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스승과 제자란 무엇일까? (1)
잠시 스테이션에 앉아 있던 김지훈이 급히 옷을 갈아입고는 응급실로 내려갔다.
“호석아, 나 잠깐만 나갔다 올 테니까, 만일 급한 환자 있으면 내과 과장님한테라도 먼저 콜을 해. 알았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응급실에서 나간 김지훈이 마침 병원 앞에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잡아탔다.
“시내로 가 주세요.”
“예, 손님.”
시동을 켜고 출발하던 기사가 백미러를 만졌다.
“저, 혹시 3개월 전에 새로 오셨다는 일반 외과 선생님 아니십니까?”
“예, 맞습니다.”
“어이쿠! 제가 귀한 손님을 태웠네요. 선생님 오신 이후로 음성 병원이 정말 좋아졌다고 떠들썩합니다. 선생님의 칭찬도 자자하구요.”
읍내로 나가는 동안 택시 기사가 쉬지 않고 말을 했다.
거의 대부분 김지훈에 대한 칭찬을 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릴 말이었지만 김지훈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고맙다는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환자로 와 치료를 받았던 사람도 아니었다.
시골 사람들의 순박한 심성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왠지 따스한 정이 느껴졌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분인데, 내가 열심히 일을 하긴 한 모양이네.’
문득 수많은 얼굴이 스쳤다.
각 과의 과장님들과 후배 인턴들.
항상 웃으며 자신을 맞아 주는 응급실과 병동의 간호사들.
총무과 최 과장과 수술실의 미스터 최.
정이 깊은 아주머니와 사랑원 원장.
그리고 그동안 보았던 수많은 환자들.
누구 할 것 없이 고마웠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가 함께 일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했기에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 환자들 역시 자신을 믿고 몸을 맡겨 주었기에 일반 외과 의사로서 한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고맙지 않은 사람들이 없네.’
기쁘고 행복한 일도 많았지만 안타까운 일도 적지 않았다. 천안으로 보낸 박경미 환자를 비롯해, 음성에서는 치료할 수 없었던 환자들이 떠올랐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겠지?’
창밖의 어둠 사이로 불빛들이 보였다.
어느새 음성 읍내에 도착했다.
김지훈이 주위를 둘러보며 옷 가게를 찾았다.
신사복을 파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막상 가게 앞에 서자 망설여졌다. 한 번도 근무지를 떠나며 선물을 사 본 적이 없었고, 그런 경우를 본 적도 없었다.
이준영 과장이 좋아할지 확신도 서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 많이 배웠고, 언제 찾아뵐지 모르는데 조그만 선물이라도 하는 게 도리겠지? 옷 말고 더 좋은 건 없을까?’
김지훈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서성였다.
가게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머! 김지훈 선생님, 이 시간에 여기는 웬일이세요?”
“어? 영훈이 어머니? 옷 가게 하세요?”
“네, 우리 가게예요.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들어오셔서 커피라도 한잔하시고 가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나오셨어요?”
정 많고, 오지랖 넓은 영훈 엄마를 도대체 몇 번이나 만나는지 몰랐다. 음성 바닥이 아무리 좁다지만, 인연이라는 것이 참 우스웠다.
‘어떻게 이 아주머니가 하시는 가게냐. 과장님의 선물로 옷을 사라는 말이구나.’
김지훈이 웃으며 가게로 들어가다 말고 멈칫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준영 과장의 옷 사이즈도 몰랐다.
혹시 영훈 엄마는 눈대중으로 알 수 있을까?
“영훈 어머니, 과장님 기억하시죠?”
“그럼요. 알고 보니까 참 멋있는 분이시더라구요. 선생님도 아실지 모르겠네. 저번에 말이에요. 그러니까…….”
말이 길어질 조짐이 보이자 김지훈이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선물을 사는 일도 중요했지만, 병원을 오래 비울 수는 없었다.
“혹시 과장님의 옷 사이즈를 대충이라도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이 장사 몇 년인데 모르겠어요. 딱 보면…….”
