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39화 (139/1,329)

제9화 긴장과 흥분 (2)

누구나 잘못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라고 해도 말로 잘 타이르면 잘못을 깨닫는다. 그런데 후배이자 인턴이었고, 동료이기도 한 서도훈을 어린아이보다도 못하게 대한 것이다.

의사가 의사를 아끼지 않으면 누가 아껴 줄까?

통제하지 못했던 분노가 사라지고 후회만이 밀려왔다.

‘도훈이 정도면 말을 안 해도 스스로 미안해할 놈인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누구보다도 인턴들을 더 이해하고 아껴 줘야 하는 게 나 아니었나?’

인턴을 하는 동안 분명히 잘못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악어를 제외한 누구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미안했다. 더 잘해 주지는 못할망정 선배들에게 받은 것조차 잊은 것이다. 마땅히 사과를 해야 했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다가 사과하자니 너무 창피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앙금이 남을지도 몰랐다.

“미안하다.”

“예?”

서도훈이 놀라 흠칫거렸다.

“화내서 미안하다고, 인마. 내가 너무 과민해진 것 같다. 너도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해. 도진아, 호석아, 니들한테도 미안하다. 나가 봐.”

가슴이 정말 답답했다.

눈이 빠질 것처럼 피곤했지만 침대에 누울 수도 없었다.

‘후우! 미치겠네, 진짜.’

한숨만 푹푹 쉬고 있을 때, 당직실 문이 살짝 열렸다.

서도훈이 슬며시 다가와 옆에 앉아 죄송하다며 뭔가를 내밀었다. 피로 회복제 한 병이었다.

“뭐야?”

“오다가 미안해서 몇 박스 사 왔어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물끄러미 피로 회복제를 보던 김지훈이 피식 웃으며 서도훈의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흔들었다.

“아아아! 선생님, 아파요.”

“넌 아파도 싸, 인마. 미안하다, 도훈아.”

어느 틈엔가 서도진과 안호석이 옆에서 웃고 있었다.

간신히 머리를 빼낸 서도훈이 머리를 긁적이다 말고 헤 웃었다. 쑥스러움도, 창피함도, 미안함도 모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래서 선배이자 후배인 모양이었다.

분위기가 급격히 화기애애해졌다.

한참 신이 나 시시덕거리던 서도진이 벌떡 일어났다.

“형! 아니, 선생님, 아뻬 의심되는 환자가 한 명 있습니다.”

“뭐? 그걸 이제 얘기해?”

“죄송합니다.”

김지훈이 눈을 부라리며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

간호사들이 얌전하게 앉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나 하나 때문에 분위기가 엉망이네. 다신 이러지 말자.’

김지훈이 환자를 보는 사이, 서도훈이 나와 뭔가를 얘기하고 나서야 간호사들이 한숨을 쉬며 웃었다.

신중하게 환자를 진찰한 김지훈이 보호자에게 설명을 했다.

“지금으로 봐서는 맹장염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금식이 안 되셔서 수술이 곤란합니다.”

“예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번, 세 번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수월찮이 있었다. 그런데 단박에 수긍을 하다니, 이제는 환자들에게 상당한 신뢰를 얻은 것 같았다.

“일단 항생제를 써서 최대한 진행을 막겠습니다. 그리고 맹장염은 당장 해야 할 정도로 급한 수술도 아닙니다. 24시간 정도 여유가 있는 질환이니까, 내일 아침 과장님께서 한 번 더 보시고 결정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 입원을 해야 하나요?”

아뻬가 거의 확실했지만 틀리는 경우가 가장 많은 질환이기도 했다. 게다가 일단 입원하면 돈이 꽤 들기 때문에 환자들의 경제적인 부담도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경험이 쌓이면서 의료 외적인 부분도 조금은 보였다.

“불편하시겠지만, 아닐 경우를 대비해서 응급실에서 대기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보호자들이 동의를 했다.

오더를 내리고 잠시 눈을 붙였다.

내일 아침부터 수술 들어갈 생각을 하니 은근히 가슴이 떨렸다. 수술은 언제나 김지훈을 설레게 했다.

