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외과 의사에게 경험이란… (1)
서로를 믿는다면 때론 말이 필요 없는 경우가 있었고, 지금이 그랬다.
“그래, 진작 이랬어야지. 믿으마. 그리고 지금 내가 한 말은 못 들은 거다. 입 꾹 다물래이.”
불과 하루 전에 들었던 말이었다.
똑같은 말을 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비밀을 지켜야 할 정도로 은밀한 말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혁민 교수가 이준영 과장을 언급한 이상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저, 선생님. 한 가지만 여쭤 보고 싶습니다.”
“뭐가 물어보고 싶어?”
“어제 이준영 과장님께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진 않았습니다. 선생님 말씀도 솔직히 그렇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일이 있는 겁니까?”
이혁민 교수가 한숨을 쉬었다.
“일이 있긴 하지만, 니가 알 필요도 없는 일이다. 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만하자. 다들 기다리겠다.”
무언가 복잡한 일이 있었다.
그것도 김지훈 자신이 관계된 일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는 누차 입을 다물라는 소리를 연이어 들을 이유가 없었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혁민 교수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의미였다.
김지훈이 답답한 가슴으로 뒤를 따랐다.
입국식이 벌어지는 방이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문밖으로 노랫소리와 반주가 요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나게들 노네. 오늘은 니들 날이니까, 김지훈 너도 신나게 먹고 놀아라. 4년 동안 단 하루만 있는 날이야.”
“예, 선생님.”
문손잡이를 잡던 이혁민 교수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준영 선생님도 입을 꾹 다물라고 했어?”
“예.”
뭔가 감이 왔는지 이혁민 교수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니 수술 받았나?”
“예? 아… 아닙니다.”
“흐음! 그래. 어제 신현수도 수술을 받았는데, 참 묘한 일이네. 지금은 힘들게 보이지만 니 운도 꽤 괜찮은 모양이다.”
신현수가 아니라 신현수도였다.
‘이준영 선생님, 김지훈이 이노마가 정말 괜찮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자만하게 만드시면 안 됩니다.’
단박에 전후 사정을 꿰뚫었는지 이혁민 교수가 단정적으로 말을 하며 씩 웃었다.
‘어? 이거 비밀인데.’
김지훈이 급히 변명이라도 하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술에 취한 1년차들의 노랫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김지훈을 본 손일석이 비틀거리며 달려와 손을 끌었다.
“지훈아, 너 어디 갔었어? 노래하자.”
이마에 넥타이를 두르고 노란 가발까지 썼다.
이경석이 현란하게 탬버린을 흔들고, 신현수도 맛이 간 눈으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누구라고 할 거 없이 지금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 난 지금 입국식에 왔고, 과장님이 뭐라고 하든 내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아. 가자! 내 인생은 내 거야.’
김지훈이 테이블 위에 놓인 폭탄주를 단숨에 마셨다.
악을 쓰며 노래를 하자 마음도 풀렸다.
한참 잔을 비우던 이혁민 교수가 손에 투명한 유리그릇을 들고 손짓을 했다.
“마셔라.”
담뱃재를 씻어 냈다고는 하지만 재떨이였다.
김지훈이 단번에 마셨다.
손일석과 김경수는 물론 신현수도 마셨다.
“따라라.”
몇 잔의 폭탄주를 받은 이혁민 교수가 구두를 벗었다.
화들짝 놀란 박경일 과장이 재빨리 옆에 앉아 관심을 돌렸다. 그 덕에 구두 잔은 면했다.
언제 왔는지 보이지 않았던 유석재가 나타나 해마다 있는 일이라고 했다. 완전히 술에 취한 손일석이 그래도 좋다며 구두 잔을 받겠다고 난리를 쳤다.
교수들이 하나둘 전공의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라졌다.
끝까지 남아 있던 이혁민 교수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김지훈, 나 간다. 입 다물래이.”
“예,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다들 술에 취해 귀담아듣지 않았다.
