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32화 (132/1,329)

제6화 입 꽉 다물자 (1)

회복실까지 따라온 이준영 과장이 한참 동안 환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급기야 수술 후 오더까지 직접 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나가 보호자들에게 경과를 설명했다.

‘어, 정말 왜 이러시지? 내가 뭘 잘못했나?’

김지훈이 멍한 표정으로 걱정을 했다.

차라리 수술실에서 탔을 때가 마음이 더 편했다.

바로 아뻬 수술을 해야 하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어시스트를 서야 할지 답답하기까지 했다.

잠시 후, 수술실로 돌아온 이준영 과장이 홀로 휴게실이 아닌 탈의실로 들어갔다.

이준영 과장이 우두커니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장 절제술을 해냈다.

단순히 수술 하나를 끝낸 것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피에 대한 두려움을 마침내 극복한 것이다.

탈의실에 난 조그만 창문으로 하늘을 보았다.

해가 지며 드리우기 시작한 어둠 사이로 별 하나가 보였다.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를 악문 이준영 과장의 어깨가 들썩였다.

볼을 타고 흐른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지난 10년의 고통과 죄책감이 함께 떨어졌다.

가슴이 북받쳐 오르는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르던 이준영 과장이 수술복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은색 메스와 금빛 칼 대가 든 케이스였다.

김지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연하게 이어진 인연이 상상도 하지 못한 일로 이어졌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런 일은 불가능했을 거야.’

물끄러미 메스를 보던 이준영 과장이 수술복이 아닌 가운에 케이스를 넣었다.

앞으로는 결코 물러나거나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닥쳐도 이겨 낼 수 있다고 믿었다.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돼야 했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가르쳐야 한다는 마음과 이제 와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마음 사이에서 방황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떳떳하게 가르칠 수 있었다. 비록 한 달 반밖에 안 남았지만,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싶었다.

아뻬 환자가 올라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탈의실을 나와 수술실로 향하는 어깨가 당당했다.

같은 날 같은 수술실에 들어가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다시 출발선에 섰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

서울 병원 1년차들이 죽어났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이 이어졌다. 김경수는 물론 손일석과 신현수도 틈만 나면 위 연차들의 눈을 피해 잠을 자야 했다.

수술실에서도 사실상 인턴과 큰 차이가 없었다.

써드를 서다 이제 세컨드 어시스트를 선다지만, 하는 일은 마찬가지였다. 리트랙터(retractor:끝이 ㄷ 자로 구부러진 기구로 복벽을 걸어 끌어당기는 데 쓴다)를 환자의 왼쪽에서 끄느냐, 오른쪽에서 끄느냐 하는 정도만 달랐다.

흔히 의사들끼리 말하는 끌개일 뿐이었다. 단순한 일이다 보니 깜박 잠이라도 들면 무릎이 꺾이기 일쑤였다. 한 달 동안 꼬박 그런 생활을 했다.

5주차에 들어가며 슬슬 분위기가 바뀌었다.

금경태 과장이 신현수를 퍼스트에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손일석과 김경수도 수술 트레이닝을 받았다.

아뻬나 탈장들의 기본적인 수술에서 퍼스트를 서며 수술에 필요한 기술과 경험을 익혀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술들은 개인 병원에서도 충분히 소화해 냈기 때문에 의외로 서울 병원은 케이스가 많지 않았다.

“야! 아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으면 좋겠다.”

손일석이 매일 푸념을 했다.

퍼스트를 서면 초롱초롱한 눈으로 긴장과 흥분 속에 수술에 임했다. 반면 세컨드 어시스트를 서면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가히 하늘과 땅 차이였다.

“소나기보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슬금슬금 오는 게 더 좋은 거 아냐?”

역시 쓸데없이 진지한 김경수였다.

함께 차트를 정리하고 있던 신현수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도 우린 행복한 거야.”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야?”

“다른 과 환자 때문에 고생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우리 과 수술도 거의 없다는데.”

신현수의 말에 손일석이 한숨을 쉬었다.

다른 과 환자 문제로 여기저기 전화를 해 대는 통에 김지훈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일반 외과 1년차가 아니라 잡과 1년차라는 농담 아닌 농담까지 할 정도였다.

