발표가 끝나자 박경일 과장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김지훈, 너 무슨 일 있었어?”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과장님?”
“어제랑 다르다. 다 죽어 갈 것처럼 힘이 하나도 없더니 오늘은 내가 알았던 김지훈으로 돌아왔네.”
최철한이 의아한 눈으로 유석재를 보았다.
“석재야, 진짜 달라진 것 같다. 정말 무슨 일 있었어?”
“글쎄요, 지훈이가 알겠죠.”
김지훈에게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유석재 선생님과 응급실 환자를 보면서 이제야 제가 1년차라는 걸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많이 혼내고 가르쳐 주십시오.”
박경일 과장이 피식 웃었다.
내심 100일 당직을 연장한 것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었다. 특히 김진호가 전한 음성 생활을 들으며 부담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수술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어쨌든 김지훈이 다른 1년차 이상으로 힘들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과중한 업무와 심한 정신적 피로는 자칫 김지훈에게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섰다. 계속 풀 당직을 세워야 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대견하면서도 믿음직했다.
“역시 1년차에겐 2년차가 약이네. 좋아, 김지훈. 지금처럼만 해. 그럼 시작해 볼까? 최철한, 질문할 거 없어?”
토요일 리포트는 소아 탈장에 관한 것이었다.
열심히 준비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3명에게 돌아가면서 새카맣게 탔다.
30분도 안 돼 온몸이 땀으로 젖고서야 발표가 끝났다.
김지훈이 숨을 헐떡거리며 혀를 내밀자 유석재가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지훈아, 인마.”
그 한마디였지만 다른 어떤 말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주말의 한가함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3년차인 최철한은 주말 오프를 갔고, 유석재는 숙소에서 부족한 잠을 채우느라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김지훈은 병동에 남아 주중에 밀렸던 일과 미진한 부분을 보충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처럼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래도 이젠 즐거웠다. 일반 외과 환자를 보는 즐거움을 다시 찾은 것이다.
일요일 오전, 아뻬 환자가 왔다.
인턴과 김지훈을 거쳐 유석재까지 환자를 보고 나서야 박경일 과장에게 노티를 했다.
여러 의사들의 손을 거치며 같은 질문을 받아야 하는 환자에겐 번거롭고 짜증 나는 일일 수도 있었지만 이것이 대학 병원의 트레이닝이었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유능한 의사를 길러 낼 방법이 없었다. 또한 결과적으로 보다 정확한 진단을 가능하게 해 환자들에게도 유리한 일이었다.
곧 응급 수술 스케줄을 잡고 수술을 준비했다.
마취과 주말 당직인 윤서연이 환자와 함께 수술실에 올라온 김지훈을 슬며시 째려보았다.
‘이럴 때라도 슬쩍 먼저 올라오면 안 되나? 난 네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데, 넌 하나도 궁금한 게 없나 보지?’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었지만 100일 당직이 연장된 김지훈에게 차마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얼굴을 보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힘든 티가 역력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날 수도 없었다. 잠잘 여유도 없을 것이 빤한데 시간까지 뺏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으휴! 차라리 어떻게 사는지 몰랐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내가 왜 눈길도 안 주는 놈한테 이렇게 매달리지?’
윤서연 딴에는 과격한 욕까지 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지훈은 수술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곧 수술이 시작됐다. 수술실에 들어온 박경일 과장이 잠시 고민하더니 유석재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유석재가 웃으며 말했다.
“과장님, 지훈이 퍼스트 세우시려구요?”
“그래, 슬슬 손이 어떤지 봐야지.”
“그럼 저도 세컨 서면서 구경 좀 할게요.”
“석재 너도 지훈한테는 꽤 신경을 써. 다른 때 같았어 봐, 세컨 서라고 할까 봐 벌써 도망갔을 거 아냐? 일 없으면 마음대로 해라.”
다들 은근히 궁금하던 차였다. 음성에서 퍼스트를 섰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한지는 알 수가 없었다. 윤서연이 수술을 해도 좋다는 사인을 내며 고개를 빼 들었다.
잠시 후 들어온 이용철 과장도 자못 궁금한지 수술실에서 나가질 않았다.
“장 과장에게 수처를 인정받고 변 과장에게 체스트 튜브(흉부 도관)까지 받은 놈 실력 좀 볼까?”
얼굴이 빨개진 김지훈이 숨을 고르며 수술 과정을 상기했다. 물론 이준영 과장의 말을 잊지 않고 수술 전에 이미 머릿속으로 계획까지 세웠었다. 집도는 아니지만 퍼스트를 설 때도 정말 유용한 방법이었다.
수술이 시작됐다.
퍼스트를 서는 김지훈의 손길이 상당히 능숙했다.
배가 열리고 아뻬를 제거하는 과정에 들어가자 박경일 과장이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두 번 서 본 솜씨가 아니었다. 유석재나 최철한이 들어왔을 때처럼 편안하게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용철 과장이 중얼거렸다.
“야! 잘하네. 얘, 1년차 맞아?”
물 흐르듯 순조롭게 아뻬가 제거됐다. 흔히 잘 익었다고 말할 정도로 딱 적당한 시기에 수술을 했다. 이때쯤 놓치기 쉬운 일이 있었다.
급성 충수염이 확실하기에 대부분 배 속을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곤 했다. 그런데 김지훈이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잘 보이도록 절개 창을 쭉 끌어당겼다.
‘지금 알고 한 거야?’
