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입국식 (2)
한결 마음이 편해진 김지훈이 웃자 손일석이 째려보았다.
“자식, 실없이 웃기는. 너도 속상하겠지만,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
“아니야, 인마. 나도 많이 배우고 있어.”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버텨. 원래 김지훈이 긍정을 빼면 시체잖아.”
손일석의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다. 절대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김지훈의 귀에 속삭이고 말았다.
“현수가 어제 아뻬 받았어. 부러워 죽겠더라. 근데 말이야, 저 자식이 수술을 끝내주게 했다. 어떻게 똑같이 태어났는데 부족한 게 없냐. 요샌 성격까지 좋아지고 있어요.”
‘현수가 수술을 받았어?’
깜짝 놀란 김지훈이 신현수를 보았다.
탁자에 턱을 괸 채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그동안 남들 앞에서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스스로 질색했을 모습까지 보인다면 그만큼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멀쩡히 눈을 뜨고 있는 1년차는 자신밖에 없었다.
정갑수까지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음성 병원을 핑계 삼아 자만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신현수는 물론 손일석까지 모두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들 나보다 더 열심히 하고 있었어. 앞서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뒤처지진 말아야 하잖아. 후우! 과장님이 괜히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었어. 절대 자만하면 안 돼.’
무쇠 인간이 아닌 이상, 더 이상 잠을 줄일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정신 바짝 차리고 최대한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집중하자, 집중.’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쉬던 김지훈이 머리를 감싸 쥐며 얼굴을 찡그렸다. 몰려오는 잠에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았다. 하지만 쉽사리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비몽사몽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상, 기상. 자! 다들 입국식 가야지. 김지훈, 그만 자자.”
유석재가 크게 소리 지르며 손뼉을 쳤다.
졸고 있던 1년차들이 하나둘 눈을 떴다.
다들 조각 잠에 도리어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발딱 일어난 정갑수만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웃고 있었다.
간단한 식사를 시작으로 입국식이 진행됐다.
1년차들에게 입국식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무사히 인턴을 마치고 한 달 반 동안 일반 외과 근무를 했다. 잠잘 시간도 없을 정도로 과중한 업무와 혹독한 수련 속에서 일반 외과가 어떤 과인지 스스로 깨우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면 일반 외과 의사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슴 깊이 새겼을 것이다.
그런 의미를 되새기며 수많은 선배 의사들 앞에서 정식으로 일반 외과 의사임을 인정받는 자리가 바로 입국식이었다.
이제 1년차들도 일반 외과 의국원인 것이다.
거창하고 성대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일반 외과 구성원이라면 모두들 참석하고 싶어 했다.
서울 병원과 천안 병원 교수들은 물론 구미의 박경일 과장까지 보였다. 1년차에겐 하늘보다 더 높은 4년차들과 당직이 아닌 위 연차들까지 모두 모였다.
식사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1년차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식사가 끝난 후, 금경태 과장의 일장 연설이 이어졌다.
다들 지루해할 쯤에야 말을 끝낸 금경태 과장이 신현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신현수 선생부터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지.”
한 명씩 돌아가며 인사를 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입국식이 시작됐다. 서열상 가장 높은 위치인 금경태 과장과 천안 병원의 송재덕 과장이 손짓을 했다.
1년차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과연 누가 과장들의 가장 큰 신임을 얻었을까?
첫 타의 영광은 당연히 신현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송재덕 과장이 이경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경석도 믿기지 않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송재덕 과장의 잔을 받았다.
미리 언질을 받은 대로 신현수와 이경석이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단번에 마시고 머리에 털어 확인 사살을 했다.
금경태 과장이 여유롭게 웃으며 서울 텀들에게 차례차례 폭탄주를 권했다. 천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경일 과장이 잠시 김지훈과 금경태 과장을 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갑수에게 먼저 술을 주었다.
남은 1년차는 한 명뿐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마지막으로 김지훈을 불렀다. 순서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김지훈으로서는 씁쓸한 일이었다.