설레는 마음과는 달리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새벽까지 응급실을 벗어나지 못하다 간신히 회진 준비를 마쳤다. 회진 후 수술실로 내려가는 동안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감각까지 이상했다.

‘최근 들어 가장 힘든 날이네. 죽겠다.’

졸음이 몰려와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어 휴게실에서 찬물로 샤워까지 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자 그나마 잠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김지훈이 수술 준비를 하며 뭔가를 중얼거렸다.

첫 수술을 받은 이후, 습관처럼 항상 환자를 보며 수술 계획을 세우곤 했다. 한 번쯤 더 수술을 해 봤으면 하는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1년차가 가장 먼저 숙지해야 할 퍼스트 어시스트를 제대로 서고 싶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어시스트도 제대로 못하면서 수술을 잘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수술을 어떻게 진행할지 미리 생각하면 그만큼 정확하게 퍼스트를 설 수 있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주무르며 머릿속으로 이준영 과장의 손을 따라가던 김지훈이 갑자기 두리번거렸다.

인턴이 안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서도훈이었다.

‘이 자식이, 정말.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얼굴이 벌게져 급히 연락을 하러 나가려는 찰나, 이준영 과장이 들어왔다. 전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김지훈이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간호사에게 연락해 달라는 눈짓을 했다.

이준영 과장이 귀신처럼 김지훈의 생각을 알아챘다.

“인턴 찾아?”

“예? 예. 병동에 일이 조금 밀린 모양입니다.”

“내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수술이 밀리면 아뻬는 2명이나 3명이 할 수도 있어.”

‘응? 무슨 말씀이시지?’

미처 물어볼 새도 없이 환자를 보던 이준영 과장이 손짓을 했다. 집도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수술을 또 주시는 간가?’

“뭐 해? 빨리 준비해.”

갑작스럽게 다가온 흥분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최대한 흥분을 억누른 김지훈이 인사를 하고 집도의 자리에 섰다. 이준영 과장이 조용히 무언가를 기다렸다.

“환자의 우하 복부를 12번 메스로 4센티미터 정도 절개하고, 보비(전기를 이용해 소작과 절개를 하는 기구)를 이용해 피하 지방을 엽니다. 중간 크기의 리트랙터(retractor:절개 창 등을 끄는 도구)로 피하 지방을 제치고 근막을 확인합니다.”

김지훈의 말이 줄줄 이어졌다.

조용히 듣고 있던 이준영 과장이 손을 들었다.

“동맥을 대충 잡아? 다시.”

이제 시작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수술 과정을 말하던 김지훈은 번번이 막혔다. 수없이 아뻬 수술법을 읽고 외웠다. 비록 한 번뿐이지만 경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지적을 많이 당하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진호가 마취를 끝낼 때쯤에야 수술 계획을 모두 말할 수 있었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집도의 자리에 선 김지훈을 본 김진호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활기찼다.

수술이 시작됐다.

이번 역시 수술을 하는 내내 한마디도 없었다.

모니터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조용히 수술이 진행됐다.

툭!

마지막 봉합사를 자른 이준영 과장이 장갑을 벗었다.

“다음에는 똑바로 해.”

“예, 과장님.”

힘차게 대답한 김지훈이 환자를 옮기다 말고 깜짝 놀랐다. 김진호 역시 놀란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고 있었다.

“지훈아, 방금 다음에는이라고 하셨냐?”

“그런 것 같은데요.”

“미스터 최도 그렇게 들었어?”

“예, 과장님.”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설마요, 다음 텀에서 잘하라는 말씀이시겠죠.”

“그럴 수도 있긴 한데, 그럼 너무 빨리 말씀하신 거 아니냐? 너, 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어.”

그도 그렇긴 했다.

답은 이준영 과장만이 알 것이다.

두 번째 수술을 한 환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준영 과장이 수술하는 것을 보면 참 쉽고 간단해 보였다. 하지만 막상 직접 해 보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후우! 한두 번만 해도 잘할 수 있다면 수술을 못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 부럽다. 난 언제쯤 과장님처럼 손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아직 의식이 몽롱한 환자가 몸을 뒤척이며 신음 소리를 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고통스러울 것이다.

