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45화 (145/1,329)

제1화 소소할지라도 자만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1)

첫 수술 환자는 고령의 탈장 환자였다.

박경일 과장이 집도하고, 유석재가 퍼스트를 섰다.

세컨드 어시스트 자리에 선 김지훈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박경일 과장님은 어떻게 수술을 하실까?’

의사마다 수술하는 방식이 조금은 다를까?

아니면 거의 똑같은 방식을 취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렇게 힘이 나던 수술이 이제는 배로 힘들었다. 세컨드 본연의 임무는 수술 시야를 확보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음성에서 수술까지 한 탓인지 어느 때보다도 수술에 대한 열의는 높았다. 그러나 세컨드는 위치상 퍼스트에 가려 수술을 잘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고개를 들이밀면 수술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온갖 자세로 목을 빼며 수술 과정을 보던 김지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반대편에서 써드 어시스트를 서고 있는 인턴과 똑같은 처지였다.

‘에휴! 수술 한번 보기 힘드네.’

결국 수술이 끝날 때까지 박경일 과장의 손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김지훈이 안타까움에 몸을 떨었다.

수술실에서의 차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수술이 끝난 후 유석재에게 오더를 받았다.

탈장 수술의 오더는 특이할 것이 없었다. 환자가 고령이라는 사실만 고려하면 됐다. 이 정도는 훤히 알고 있는 사항이었지만 일일이 받아 적어야 했다.

그렇게 4개의 수술이 끝났다.

보이지도 않는 수술 과정을 보겠다고 용을 쓴 탓에 허리만 뻐근했고, 피로감도 장난이 아니었다. 마지막 환자의 오더를 부른 유석재가 문을 가리켰다.

“지훈아, 내일 수술 스케줄 확실하게 챙겨서 5시까지 제출해라. 빵꾸 나면 알지?”

깜빡 잊고 있었던 김지훈이 시계를 봤다.

‘헉! 4시네. 가만, 내일 스케줄이 5개잖아.’

잠시도 빈둥거릴 틈이 없었다. 대충 세수만 하고 급히 병동으로 올라가 수술 스케줄을 챙겨야 했다.

검사상의 문제가 있으면 해당 과를 찾아 문제가 없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마취과에서 마취를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날은 1년차에겐 지옥문이 열리는 날이었다.

아주 기본적이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모든 사항을 매번 유석재에게 노티 해야 했다. 간신히 시간에 맞춰 수술 스케줄을 제출했다.

스케줄을 받아 든 김진호가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거꾸로 하려니까 힘들지?”

“예, 선생님. 세컨은 정말 못 서겠네요.”

“그렇겠지. 퍼스트하고 세컨이 비교가 되나. 너도 참 1년차 희한하게 돈다. 그래도 열심히 해, 인마. 그래야 풀(full) 당직이 빨리 풀리지.”

고개를 끄덕이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당장 오프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식 트레이닝 방식에 빨리 적응해야 했다. 하지만 수술실에서의 문제는 정말 아쉬웠다.

잠시 숨을 고른 김지훈이 병동으로 올라갔다.

기다리고 있던 최철한이 전공의 회진을 돌기가 무섭게 박경일 과장이 올라왔다. 모든 회진이 끝난 후, 저녁을 먹고 최철한이 부르는 오더를 받아 적었다.

드레싱을 시작하며 시계를 보니 오후 8시 30분이었다.

한 시간 후에야 정식으로 차트에 오더를 내고 수술 기록지와 그날의 환자 기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음성보다 환자 수가 배로 많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 정갑수의 기록을 봤지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참고할 것조차 없어 욕만 나왔다.

‘일을 어떻게 이따위로 하냐.’

밤 12시가 넘어서 기록할 사항들을 모두 끝냈다. 하지만 아직 일과가 끝나지 않았다. 김지훈이 볼펜을 놓으며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보다 한숨을 쉬었다.

‘어후!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12시가 넘었네. 리포트는 언제 작성하지?’

오늘 수술한 케이스 중 하나인 담석증이 원인인 담낭염에 대한 리포트를 받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크게 하품한 김지훈이 병동에 딸린 의국에 들어가 책을 펼쳤다.

