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43화 (143/1,329)

제11화 과장님! 살려 주세요! (1)

은색 메스와 금빛 칼 대였다.

자신이 첫 수술에서 사용한 메스라고 생각했는데, 상당히 오래됐는지 색이 바랬다.

‘이게 뭐지?’

이리저리 케이스를 살피던 김지훈이 눈만 껌뻑거렸다.

케이스 옆에 이준영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준영 과장이 집도식 때 받은 메스가 분명했다.

첫 수술의 감동과 흥분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메스였다. 평생 동안 간직할 정도로 일반 외과 의사에겐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김지훈에게 준 것이다.

김지훈의 손이 떨렸다. 이준영 과장의 마음이 느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뜨거운 것이 눈가에 맺혀 서둘러 닦아야 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남은 포장을 뜯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메스와 금빛 칼 대.

첫 수술에서 사용한 메스였다.

‘선생님,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결국 김지훈의 볼을 따라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청주에서 돌아온 이준영 과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병원에 들어섰다. 마음이 심란해 집으로 가야 했지만 빠뜨리고 온 것이 있었다.

진료실로 향한 이준영 과장이 흠칫 놀랐다.

큼직한 선물 꾸러미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다 포장을 뜯은 이준영 과장이 피식 웃었다. 편지 한 통과 함께 와이셔츠 두 벌과 넥타이 2개가 들어 있었다.

“김지훈, 이 자식. 그냥 가지, 뭘 이런 걸 놓고 가. 편지는 또 뭐야?”

혼자 중얼거리며 편지를 읽던 이준영 과장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과장님,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항상 몸 건강하시고, 휴가 때 꼭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과장님이 아니라 스승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스승님.

스승이라니!

교수와 전공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 사이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누구도 스승님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이준영 과장 역시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이준영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웃었다.

‘스승? 아무나 스승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야, 인마.’

선물을 들고 나가는 이준영 과장이 자꾸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서는 그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구미로 가는 내내 내쳐 잤다.

무슨 꿈을 꾸긴 했는데 기억은 나지 않고,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마음만 심란했다. 어렴풋이 이준영 과장을 꿈속에서 본 것 같기는 했다.

‘무슨 꿈을 꾼 걸까? 에휴! 일단 구미에 충실하자.’

구미에 도착한 후, 잠깐 시간을 내 고경아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 내내 목소리가 안 좋은 탓인지 한걱정을 했다.

별일 아니라며 애써 웃었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근무 교대를 해야 하는 데다 피곤까지 겹쳐 전화기를 오래 잡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아쉬운 마음이 찾아왔다.

구미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부터 찾았다.

어느 병원이나 인턴 때와는 처우가 달랐다.

3년차는 혼자 방을 쓰고, 1년차는 2년차와 함께 한방을 썼다. 숙소에 들어가 짐을 내려놓은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빈 침대가 없었다.

‘이상하다. 정갑수가 왜 아직도 안 올라갔지? 내가 잘못 온 거야, 아니면 뭔 일이라도 있는 거야?’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정갑수가 인상을 잔뜩 꾸기며 들어섰다.

“씨펄! 100일 당직 마지막 날인데 일찍 보내 주면 어디가 덧나나? 내일은 일요일이라 별일도 없는데 아침까지 근무를 다 서라는 건 무슨 심보야?”

중얼중얼 불평을 터뜨리던 정갑수가 김지훈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유석재인 줄 알았네. 김지훈, 너 언제 왔어?”

‘유석재? 아직도 학교 다니는 줄 아나. 100일 당직을 섰는데도 어떻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냐.’

김지훈이나 정갑수나 서로를 보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

“지금 막 왔는데요.”

“교대가 내일 오훈데, 음성이 좋긴 좋았던 모양이다. 누구는 끝까지…….”

정갑수가 김지훈을 힐끗 째려보다 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준영 과장님이 교대 날짜를 잘못 아셨나? 아니지. 정식으로 통보를 받으셨을 텐데, 그럴 수가 없잖아.’

문득 청주 터미널에서 들은 이준영 과장의 말이 생각났다.