“그럼 과장님에게 어울릴 것 같은 와이셔츠 두 벌과 넥타이 2개 좀 골라 주시겠어요? 그리고 포장에 신경 좀 많이 써 주세요.”
“선물하시게요?”
영훈 엄마가 곰곰이 생각하며 옷과 넥타이를 골랐다. 옷을 보는 안목이 빵점인 김지훈으로서는 그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가만, 이 아줌마 말이 좀 많은 데다 병원에도 자주 오잖아. 그러다 과장님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서로 쑥스럽겠지?’
“지금 당장 드릴 게 아니니까, 혹시 다른 사람에게는 입 꾹 다물어 주세요.”
영훈 엄마가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유! 그런 걱정 마세요. 내가 보기보다 입이 좀 무거워요. 할 말이 아니면 절대 안 하는 사람이라니까. 그런데 왜 비밀로 하세요?”
“그럴 사정이 있습니다. 절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아무래도 미덥지 못했다. 악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입은 걱정이 됐다. 포장을 하는 동안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다.
옷을 다 포장한 영훈 엄마가 자기가 주는 선물이라며 와이셔츠 하나를 내밀었다. 김지훈이 손사래를 치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선생님, 이거 가져가세요. 내 마음이라니까.”
부리나케 달려 택시를 잡아탔다. 영훈 엄마가 치맛바람으로 달려오다 숨을 헐떡거리며 손만 흔들고 있었다.
‘정말 정이 많은 분이네. 가게를 하면서도 자원봉사까지 하시고. 영훈 어머니, 마음만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물 꾸러미를 들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동안 자꾸 한숨이 나왔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떠난다는 게 정말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주일이 정말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금요일이었다.
김진호과 김대성도 내일이면 떠나야 했다.
회진을 끝낸 김대성이 이준영 과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과장님, 김진호 선생님하고 제가 내일로 음성 근무 마지막입니다. 그동안 폐만 끼쳐서 저녁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함께 드시죠.”
이준영 과장이 흔쾌히 답을 했다.
“폐는 무슨. 나도 아쉬워. 저녁은 내가 살게.”
“아닙니다, 과장님. 그리고 지훈이도 같이 자리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괜찮을까요? 응급실은 인턴 선생들이 있으니까 잠시 맡기면 될 것 같은데요.”
이준영 과장이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바라던 일이었다.
밥 한 끼 못하고 떠나긴 정말 싫었다.
김지훈이 바로 입을 열었다.
“과장님, 저도 꼭 가고 싶습니다.”
이준영 과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하루 종일 저녁에 대한 기대로 들떠 피곤한 줄도 몰랐다.
드디어 저녁 회진을 끝내고 식사 자리를 함께했다.
이준영 과장은 변함이 없었다. 김진호와 술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별말이 없었다. 간혹 아무 말 없이 김지훈을 쳐다보곤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큰 곳으로 가 많이 배워야 할 놈인데, 붙잡고만 싶네. 술이 더 들어가면 추태를 부리겠어.’
맥주 몇 잔을 마신 이준영 과장이 살짝 웃음을 머금으며 일어났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서운함이 가득했다.
“내일 근무도 있으니까 이만 일어나지. 김진호 선생, 김대성 선생, 수고했어. 서울 가서도 건강해.”
“감사합니다, 과장님.”
다들 조금 더 있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이준영 과장의 쓸쓸한 뒷모습에 입을 열지 못했다. 김진호와 김대성은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런데, 보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은 오죽할까!
즐거워야 할 자리가 서운함만을 남긴 채 끝났다.
‘과장님도 마음이 정말 안 좋으신 것 같네. 후우! 혼자 근무하시려면 힘드실 텐데.’
김지훈의 얼굴도 어둡기만 했다.
그날 밤, 이준영 과장이 이혁민 교수에게 연락을 했다.
목소리가 자연스러웠다.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김지훈 문제 때문에라도 통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안부를 물은 후, 바로 김지훈을 거론했다.
“이 교수, 부탁 하나만 하자.”