“김지훈, 열심히 하고 있지?”
“예, 과장님.”
“이준영 과장은 잘 지내나?”
“예, 별일 없으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금경태 과장이 잔을 채워 주고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김지훈이 폭탄주를 비웠다. 의외일 정도로 간단한 절차였지만 이것으로 정식 절차는 끝이었다.
박수와 환호성으로 1년차들을 축하한 교수들과 선배 전공의들이 여기저기서 잔을 권했다. 조용했던 자리가 떠들썩해졌다. 이 시간만은 과장이나 교수들이 아니라 1년차들이 주인공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김지훈을 불러 세웠다. 쓱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혁민 교수에게 손짓을 해 옆에 앉혔다.
‘김지훈, 엉뚱한 꿈은 꾸지도 마. 그게 좋을 거야. 이 교수, 자네도 내 의중 정도는 알아야겠지. 그래야 애먼 짓을 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금경태 과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김지훈, 어차피 구미에 가면 배우게 될 텐데, 다른 과 환자를 많이 본다고 속상해할 거 없어. 그게 다 경험이고 실력이야.”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과장님.”
“그래야지. 지금은 쓸데없는 것 같지만, 나중에 개업을 하게 되면 도리어 큰 도움이 될 거야. 이 교수, 그렇지 않아?”
김지훈은 물론 이혁민 교수의 안색까지 돌변했다.
많은 전공의들이 개업을 선택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병원에 남기를 희망하고 꿈을 꾸어 간다. 그런데 김지훈이 무엇을 꿈꾸는지 묻지도 않고 개업을 단정 짓고 있었다.
돌려 생각하면 넌 절대로 병원에 남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입술을 모으며 콧등을 찡그렸다.
“김지훈도 자신만의 꿈이 있을 겁니다, 과장님.”
‘이거 봐라. 한낱 전공의 앞에서 내 말에 토를 달아? 아직도 김지훈에게 기대를 갖고 있는 모양이군. 개업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놈을 키울 생각이 없다는 의중 정도는 그냥 알아차려야 할 것 아닌가.’
금경태 과장이 쓰윽 이혁민 교수를 째려보며 혀를 찼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각자 꿈을 꾸는 걸 누가 막겠나. 하지만 그에 맞는 능력이 있어야지. 신현수나 손일석도 있고 말이야.”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 면에서 김지훈도 기대를 해 볼 만합니다.”
금경태 과장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내 말뜻을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능력은 실력만이 아니야. 아주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때론 운도 많이 작용하는 법이지. 개업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야. 여하튼 이건 뭐 나중 일이니까 지금은 일 열심히 하고, 한 잔 받아.”
“감사합니다.”
대답을 하는 김지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금경태 과장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공의를 마치고 전문의가 되는 그 해,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면 병원에 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정말 특별나거나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 한 한번 병원을 나간 사람을 교수로 뽑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금경태 과장이 개업을 기정사실처럼 말한 것이다.
‘뭐지? 아예 교수 티오가 없는 건가? 아니면 정말 내가 뭘 잘못했나?’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쳤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은 1년차에게 할 말도 아닌 사항을 두고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했다. 결국 금경태 과장이 그만두거나, 누군가 더 큰 힘을 갖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얼굴이 벌게진 김지훈이 술을 마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뛰는 가슴과 거칠어지는 호흡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김지훈을 본 금경태 과장이 코웃음을 치며 건배를 외쳤다.
모든 교수들과 전공의들이 ‘위하여’를 외치며 잔을 비웠다.
자리는 점점 흥겨워졌지만 김지훈은 잔에 입을 대지도 못했다.
술잔이 돌았다.
과장에 이어 교수들이 잔을 채우며 술을 권했다.
1년차들에겐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잔이었다.