교수들이 모두 자리를 뜨자 분위기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침내 4년차들까지 사라지자 완전히 광란의 파티였다.
“씨펄! 난 안 죽어. 나 교수 될 거야.”
김지훈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석재와 손일석이 환호성을 지르며 잔을 들었다.
“야아! 김 교수님, 한잔합시다.”
“예, 유 교수님, 손 교수님.”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던 마지막 남은 잔까지 싹 비웠다. 첫 자리에서만 얼마나 먹었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럴 정신이 없었다.
“지훈아, 이제 1차 끝났다. 2차 가자.”
“가자, 2차 가자.”
왁자지껄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나왔다.
김경수와 신현수가 뻗어 있었다.
이경석도 골골거리며 기어 다녔다.
기분이 완전히 뜬 유석재가 소리쳤다.
“지훈아, 일석아, 뻗은 놈들은 일단 응급실에 던져 놓고 2차 가자. 내가 쏜다.”
“석재 형, 멋쟁이.”
김지훈이 환호성을 지르며 신현수를 억지로 일으켰다.
뻗은 1년차들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응급실까지 데려갔다.
3월의 차가운 밤공기를 맞다 응급실에 들어서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술이 확 올라왔다. 잠깐 환자들이 없는 사이 쉬고 있던 인턴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줄줄이 침대 하나당 2명씩 눕혔다.
끝까지 버티던 김지훈도 침대에 앉자마자 그대로 쓰러졌다.
간호사들이 달려와 20프로의 고농도 포도당을 달았다.
일반 외과 1년차들이 아침까지 당직실을 점령했다.
응급실 인턴들은 한숨만 내쉬었다.
김지훈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정신이 멍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은 울렁거려 죽을 맛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맞추자 이혁민 교수와 옆방으로 간 것이 마지막이었다.
“어후! 너무 먹었네. 지금 몇 시지?”
허억! 이럴 수가!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신없이 일어나 세수를 하며 손일석을 발로 찼다.
“일석아, 일어나. 경수야, 현수야.”
그제야 다들 끙끙거리며 눈을 떴다.
손일석이 멍한 눈으로 말했다.
“어우! 죽겠네. 왜 깨우고 지랄이야, 인마.”
“12시야, 인마. 일어나.”
일요일이자 입국식 다음 날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늦었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잘 가라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서울 텀은 병동으로 뛰어 올라가고, 김지훈은 천안 텀과 함께 택시를 잡아탔다. 터미널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김지훈이 침대 구석에서 자고 있던 정갑수를 떠올렸다.
“어? 경석이 형, 갑수 형을 두고 왔네요.”
“갑수? 그 새끼는 놔둬. 아까 내가 깨웠는데 배 째라고 하더라. 금경태 과장님도 참 그래. 어제 박경일 과장님이 일 안 한다고 끌탕을 하던데, 뭐가 좋다고 그렇게 끼고 있냐.”
오성민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형. 현수하고 갑수 형을 아예 물고 빨더라구요. 현수는 일 잘한다고 인정이나 받지. 거기다 일석이 말로는 많이 변했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갑수 형한테까지 그러는 건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니에요.”
유창수가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치란 게 그런 거다. 아버지 잘 둔 것도 능력이야.”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렇게 일을 안 한대요?”
이경석이 코웃음을 쳤다.
“박경일 과장님이 죽으려고 하더라. 술도 주기 싫은데 과장님 얼굴 봐서 줬단다. 그 새낀 왜 우리 과 했는지 몰라. 그냥 일 없는 과 하지.”
“형, 솔직히 금경태 과장님 아니면 누가 뽑아 주겠어요? 미달이라면 모를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오성민도 거들었다.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동기들조차 걱정할 정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음성에 파견된 것이 도리어 좋은 일이 됐다. 열심히만 하면 어디서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음성보다 낫다는 구미에 파견된 정갑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이기에 다들 이럴까? 나 같으면 죽어라고 하겠다.’
