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과장님! 살려 주세요! (2)
“선생님, 100일 당직이 끝나는 날입니다. 고작 몇 시간 일찍 보내 달라는데 그것도 못 해 줘요? 김지훈, 저 자식은 지금 퍼 자고 있습니다.”
“넌 1년차야. 그리고 100일 당직이나 똑바로 돌고 그런 말을 해, 인마. 전 텀이 개판이란 개판은 다 쳐 놨다고 성질만 내고 갔어. 솔직히 내가 일주일 봤다만, 네가 2년차야, 3년차야? 잘 거 다 자고, 일은 나 몰라라 하고. 어휴! 정말.”
“개판?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 소릴 합니까?”
정갑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유석재가 최철한을 말렸다. 유석재도 꽤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선생님, 참으시죠. 정갑수 선생님, 그만해요. 우리가 지금 학생입니까? 전공의라는 거 잊지 말아요.”
정갑수가 문을 박차고 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요, 알았어. 점심때 출발할 테니까 그만합시다.”
같은 학번인 최철한은 물론 유석재도 엄연히 위 연차였다. 또한 근무 교대 시 시간 준수는 당연하게 지켜야 할 원칙이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정갑수가 도리어 성질을 내고 있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주먹을 날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정갑수, 왜 저래? 미쳤어?’
김지훈이 막 뛰쳐나오는 정갑수와 마주쳤다. 힐끗 김지훈을 째려본 정갑수가 인상을 쓰며 숙소 밖으로 나갔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최철한이 씩씩거리며 달려 나오다 멈칫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어? 너, 언제 왔어?”
최철한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화를 꾹꾹 눌렀다.
1년차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뒤따라 나온 유석재가 최철한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며 김지훈에게 손짓을 했다.
‘지금 분위기 안 좋으니까, 이따 와.’
구미에서의 첫날을 시작하기도 전에 조짐이 이상했다.
재빨리 씻고 나온 김지훈이 짐부터 옮겼다.
‘어째 시작부터 분위기가 안 좋네. 정갑수,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였다. 자칫 불똥이 튀길 수도 있었다. 더구나 원활한 환자의 치료를 위해 이삼 년차는 1년차보다 일주일 먼저 다음 근무지로 출발했다. 당연히 유석재는 물론 최철한까지 구미의 환자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을 때였다.
구내식당에서 든든히 배를 채운 김지훈이 병동으로 올라갔다. 1년 만에 왔지만, 간호사들이 단박에 김지훈을 알아보았다. 입이 쫙 찢어질 정도로 이상스럽게 반가워했다.
“김지훈 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얼굴이 홀쭉해지셨네.”
“그래요? 몸무게는 비슷한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구미에서의 첫 일과를 시작했다.
날벼락이었다. 정갑수가 환자 인계는커녕 차트 정리마저 엉망으로 해 놓은 채 다음 근무지인 서울로 올라갔다.
‘이게 뭐야? 차트만 보고는 하나도 알 수가 없네.’
끙끙대며 40명이 넘는 환자를 일일이 찾아다녀야 했다. 모두 일반 외과 환자라는 사실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내일 아침까지 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만 급해졌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됐다. 구내식당에서 최철한과 유석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주고받았다. 처음은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최철한이 큼직한 폭탄 하나를 던졌다.
“김지훈, 음성에서 어떻게 일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풀(full) 당직을 한 달 더 세우기로 결정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너무 놀라 말까지 헛나왔다.
“예? 저요?”
“그럼 여기 1년차가 너밖에 더 있어? 그리고 매주 화, 목, 토 3일은 리포트 발표가 있어. 적당한 케이스가 나오는 대로 말해 줄 테니까 확실하게 작성해.”
“예, 알겠습니다.”
리포트 작성이야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지만, 한 달간 오프도 없다니 할 말이 없었다. 누구도 음성 트레이닝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도 한 달 연장이라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김지훈이 소리 없는 절규를 터뜨렸다.
유석재가 김지훈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한 달 금방 간다. 열심히 해. 너만 고생하는 거 아냐. 최철한 선생님이나 나나 같이 고생하는 거야.”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 연차들이 무슨 고생을 한다는 건지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일석이한테 자세히 물어봐야겠네.’