‘환자분, 수술 잘 끝났으니까 회복도 잘하셔야 합니다. 수술을 하는 건 정말 재밌는데 부담도 만만치 않네. 밴댕이 가슴인가. 왜 이렇게 환자가 걱정되지.’

수술을 할 때는 과감하면서도 신중하게 해야겠지만, 수술 후에는 밴댕이 가슴도 필요했다. 자만과 방심은 항상 사고를 부르기 마련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수술실을 나가며 쓰윽 회복실을 쳐다보았다. 김지훈이 환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오더를 내며 수시로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 아무리 가벼운 수술을 받은 환자라도 항상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

이준영 과장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오래간만에 탈장 환자가 입원했다.

그동안의 경험이라고는 불과 세 번 정도 퍼스트를 섰을 뿐이었다. 어시스트를 잘할 수 있을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긴장을 풀려고 애를 썼다.

‘죽겠네. 수술은 정말 즐겁고 기대가 되는데, 이놈의 긴장은 왜 안 사라지는 거야?’

두 달 이상 퍼스트를 섰으면 전공의들 대부분 긴장하고는 거리가 멀어졌다. 암 수술처럼 수술이 매우 복잡하고 큰 경우라면 모를까, 웬만한 수술 정도는 담담하게 들어갔다.

도리어 집도의가 누구냐에 따라 긴장도가 달라졌다. 과장이라도 들어오면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풀지 못했다.

반면 김지훈은 조금 달랐다.

이준영 과장이 살벌하게 태우기 때문은 분명 아니었다. 나름대로 수술 계획을 세우다 보면 어시스트를 서는 것마저도 어렵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과장님은 어떤 식으로 접근하실까?’

수술실에 내려와 환자를 기다리는 사이, 책을 보며 수술 과정을 머릿속에 심었다. 항상 그렇듯 이준영 과장의 손을 상상하며 혼자 어시스트를 서는 연습을 했다.

그때 이준영 과장이 들어왔다.

환자도 도착하기 전에 나타나다니, 정말 의아한 일이었다.

‘탈장 수술에 대한 계획도 미리 생각했을까? 수술 전 기본적으로 해야 한다고 한 말을 잊지 않았다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 무리한 생각이겠지.’

잠시 고민하던 이준영 과장이 혹시나 하며 물었다.

“김지훈, 이 환자 수술 계획 세웠어?”

갑작스러운 말에 침을 꿀꺽 삼킨 김지훈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환자를 생각하며 하나하나 수술 과정을 다시 상기했다.

“예, 과장님.”

‘어쭈! 이놈 봐라. 1년차에게 탈장 수술은 절대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계획을 세웠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은 이준영 과장이 시작해 보라는 손짓을 했다.

“환자의 좌측 서혜부에 12번 메스로 7센티미터 정도 절개를 합니다.”

이준영 과장이 손을 들며 말을 막았다.

이 정도는 책만으로 충분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정도로 수술 시야를 확보할 수 있어?”

“제 생각에, 환자가 다소 비만하지만 나이가 많은 분들은 조직이 쉽게 늘어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정도면 시야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깟 1센티미터를 더 열고 덜 여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보다 환자에게 집중하고 신중하게 수술할 수 있게 하는 토대였다.

“계속해.”

숱하게 지적을 하며 다시를 외치는 이준영 과장의 표정이 묘했다. 수술 과정을 숙지한 것뿐만 아니라 환자의 특성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아직은 미숙하고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1년차 초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김지훈은 이준영 과장의 말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실천하고 있었다.

환자가 수술실에 도착했을 때 김지훈의 설명이 끝났다.

설명을 마친 얼굴에서 뿌듯함이나 자신감 대신 혹시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겸손함이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수술 준비해. 인턴은 부르지 마.”

‘아니, 왜 갑자기 또 수술을 셋이서 하시려고 그러지? 인턴 때 수술을 보는 것도 큰 경험인데.’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병동 당직을 찾았다.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들은 서도진이 굉장히 아쉬워했다.

‘세컨드 못 들어와서 아쉬워하는 놈도 있었네.’

불과 몇 달 전에 자신도 그랬다는 것을 어느새 까맣게 잊었는지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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