‘구미 가서 푹 쉬고, 일 열심히 해.’

그땐 무심코 지나쳤지만 이준영 과장의 마지막 배려였다. 단 몇 시간이라도 푹 자 음성에서 쌓인 피로를 조금이라도 풀라는 마음이었다.

은근히 가슴이 먹먹해진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입국식 때 정갑수가 얼마나 일을 안 하는지 들었다. 지금도 일찍 보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빨리 뜨자. 여기 있을 때가 아니다. 스승님이 주신 시간을 정갑수에게 뺏길 수는 없지.’

“내일 봐요.”

김지훈이 가방을 들고는 부리나케 숙소에서 나왔다.

“야, 인마, 어디 가?”

정갑수가 뭐라고 하든 말든 대꾸할 이유가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턴 숙소로 가 임시로 짐을 풀었다.

오후 7시가 조금 넘었다. 밥보다는 잠이 급했다. 김지훈이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아무도 잔 흔적이 없는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잠시 뒤척이던 김지훈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흐릿하게 정갑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지훈이 본능적으로 담요 속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그 시간, 박경일 과장은 간만에 장성기 과장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변상훈 과장과 최철한, 그리고 유석재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커피를 마시던 박경일 과장이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박 과장, 무슨 일 있어?”

장성기 과장의 물음에 한숨이 더 깊어졌다.

“1년차들 때문에.”

“맨날 끌탕을 하던 정갑수도 가고 김지훈이 오는데 신경 쓸 일 없잖아. 지가 알아서 딱딱 할 텐데, 뭐. 그리고 철한이하고 석재까지 있는데 뭔 한숨이야?”

“나도 편하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어제 이혁민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네. 이 동네에 살이 꼈나? 작년에는 현수 때문에 과장님이 말도 안 되는 전화를 하시더니, 올해는 정갑수가 가니까 김지훈이 또 문제네.”

변상훈 과장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지훈이가 왜? 그만한 놈이 어디 있다고 이혁민 선생님이 전화까지 하셔. 음성에서 무슨 사고라도 쳤대?”

“그놈이 그럴 놈이야? 말씀을 들으니까, 음성에서 수술은 몇 개 없어도 퍼스트를 선 덕에 수술 트레이닝은 조금 된 것 같아. 그런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여건이 아니잖아. 기본부터 다시 가르치란 거지, 뭐.”

“맞는 말씀이긴 하네. 음성 병원은 일반 개인 병원하고 똑같으니 이론 교육을 시킬 수가 없겠지. 솔직히 수술 트레이닝도 제대로 됐겠어?”

장성기 과장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지. 우리 수련받을 때 잠깐 이준영 선생님을 봤으니까 10년 넘게 음성에 계신 거잖아? 그 세월이 얼만데, 제대로 될 리가 없지. 거기다 사고가 나서 간 거 아냐?”

박경일 과장이 혀를 찼다.

“나도 그때 서울에서 근무하질 않아서 자세히는 몰라. 솔직히 이준영 선생님이 서울에서 근무하셨다는 것만 알지, 개인적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부족할 수밖에 없는 건 인정하는데, 100일 당직을 연장하라신다.”

그 소리에 최철한과 유석재가 깜짝 놀랐다.

“과장님, 100일 당직을 또 세운다고요?”

“그래. 니들이 좀 고생해야겠다. 이혁민 선생님이 단단히 부탁하시더라. 사실 김지훈을 생각하면 틀린 말씀도 아니잖아.”

최철한과 유석재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100일 당직 기간 중 1년차들은 모든 일을 2년차나 3년차에게 노티 해야 한다. 정규 일과 중에는 어차피 일을 하는 시간이니까 상관없었지만 응급실은 사정이 달랐다.

1년차가 노티를 하면 어떤 환자건 간에 직접 내려가 확인을 해야 한다. 2년차가 오프라면 3년차가 내려가야 한다. 결국 당직 날에는 수술을 해야 할 환자가 없더라도 경우에 따라서 밤새 응급실로 불려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1년차 100일 당직 기간 중에는 모든 연차가 고생을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게다가 유석재는 2년차가 된 지 이제 3개월밖에 안 됐기에 입장이 좀 달랐다.