식사 후, 함께 병동으로 올라갔다. 원래는 벌써 월요일 오더를 냈어야 했지만 정갑수와의 문제로 이제야 시간을 낸 것이다. 최철한이 이를 갈았다.
“갑수 이 새끼를 어떻게 하지. 에이! 김지훈, 오더 내자.”
유석재의 눈짓에 김지훈이 재빨리 차트를 모았다.
셋이 나란히 앉았다.
최철한이 하나하나 차트를 집으며 오더를 내기 시작했다.
“이 환자, 내일 죽 먹이고 항생제는 끊어.”
“이 환자는 오늘 엘 튜브 빼 주고 토하는지 잘 봐.”
아직 완전히 환자를 숙지하지 못한 김지훈이 환자 이름을 확인하기 급급했다. 옆에 있던 유석재가 조용히 환자 리스트에서 환자를 찾아 가리켰다.
그러건 말건 최철한은 잠시도 기다려 주질 않았다.
김지훈이 환자 리스트 용지 여백에 정신없이 오더를 받아 적었다. 급기야 질문까지 나왔다.
“참! 이 환자는 가스 아웃 됐나?”
무슨 환자? 수술을 한 환잔가?
이름만 봐서는 환자의 얼굴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유석재가 대신 대답을 했다.
“오늘 아침에 가스 아웃 됐습니다.”
“그럼 내일 물부터 시작해. 김지훈, 알아들었어?”
“예, 선생님.”
“오늘까지만이다. 밤을 새워서라도 환자 확실하게 파악해.”
인턴과 픽스턴을 돌 때 보았던 최철한이 아니었다.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없었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죽을 줄 알라는 표정이었다.
한 시간에 걸쳐 오더를 낸 최철한이 숙소로 돌아가고 유석재가 남아 이것저것 필요한 사항을 알려 주었다.
“최철한 선생님 회진은 아침 7시 30분이고, 과장님은 8시에 오신다. 내일 수술할 환자 4명이니까 아침에 잘 확인해. 그리고 응급실에 연락 온 환자는 어떤 환자든 간에 다 내게 노티 해.”
김지훈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과 문제가 없어도요?”
“네가 책임질 수 있어? 나도 잘 모르면 최철한 선생님에게 노티를 하고, 최철한 선생님은 과장님한테 해. 이제 3개월 지났고, 넌 음성 돌았잖아? 그런데 자신할 수 있어?”
유석재가 차갑게 내뱉으며 인상을 썼다.
인턴 때는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일반 외과 1년차이자 100일 당직 중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백번 지당한 말이었다. 음성에서는 운이 좋아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바로 오더 내고, 환자 있으면 방으로 연락해. 100일 당직이라고 쓸데없이 응급실에서 자지 말고 잠은 숙소에서 자.”
혼자 남은 김지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응급실 환자 때문에 같이 고생한다고 하셨구나. 그럼 일석이한테 전화할 필요도 없네. 그나저나 완전히 다시 시작이네. 생각보다 할 일이 훨씬 많을 것 같은데, 체력이 받쳐 주려나?’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 시간에 일이나 빨리 끝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환자 리스트에 받아 적은 오더를 다시 차트에 옮겨 적었다. 한 번에 해도 될 일을 꼭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오더를 적으며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병명조차 다시 확인해야 했던 환자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첫날이라고 응급실이 봐준 모양이었다.
새벽에야 첫 번째 콜이 왔다.
노티를 받고 내려온 김지훈을 본 간호사들이 난리가 났다.
“김지훈 샘, 이제 오시면 어떻게 해요?”
“반가워요. 그동안 잘 지냈죠? 근데 왜 이렇게 좋아해요?”
“말도 마세요. 샘이 오셨으니까 이젠 좀 돌아가겠네요. 정갑수 쌤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요. 제때 내려오는 적이 거의 없었던 데다 분위기까지 나빠서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정말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내가 그렇게 살이 많이 빠졌나?’
앞 텀이 정갑수인 덕에 더 환영을 받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찌 됐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공연히 우쭐해진 김지훈이 환자를 본 후 유석재에게 노티를 했다.