숨도 돌리기 전에 위 연차들이 차례로 술을 따랐다.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진 김지훈이 술을 받는 대로 벌컥벌컥 잔을 비웠다. 목이 타는 갈증이 더욱 심해졌지만 정신은 도리어 말짱해졌다.
금경태 교수가 다른 교수들과 함께 한참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신현수, 그놈 참 수술 잘하더군. 나도 조금은 걱정했는데 말이야, 이삼 년차 저리 가라 할 정도라 깜짝 놀랐어. 그 정도의 능력을 가졌다면 확실하게 키워 보자구. 이사장님이 반대하셔도 전문의가 되면 바로 교수로 임용해야겠어. 하하하! 간만에 보는 인재야.”
금경태 과장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린 김지훈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때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이 있는 테이블로 옮겨 앉았다. 함께 앉아 있던 전공의들에게 술을 돌린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을 툭 치며 속삭였다.
“김지훈, 잠깐 나 좀 보자.”
“예, 선생님.”
김지훈이 이혁민 교수를 따라 나갔지만, 다들 술에 취해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옆방에 단둘이 앉았다.
김지훈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술 많이 마셨나?”
“아닙니다, 선생님.”
사실 제법 마셨다. 하지만 술기운을 느낄 수 없는지 김지훈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이혁민 교수 역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음성 생활은 어떻더나?”
“괜찮습니다.”
“수술은 좀 있고?”
“처음보다는 늘었습니다.”
김지훈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아닙니다. 몸이 좀 힘들어서요.”
“마음이 힘들겠지. 내 하나만 말할게. 누가 뭐라고 하든 나만 믿어라.”
갑자기 무슨 소릴까?
설마 금경태 과장의 말을 무시하라는 말일까?
“선생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니 꿈이 뭔지 내도 다 안다. 지금처럼만 하면 충분히 이룰 수 있으니까 그 꿈을 향해 달려가.”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혹시 이혁민 교수가 3년 후 과장이 된다고 해도 금경태 과장의 뜻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교수는 과장의 생각만으로 뽑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짐작했는지 이혁민 교수가 웃었다.
“일반 외과는 말이야, 한 사람이 반대한다고 해서 안 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해 왔다면 과가 온전하겠나? 정말 뛰어난 외과 의사라면 당연히 되게 돼 있어.”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혁민 교수는 모르지만, 마음속의 멘토이자 누구보다도 존경하며 배우고 싶은 의사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뛸 듯이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혁민 교수의 한계 또한 명확했다.
위로의 말뿐이겠지만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날 믿고 열심히 해라.”
김지훈이 어색한 미소만 머금자 이혁민 교수가 잠시 고민을 하다 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지훈에게는 힘과 확신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변하지만 않는다면 내 반드시 네 꿈을 이루게 해 줄 거다. 니 같은 놈이 아니면 누가 병원에 남겠어. 윗사람 눈에 잘 보이고, 수술만 잘한다고 해서 대학 병원에 남는 것이 아니다. 이준영 선생님이 내게 전화를 했으니까, 너도 어떤 분인지 대충은 알고 있겠지.’
“김지훈, 니 나만이 아니라 니 자신도 못 믿는구나.”
“아닙니다, 선생님.”
“그래? 그럼 믿어. 이준영 선생님을 변하게 한 놈이 무엇을 못하겠어.”
이준영 과장을 변하게 했다는 말에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이준영 과장님을 아세요?”
“한때 내가 가장 존경했던 선생님이시다. 그리고 다시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런 이준영 선생님께서 널 믿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널 믿고 아끼는 사람이 많아. 쓸데없는 걱정 말고 니 자신을 믿고 달려가면 된다. 알았나?”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확신에 찬 이혁민 교수의 말이 이준영 과장이 했던 말과 맞물렸다. 최선을 다한다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헛된 희망에 불과할지라도 지금은 믿고 싶었다.
김지훈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
이혁민 교수가 다시 웃었다.
김지훈의 눈빛에서 각오와 희망을 본 것이다.
길게 말한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