100일 당직이 얼마나 힘든데, 연장을 한단 말인가?

“과장님, 설마 세 달을 다 세운다는 말씀은 아니시죠? 그러다 지훈이 정말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그게 걱정이야. 그런데 다른 선생님도 아니고, 이혁민 선생님 말씀인 데다 얼마나 부탁을 하시던지. 차라리 금 과장님처럼 밀어붙였으면 도리어 편하겠다. 니들도 신경질 난다고 쓸데없는 일로 지훈이 태우지 마라. 그렇다고 대충 봐주지도 말고. 어쨌든 그 자식이 제일 문제잖아.”

최철한이 뭔가 할 얘기가 더 있는지 몸까지 내미는 유석재를 막으며 물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그럼 응급실은 100일 당직 때하고 똑같이 돌리고 리포트는 일주일에 세 번 쓰게 할까요?”

“이혁민 선생님이 걱정하시는 게 이론이니까 그래야지. 발표는 화, 목, 토로 하자. 그리고 김지훈한테는 이혁민 선생님이 전화했단 말 하지 마.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어.”

“예. 그러면 수술 트레이닝은 언제부터 시작하나요?”

1년차 트레이닝 여부에 따라 이삼 년차도 수술을 들어가는 방식이 조금은 달라졌다. 1년차가 퍼스트를 서면 3년차는 수술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세컨드 어시스트를 서야 하는 짬밥은 아닌 것이다.

“그것도 문제야. 이혁민 선생님 말씀으로는 음성에서 퍼스트를 여러 번 섰다는데, 제대로 트레이닝이 됐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마 인턴이나 화이트 가운이 같이 들어갔을 텐데, 얼마나 배웠는지는 테스트해 보고 결정하자.”

당장은 퍼스트를 안 세운다는 말이었다.

분위기가 점점 100일 당직을 처음부터 다시 세울 것처럼 흘렀다. 유석재가 불가능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과장님, 100일 연장은 누구도 못 버팁니다. 그리고 다른 과 환자를 주로 봐서 그렇지, 듣기로는 음성에서 꽤 고생을 한 것 같습니다. 김지훈 입장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박경일 과장이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한 달 정도 기한을 정해서 잘하면 줄이고, 못하면 늘리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래야 지훈이도 목표를 갖고 일을 하죠. 저 같으면 포기합니다.”

한참 고민하던 박경일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변상훈 과장이 피식 웃었다.

“1년차들 중 제일 뛰어난 놈이 최소한 130일 당직을 서네. 정갑수를 그렇게 세워야 되는 거 아냐?”

“그 자식은 스스로 정신 차리기 전까지는 1년 내내 세워도 안 돼.”

박경일 과장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100일 당직 때 트레이닝이 다소 미비하다고 해도 별 탈은 없었다. 남은 9개월 동안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되는 것이다. 능력이 너무 모자라거나, 아니면 정갑수처럼 일을 하지 않는다면 계속 강하게 트레이닝을 시킬 필요는 있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김지훈에 대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다. 게으르고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반대라는 사실에 도리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들 즐거워야 할 식사 자리를 조금은 찝찝한 기분으로 일어나야 했다. 유석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숨만 쉬었다.

김지훈은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못했다.

아침 10시가 넘어서야 침대에서 내려왔다. 배만 안 고팠다면 12시까지 내쳐 잤을 것이다. 너무 오래 잤는지 도리어 정신이 멍하고 몸은 나른했다. 그간 쌓인 피로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자도 자도 피곤하네. 등짝이 배겨서 더는 못 자겠다. 배도 심하게 고픈데, 슬슬 움직여 볼까?’

2시간의 여유 덕에 얻은 모처럼의 한가함이었다. 고픈 배를 잡으며 느릿느릿 세면실로 가던 김지훈이 귀를 쫑긋거렸다. 최철한의 방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야! 정갑수. 어제 분명히 안 된다고 했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김지훈이 일찍 왔다고 너도 일찍 간다는 게 말이 돼? 인계할 거 제대로 정리해 놓고 12시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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