인턴은 아뻬가 의심된다고 했지만, 장염이 심한 환자들이었다. 그런데 졸린 눈을 비비며 내려온 유석재가 임프레션(가진단)을 묻고, 일반 외과 질환을 배제한 이유까지 물었다.
이 정도는 인턴들도 답할 수 있는 문제였다. 책임질 수 있냐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이런 방식이 정식 트레이닝인가?’
1년차라면 누구나 갖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새벽 5시 30분.
드디어 구미에서의 첫날 근무가 정식으로 시작됐다.
‘파이팅! 가자.’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진 김지훈이 드레싱 카를 끌고 나갔다. 근 한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김지훈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일반 외과 환자의 퍼레이드!
서울이나 천안에 비해서는 메이저 수술도 적었고, 다양성도 부족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느 정도 환자를 파악하고 나자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전공의 회진에 이어 박경일 과장의 회진을 돌았다.
박경일 과장이 환자에 대한 질문을 툭툭 던졌다.
심지를 통해 거즈에 묻은 삼출액의 색깔과 냄새부터 시작해 환자들이 호소하는 문제는 물론 식사 상황까지 물었다.
‘그동안 사소하게 생각하고 지나친 게 너무 많았네.’
얼핏 어떤 식사를 하는지는 별문제가 아닐 것 같지만, 일반 외과 환자에게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소화기를 수술한 경우 장 기능의 회복을 알려 주는 중요 지표였다.
음성에서도 막판에 와서는 이준영 과장이 똑같이 물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40명이 넘는 환자가 모조리 일반 외과 환자였다. 게다가 하루도 안 지났다.
당연히 버벅거렸고, 박경일 과장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첫날부터 이럴 거야?”
“죄송합니다, 과장님.”
최철한과 유석재까지 살벌한 눈초리를 보냈다.
회진이 끝나자마자 수술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인턴하고 1년차를 똑같이 대할 수는 없겠지만, 작년하고는 완전히 다르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수술실에 들어선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늘 예정된 정규 수술만 4개였다.
구미는 음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수술이 많은 병원이었다. 은근한 기대에 가슴이 떨렸다.
환자가 내려오기 전 수술실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김진호와 윤서연이었다.
‘앗! 서연이가 구미에?’
살짝 당황했던 김지훈이 밝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김진호 선생님, 구미에서도 뵙네요. 서연아, 오래간만이다. 잘 지냈지?”
“자식, 여전히 힘이 넘치는구나. 저런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올까. 부러워.”
그때 유석재와 함께 들어온 박경일 과장이 손을 흔들었다.
“여어! 김진호 선생님, 오래간만입니다.”
“박 과장님, 별일 없으셨죠?”
“그럼요. 그리고 네가 윤서연이지?”
“어머!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우리 병원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한 윤서연을 모르면 간첩이지.”
박경일 과장이 엄지까지 치켜들자 윤서연이 맑게 웃었다.
김진호도 고개를 끄덕이다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이제 오프도 받고 좋겠다.”
순간 썰렁한 기운이 흘렀다.
김진호가 의아한 눈으로 박경일 과장을 보았다.
“분위기가 왜 이래. 과장님, 내가 뭐 이상한 말을 했나요?”
“별건 아니고, 김지훈 100일 당직이 한 달 연장됐습니다.”
마취과인 김진호가 도리어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에? 정말입니까? 음성에서도 거의 잠을 못 잤는데, 지훈이를 아주 죽일 작정이시네요? 체력이 좋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얼마 못 버틸 텐데요.”
박경일 과장이 귀를 쫑긋거리며 물었다. 이혁민 교수에게 대충 듣기는 했지만, 안 그래도 음성에서의 생활이 어땠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김진호 선생님, 음성에 우리 과 환자가 그렇게 많아요?”
“구미나 다른 병원에 비하면 일반 외과 환자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적죠. 하지만 지훈이가 거의 모든 과를 커버했습니다. 옆에서 볼 때는 언제 자나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박경일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했다는 소리에 마음은 놓였다. 하지만 일반 외과 환자가 적었다니, 100일 당직을 연장하는 게 김지훈을 위해서도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곧 환자가 수술실에 도착했다.
뒤늦게 김지훈을 본 이용철 과장도 넉넉한 웃음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