“맞는 말이다. 배부른 소리지. 어휴! 음성 병원 과장님은 일도 안 하나. 그래도 간간이 우리 과 수술은 하겠지?”

신현수가 차팅을 멈추고 탁자에 턱을 괴었다.

2주 전쯤 금경태 과장이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음성 병원의 사정을 알려 주었다.

‘일주일에 고작 한두 개라고 했었지. 퍼스트는 서겠지만 케이스가 너무 적고, 메이저 수술을 못 보는 게 더 큰 문제가 될 텐데. 다음 텀도 구미니까 득이 될 일이 없어. 김지훈을 이런 식으로 이기고 싶진 않았는데.’

서울에서 구미로 간다면 대단히 좋은 일정이었지만, 음성에서 구미는 반대로 최악일 수도 있었다. 음성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낫지만, 구미 역시 서울이나 천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병원이었다.

사실상 3개월이 아니라 6개월간 트레이닝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만일 김지훈이 이를 악물지 않는다면 영영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신현수가 힐끗 손일석을 보았다.

“해야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것 같았지만, 이런 말을 할 신현수가 아니었다. 딱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었지만 신현수가 점점 변하고 있었다.

손일석이 씨익 웃으며 신현수의 등을 쳤다.

“그런데 너, 지금 지훈이 걱정한 거야? 잠이 확 깬다.”

몸에 손대는 것을 엄청 싫어하는 신현수였다. 예전 같았으면 기겁할 일이었다. 그런데 별말 없이 눈만 부릅뜨며 손일석을 노려보았다.

“자식, 고맙다.”

신현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차팅을 시작했다. 김경수도 의아한 눈으로 신현수를 보다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나저나, 이놈의 리포트 때문에 죽겠다. 일주일에 2개 작성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

눈이 거의 감긴 손일석이 탁자에 고개를 박으며 중얼거렸다.

“내일은 뭔데?”

“직장암 수술법하고 스테이징(staging:암 기수 판정).”

“그거 전에 발표하지 않았었나?”

김경수가 피식 웃었다.

“스테이징은 했었지만, 저번엔 대장암 수술법이었지.”

“그랬나? 일주일에 리포트 발표만 10개 가까이 들으니까 뭘 들었는지도 헷갈리네. 이젠 내가 발표한 것도 기억이 안 나. 점점 바보가 되는 것 같아.”

“나도 그래. 근데 지훈이는 리포트는 쓸까?”

누구보다 김지훈이 가진 꿈을 잘 알고 있는 손일석이 신현수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나도 내 꿈을 위해 정정당당하게 경쟁해 보고 싶었는데. 현수는 애초부터 시작이 다르니까 그렇다고 쳐도 지훈이는 정말 아니야. 정말 이건 아니지.’

“음성에서 그게 되겠어? 케이스 자체가 없는 모양이던데. 그러지 않고서야 다른 과 환자 때문에 맨날 전화하겠어? 지훈이 나름대로 노력은 하겠지만 솔직히 걱정된다.”

1년차 트레이닝은 수술만이 아니었다.

차팅에서부터 오더 내는 법은 물론 환자의 드레싱과 적절한 처치까지 체계적으로 배워 가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외과 전공의들이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이론도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머리에 든 지식이 없으면 수술을 아무리 잘한다고 한들 반쪽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한두 명의 스태프나 전공의 선배들로는 담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첫 근무로 구미를 가는 것조차 문제시 삼는 스태프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김지훈이 음성에 파견된 것을 모두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현수가 차팅을 하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문득 라이벌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마음 편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은 것이다.

어느새 1년차의 6주차 근무도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하루 후면 입국식이었다.

일반 외과 1년차들이 모두 모여 각 병원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는 날이었다.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1년차들에겐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정식으로 일반 외과 의국원의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수술실에서 나오지 못한 신현수와 손일석이 가벼운 흥분에 잠시 피곤을 잊고 있었다.

모든 수술이 끝나고 금경태 과장 앞으로 입원한 아뻬 환자 수술만이 남았다. 이미 오후 6시가 넘어 다들 바삐 움직였다.

그때 수술실에서 소리 없는 동요가 일었다.

금경태 과장이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이번 아뻬, 신현수 준다. 그렇게 알고 준비해.”

1년차가 된 지 이제 한 달 반도 지나지 않았다.