박경일 과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김지훈, 왜 끈 거야?”
김지훈이 흠칫거리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통상 집도의마다 수술 스타일이 조금씩 달랐다.
이준영 과장과는 수술하는 차례가 틀렸을 수도 있었다.
“아뻬를 절제한 부위 주변의 대장하고 소장을 확인할 차례가 아닌가요?”
“아니, 맞아. 지금 확인해야지. 그런데 김지훈, 너 음성에서 퍼스트 얼마나 서 봤어?”
박경일 과장의 질문에 김지훈이 잠시 주저했다. 문득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한 이준영 과장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하지만 굳이 속여야 할 일은 아니었다.
“여러 번 서 봤습니다.”
여러 번이라는 말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말 그대로 몇 번일 수도 있지만, 경험이 많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경일 과장에겐 전자일 뿐이었다. 음성 병원에 대한 선입견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
‘경험이 많지는 않을 텐데 상당히 잘하네. 이놈도 손재주를 타고났나?’
“그래? 걱정했는데 수술 트레이닝은 잘 받았네.”
김지훈이 마지막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퍼스트를 섰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박경일 과장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조금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음성 병원은 개인 종합 병원에 불과했기에 트레이닝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너무 깊었던 영향이었다. 그러나 김지훈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유석재에게 오더를 받던 김지훈이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퍼스트 선 게 그렇게 좋아?”
“그럼요. 저도 선생님처럼 집도식 한번 해 봐야죠.”
“너 퍼스트 서는 거 보니까 곧 하겠더라.”
“정말이요?”
김지훈이 반색을 했다.
수술을 하는 것만큼 즐겁고 행복한 일도 없었다.
“한 달 반만 기다리면 되겠지.”
“한 달 반이요? 에이! 좋다 말았네.”
“그럼 1년차한테 더 일찍 줄 줄 알았어? 꿈 깨, 인마.”
김지훈이 입을 삐죽거리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현수는 금 과장님한테 벌써 받았는데 꿈 좀 꾸면 안 될까요?”
같은 입장이라 할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공식 트레이닝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실 반은 농담조였다. 그런데 유석재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어라, 내가 또 뭘 건드린 거지?’
1년차에게 2년차는 하늘 중의 하늘이었다.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수 있었다. 힐끗 김지훈을 본 유석재가 콧등을 찡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너도 재단 이사장 아들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금 과장님한테 총애를 받든지. 이도 저도 아닌 놈이 욕심은.”
“그렇죠. 욕심이겠죠?”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잠시 환자를 보는 사이 유석재는 생각에 잠겼다.
‘현수는 확실히 변하고 있는데, 금 과장님은 수술을 주는 게 도리어 현수에게 문제가 된다는 생각은 안 하시나?’
입국식 직전 아뻬를 줬다. 한 번쯤은 더 줄 것이라고 모두들 예상은 했다. 그런데 도를 넘어섰다. 금 과장 앞으로 입원한 아뻬 환자의 수술을 거의 다 신현수에게 주었다.
뿐만 아니었다. 2년차도 받기 힘든 탈장 수술까지 주었을 때는 의국 분위기까지 가라앉았다. 신현수 개인적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전체를 보면 결코 득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위 연차들이 고까운 시선을 보냈다.
가장 친하고 이해해 주어야 할 손일석과 김경수도 불만이 팽배해 신현수와 한동안 말조차 섞지 않았다. 의국 내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금경태 과장이나 교수들이 챙겨 주는 것은 한계가 있다. 선배나 동기들의 눈 밖에 나면 트레이닝은 물론 4년간의 의국 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자칫 서울 병원만이 아니라 다른 병원에서도 혼자 고립될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신현수가 의국원들 앞에서 정식으로 사과를 한 것이다.
“제가 받지 말아야 할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과장님께 말씀드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비밀로 해 주십시오.”
사실 이런 사과를 할 사람은 신현수가 아니라 원칙을 깬 금경태 과장이었다.
그날 바로 외래로 내려간 신현수가 한동안 금경태 과장의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이후 금경태 과장은 단 한 건의 수술도 주지 않았다.
금경태 과장 입장에서는 얼굴을 붉힐 일이었지만, 무슨 얘기가 오간지는 몰라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신현수가 가진 배경의 힘인지, 아니면 적절한 처신 덕분인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현수 그 자식도 생각해 보면 대단한 놈이야. 1년차들을 위해서도 아주 좋은 일이고.’
생각에 잠겼던 유석재가 김지훈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선생님, 밥 먹으러 안 가세요?”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됐다.
고개를 끄덕이던 유석재가 일어나다 말고 김지훈에게 손짓을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야! 너 퍼스트도 섰는데 오늘 삼겹살이나 먹을까?”
“예? 저 100일 당직이잖아요.”
“몰래 먹으면 되지. 병원 앞 진달래 식당에서 먹으면 응급실 노티도 바로 받을 수 있잖아.”
고민이었다. 하지만 삼겹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들키지만 않으면 완벽한 범죄였다.
김지훈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작아졌다.
“과장님한테 들키면 어떻게 해요?”
“걱정 마, 인마. 나도 작년에 100일 당직하는 동안 최철한 선생님이 몇 번 고기 사 줬어. 서울에서도 괜찮았는데 설마 여기서 걸리겠냐? 가자. 일단 숙소로 가는 척하다 가운만 벗고 바로 나가는 거야.”
침을 꿀꺽 삼킨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