담낭염에 대해 정리하던 김지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한글이 아닌 영어로 리포트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큰일 났네. 이거 언제 다 치냐.’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를 쳐 가던 김지훈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인턴이었다. 눈이 벌건 게 피로가 잔뜩 쌓인 모습이었다.

“인턴 선생, 왜? 뭐 할 말 있어?”

“환자 리스트 작성 표가 컴퓨터에 있어서요.”

시계를 보니 1시가 훌쩍 넘었다. 리포트를 끝내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인턴도 자야 할 것이다. 겸사겸사 잠시 쉴 요량으로 말없이 비켜섰다.

빠른 속도로 타자를 쳐 10분 만에 환자 리스트를 뽑아 든 인턴을 보며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되게 빠르네. 부럽다.’

인턴의 속도라면 리포트도 30분 내에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타자를 부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일주일에 3개를 작성해야 했다. 독수리든, 양손 타법이든 결국 자신의 손이 빨라져야 앞으로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고개를 흔든 김지훈이 최선을 다해 자판을 눌렀다.

그런데 인턴이 뒤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왜 안 가고 여기 있어?”

“리포트 복사해야죠.”

앗? 그 생각을 못했다.

리포트를 작성하고 나면 아침 전까지 인원수에 맞춰 뽑아야 한다. 결국 인턴도 꼼짝없이 잠을 못 자는 것이다.

마음이 급해진 김지훈이 급하게 타자를 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복사라니, 컴퓨터는 장식인가?

“인턴 선생, 네 부만 뽑으면 되는데 이걸 왜 복사해?”

“전 잘 모르겠습니다. 전에 정갑수 선생님은 그냥 복사하라고 하셨는데요.”

혹시 분량이 많다면 복사가 빠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갑수가 리포트를 그 정도로 성실하게 작성했을까?

“꽤 양이 많았나 봐.”

“아닙니다. 대개 한 장 정도만 작성하셨어요.”

역시 정갑수였다. 아뻬라고 해도 한 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애꿎은 인턴을 잡아 놓고 주접을 떨었을 것이다. 안 봐도 훤했다.

김지훈은 입맛만 다셨다. 말을 해 봐야 입만 아플 뿐이었고, 인턴 앞에서 할 얘기도 아니었다.

“가서 자라. 복사가 필요하면 연락할게.”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인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김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타자에 몰두했다.

다 마치고 나니 2시 반이었다. 타자가 빨랐다고 해도 2시 안에는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후우! 첫날부터 꽤 힘드네.”

새벽 5시 반부터 다음 날 2시 반까지 무려 21시간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 특별히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트레이닝이 불가능하다던 음성이 훨씬 더 알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반면 몸은 훨씬 더 힘들었다.

응급실에서 콜이 오는 순간, 적어도 한 시간은 잡아먹었다.

결국 첫날부터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회진을 모두 끝내고 수술이 시작되기 전 리포트 발표가 있었다. 김지훈 딴에는 열심히 작성했지만 박경일 과장은 책에도 없는 내용을 물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따로 없었다.

1년차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신나게 깨졌다.

“김지훈, 처음부터 이게 뭐야? 리포트 이 따위로 작성할래? 아니면 대답이나 잘하든지. 앞으로 담낭염 수술은 숱하게 볼 텐데 어떻게 하려고 그래?”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리포트 발표 시간은 불과 15분 남짓이었지만 등짝이 후줄근해질 정도였다. 수술은 아예 고문이었다. 음성이 벌써 그리워졌다. 새카맣게 타도 그때가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수술 중 세컨드가 하는 일이라고는 기구를 끄는 것밖에 없었다. 일반 외과 전공의라고 해도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불과 하루 만에 김지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병동도 아닌 수술실에서 그것도 수술 중에 졸음이 몰려온 것이다.

화들짝 놀란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자 애를 썼다. 박경일 과장이 이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귀신처럼 알아채고는 살벌하게 태웠다.