김지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이경석을 보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석이 형, 그때 칼에 찔려 보낸 환자, 흉부외과에 입원시켰죠? 지금은 괜찮아요?”
“넌 그걸 또 어떻게 알았냐? 하여간 환자한테는 참 잘해요. 그 환자, 아직도 정신적 충격에서 못 벗어난 것 같더라.”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빨리 좋아져야 할 텐데, 쉽지 않겠죠?”
“그러게 말이다. 어느 새낀지,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세상에 미친놈 참 많아. 그런데 넌 할 만해? 다들 네 걱정하고 있다.”
김지훈이 씩 웃었다.
“왜들 그렇게 생각해요? 음성도 좋아요.”
“좋은 점도 있겠지. 하지만 응급실을 전담하면서 다른 과만 보는 게 그렇게 좋아?”
이경석의 말에 내심 나 아뻬까지 했다고 외치던 김지훈이 움찔하며 헛기침을 했다.
입 다물라는 이준영 과장의 말이 기억난 것이다.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뻬하고 탈장도 하고, 복막염도 수술해요. 왜 이러세요.”
“일주일에 한 서너 개? 천안에서는 오전에만 그렇게 해, 인마. 일주일이면 도대체 몇 개겠어? 에이! 정갑수나 보내지. 왜 제일 잘난 놈인 너를 보내냐.”
다른 건 몰라도 수술이 많다는 사실은 부러웠다.
“수술이 그렇게 많아요?”
“하루 종일하고, 응급으로 두세 개를 또 해. 거기다 리포트까지 써야 하니까 죽을 맛이다. 아마 서울보다 천안이 더 힘들걸? 어휴! 다시 일할 생각하니까 술이 더 오르네. 버스에서라도 좀 자야겠다.”
김지훈이 부러운 눈으로 이경석을 보다 피식 웃었다.
비교도 할 수 없이 수술이 적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매번 퍼스트를 서고, 아뻬까지 했다는 것을 알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솔직히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의 말을 어길 수는 없었다. 워낙 무뚝뚝한 사람의 말이라 그런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천안 팀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다음 텀이 구미인 탓에 언제 또 만날지 알 수 없었다.
천안행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김지훈이 고경아에게 전화를 했다. 음성행 버스가 오려면 제법 시간이 남았다.
고경희가 받았다.
(지훈이 오빠? 잘 지내셨어요? 언니, 당직이에요.)
“당직? 알았어. 경희 너도 잘 지내지?”
(아니요. 오빠가 밥 안 사 줘서 요새 우울해요.)
“미안해. 서울 가면 꼭 사 줄게.”
(언제 오는데요?)
“겨울에. 그래 봐야 앞으로 7개월인데, 뭐. 경아 씨한테 안부 전해 줘. 전화 못 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꼭 말해 주고.”
고경희가 ‘피’ 소리를 내며 실망했다.
(알았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다음에 봐요.)
잠시 통화를 하며 시간을 보낸 김지훈이 버스에 올랐다.
과음으로 군데군데 필름까지 끊겼지만, 이혁민 교수의 말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누군가 자신을 믿어 준다는 사실만큼 힘이 되는 것은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개업? 그 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먼저야.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 그나저나 어제 이준영 과장님 얘기도 나왔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하네. 후우! 일단 잠부터 자자.’
음성으로 가는 동안 내내 잠만 잤다.
포도당의 약효가 다 떨어졌는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술이 다시 올랐다. 결국 10프로 포도당 하나를 더 맞아야 했다.
반짝 술기운이 사라진 사이 부리나케 병동으로 올라간 김지훈이 아뻬 수술을 받은 환자부터 찾았다.
“괜찮으시죠? 혹시 방귀 뀌셨어요?”
“오늘 아침에 나왔어요.”
“야! 회복이 빠르시네. 그래도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내일 아침에 과장님 회진 도시면 물부터 시작할게요. 배고프셔도 조금만 참으세요.”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도 걱정이 됐지만 환자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불안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런 성취감과 기쁨이야말로 환자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