100일 당직 중에는 오더도 함부로 내지 못하는데 수술을 준다니, 모두들 귀를 의심했다. 더구나 어느 병원보다도 수술에 엄격해 2년차도 아뻬 수술을 하기 힘든 곳이 바로 서울 병원이었다.

첫 3개월 동안 수술을 받은 1년차는 그간 단 한 명도 없었다. 신현수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제 2주 정도 수술 트레이닝을 받았을 뿐이었다.

상식을 파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특혜였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과장의 말이었다.

‘이사장님 아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정말 너무하네.’

최철한이 불만을 내색도 하지 못하고 수술을 준비했다.

집도의 신현수.

퍼스트 어시스트 금경태 과장.

세컨드 어시스트 최철한.

써드 어시스트 유석재.

통상 아뻬 수술은 2년차나 3년차 중 한 명이 1년차와 함께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은 과장의 수술이었기 때문에 1, 2, 3년차가 모두 들어왔다.

그 탓에 마치 메이저 수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작해.”

전공의들은 4년차라고 해도 과장의 오더에는 토를 달지 못했다.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아버지가 재단 이사장이라고 해도 1년차인 신현수가 입을 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방식은 내게 도움이 안 돼.’

예전이었다면 실력을 보일 기회라고 여기며 크게 기뻐했을 신현수였다. 그런데 신현수가 마치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최철한과 유석재를 보고 있었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위 연차 입장에서는 다소나마 마음이 풀리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후광과 과장의 총애 속에서도 선배들에게 갖춰야 할 예우를 잊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간간이 인턴 때와는 다른 모습과 행동을 보이기까지 했다.

차가운 성격이 조금은 사라졌다고 할까?

굳은 눈빛으로 신현수를 보던 최철한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최철한과 유석재는 구미에서 신현수가 아뻬를 하다 벌어졌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후 수술을 경험한 것도 아니고, 퍼스트를 충분히 서지도 못했다.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이 시작됐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상당한 수술 경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익숙하게 수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중하게 배를 열고, 정확하게 아뻬를 찾아 제거했다.

금경태 과장의 지도가 거의 필요 없을 정도였다.

불과 40분 만에 첫 수술을 끝냈다.

‘개인 병원에서 미리 수술할 수 있도록 한 보람이 있군.’

묘한 표정으로 신현수를 보던 금경태 과장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역시 신현수야. 손재주가 대단해. 이거 걱정을 했던 내가 다 무안해지네. 이 정도면 탈장 수술을 줘도 되겠어. 신현수 선생, 수고했어.”

수술실을 나가서도 다른 과 스태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최철한과 유석재도 할 말을 잃었다. 마치 많은 경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능숙하게 수술을 한 신현수 때문이기도 했지만 금경태 과장의 말에 더 놀란 것이다.

“현수가 저렇게 능숙하게 수술을 하다니, 희한하네요. 그런데 최철한 선생님, 설마 탈장 수술을 주시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겠어. 아뻬를 준 것만도 사건인데. 정말 탈장까지 주시면 일하기 힘들어진다. 3년차가 되어도 잘 못 받는 수술인데, 성질나서 일하겠냐?”

곧 병동으로 이 사실이 퍼졌고, 너무 놀란 손일석과 김경수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뭐, 현수가 수술을 받았어? 어이구! 내 그럴 줄 알았다. 씨펄! 누구는 음성에 보내고, 누구는 한 달 반 만에 수술을 받고. 우린 또 뭐냐. 현수 탓은 아니지만, 기분 더럽네.”

손일석의 말에 김경수가 도리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수술 트레이닝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잘했을까? 과장님이 현수를 퍼스트에 세운 게 몇 번 안 되잖아?”

“에이씨! 넌 이 와중에도 현수가 걱정돼? 나도 몰라. 짜증 나네, 정말. 이러니까 부모도 잘 선택해서 태어나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지.”

“일석아, 이미 각오했던 일이잖아. 짜증 내 봐야 우리만 손해야. 혹시 우리도 줄지 알아?”

“주기는 개뿔. 이혁민 선생님하고 오상익 선생님이 수술을 줄 분들이냐? 스탠다드(standard)잖아, 스탠다드. 예외란 없는 분들이라구.”

불만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첫 수술을 40분 만에 끝냈다는 말에는 손일석도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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