“어쭈! 이제 하루 지났는데 졸아? 너 수술 안 볼 거야? 자식이, 어떻게 인턴 때보다 더 못해.”

잠이 확 달아난 김지훈이 눈을 부릅떴다.

‘집중하자, 집중.’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지만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아 집중도가 떨어졌다. 마치 나사가 몇 개는 풀린 사람 같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도 넘치던 의욕과 열정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체력 때문일까, 아니면 극과 극을 달린 업무의 변화 때문일까?

음성과 구미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전에 없이 정신적인 피로가 심각할 정도로 몰려왔다.

별의별 일로 다 깨졌지만, 분명 그 탓만은 아니었다.

엄한 일로 트집을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뭔가 목표를 잃은 사람처럼 집중이 되질 않았다.

김지훈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다들 변함없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원인은 밖이 아니라 김지훈의 마음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토요일이 새벽 세 번째 리포트를 작성하던 김지훈이 콜을 받고 응급실로 향했다. 졸음이 몰려와 머리가 멍했다. 비몽사몽간에 받았는지 노티 내용조차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은연중 별 환자가 아니어도 유석재에게 노티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얼굴부터 찌푸리고 있었다.

‘작년에는 아뻬도 수시로 왔던 것 같은데 이번 주는 어떻게 아뻬 하나 없어. 맨날 세컨이나 서고 정말 재미없네.’

응급실에 도착해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간만에 치질 환자가 왔다.

환자가 김지훈이 다가오자마자 증상을 호소했다.

“변을 볼 때 항문에서 피가 나와서 왔습니다.”

“언제부터 나오셨죠?”

“벌써 여러 달 됐습니다. 얼마나 피를 쏟았는지 이젠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색깔은 어땠습니까? 까맸어요, 아니면 선홍색으로 밝았나요? 변기에 뿌린 것처럼 점점이 피가 묻지 않았나요?”

환자가 선홍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홍색 피를 출혈했다면 항문에서 바로 나왔다는 말이었다.

치질은 혈관이 확장돼 덩어리처럼 변하는 질환이었다.

외치핵(치질)은 주로 항문 밖으로 뛰쳐나온 덩어리와 통증을 호소하고, 내치핵은 통증이 없는 덩어리와 출혈을 호소한다. 혈색이 허연 것을 보니 빈혈까지 동반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수술을 요할 정도로 진행됐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한참 설명을 하고는 검사를 냈다.

결과를 보니 남자인데도 빈혈이 꽤 심했다.

예상한 결과가 나오자 어깨를 으쓱거린 김지훈이 유석재에게 노티를 했다. 잠시 후 내려온 유석재가 환자를 보고는 김지훈에게 물었다.

“직장 검사는 했어?”

“직장 검사요?”

유석재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안 했어? 뭐야, 항문에서 출혈을 했는데 직장 검사도 안 해 보고 내치핵이라고 노티를 한 거야?”

“그게 증상이 딱 일치해서…….”

“김지훈, 너 의사 맞아? 네 눈에는 환자 속이 그냥 보여? 선홍색 피를 뿌리면 다 치질이야? 항문 주위에서 생긴 직장암에서 출혈을 하면 그땐 무슨 색깔인데?”

김지훈이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유석재가 직접 항문 검사를 하고는 김지훈을 힐끗 째려보며 환자에게 상태를 설명했다. 내치핵이 의심되지만 다른 질환을 감별하기 위해 직장경으로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응급은 아니지만, 수술을 요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당장은 해 드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출혈이 너무 심한 경우 다른 조치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그땐 빨리 오셔야 합니다. 내일 아침에 금식하시고 외래로 오시면 바로 검사가 가능합니다.”

충분히 설명을 들은 환자가 아침에 외래로 오겠다면 퇴원을 했다. 유석재가 한숨을 쉬며 김지훈을 보다 한 소리를 하고는 숙소로 올라갔다.

“건방 떨지 말고 똑바로 해. 넌 기본을 익혀야 할 1년차야. 내가 알고 있는 김지훈은 어디 갔어?”

유석재가 알고 있는 김지훈?

그 순간 날카로운 비수가 가슴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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