(뭡니까, 선생님?)
“김지훈 일인데, 다음 텀이 구미 맞지?”
(예, 구미로 갑니다.)
이준영 교수가 입술을 모으며 콧등을 찡그렸다.
“요새는 이론 교육을 제대로 시킬 여건이 되나?”
이혁민 교수가 단박에 이준영 과장의 의도를 알아챘다.
음성 병원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데다, 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박경일 과장이라고 있는데, 상당히 유능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아주 괜찮은 이삼 년차들이 가니까 김지훈에게 부족했던 면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습니다.)
“다행이네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그래서 말이야. 100일 당직을 연장했으면 해.”
(구미에서 또 100일 당직을 서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안 그래도 그런 생각을 저도 했습니다만, 체력이 받쳐 줄지 모르겠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피식 웃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내가 본 놈 중에서 체력 하나는 가장 강한 놈이야.”
잠시 고민하던 이혁민 교수가 동의를 했다.
(알겠습니다. 박경일 과장과 상의해서 기간을 좀 더 연장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도 수술을 주셨습니까?)
“왜, 너무 많이 주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1년차 초반인데 혹시 자만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네요.)
“그럴 놈이었으면 애초에 주지도 않았어. 손재주가 상당히 좋아서 수술도 꽤 깔끔하게 해. 그런데 아직도 아뻬 하라고 하면 어려워하는 놈이야. 환자도 어려워할 줄 알고 말이야.”
이혁민 교수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하! 정말 다행입니다. 선생님, 저도 사람 보는 눈이 제법 있지 않습니까?)
“김지훈은 제대로 본 것 같더군. 금 과장도 그렇게 봐야 해. 함부로 나서지는 말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혁민 교수가 장례식장 문제를 꺼내려다 말았다.
아직은 이준영 과장에게 더 많은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김지훈과 금경태 과장의 문제로 귀중한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혹시 서울로 올라오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원하신다면 신상민 과장님과 함께 자리를 알아보겠습니다. 같은 개인 종합 병원이라도 음성과는 많이 다르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이 교수, 김지훈을 보면서 어디에 있든 내가 일반 외과 의사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어.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것 같네.’
한숨 소리가 길게 울렸다.
“난 여기 남아야지. 김지훈 그놈이 내게 맡긴 환자가 너무 많아. 다 보고 나면 은퇴할 나이가 되겠지.”
이준영 과장의 말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곡한 거절이었다. 그만큼 마음이 편해졌다는 말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서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은퇴하시기 전에 서울로 올라오실 거란 기대는 버리지 않고 있겠습니다.)
“알았어. 그럼 다음에 또 전화하지.”
전화를 끊은 이준영 과장이 탁자 위에 있던 맥주 한 캔을 벌컥벌컥 마셨다. 은근히 오르는 술기운에 아쉬움만 더 커졌다.
***
우르르 밀려들었던 환자들이 썰물처럼 사라지며 응급실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평온이었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3개의 시계 침이 모두 12라는 숫자를 가리켰다.
마지막 날이 시작됐다.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음성을 떠나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답답함이 누적된 피로를 더욱 가중시켰다. 숙소로 올라갈 힘도 없어 당직실에서 눈을 붙였다.
간간이 당직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렸다.
마지막 날의 배려일까?
음성에 와 처음으로 새벽 5시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잤다. 이제는 그만 자라는 것처럼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지만 꼼짝도 하기 싫었다.
얼마 후, 노티를 하는 안호석의 목소리가 흐릿했던 정신을 깨웠다. 복부 통증을 호소하는 교통사고 환자였다.
“빤뻬리(panperitonitis:복막염)가 의심된다고?”
“예, 선생님. 기본 검사는 내보냈습니다. CT 찍을까요?”
이제는 인턴들도 꽤 능숙해졌다. 오더를 내는 일이나 기본 처치는 김지훈를 통하지 않고도 충분히 해냈다.
크게 기지개를 펴며 침대에서 일어난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급실로 나갔다.
“일단 환자부터 보자.”
젊은 남자 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