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새로운 시작 (3)
마침 수술을 끝내고 나가던 김대성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김진호 선생님, 좋은 일 있으세요?”
“좋은 일은. 김지훈 이 자식이 날 깔보네. 어떻게 할까?”
“그래요? 그럼 우리 수술할 때 들여보내세요. 망치가 좋을까요, 톱이 좋을까요? 깨끗하게 갈아 놨는데.”
“야! 너무 무지막지하다. 그냥 끌로 해라.”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김대성 선생님, 환자 나갑니다.”
“어? 이 자식이, 정말 그러네. 감히 우리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가?”
“죄송합니다, 과장님. 일단 환자부터 회복실로 옮기겠습니다.”
김지훈이 혀를 내밀며 나가자 김대성이 궁금한 눈으로 김진호를 보았다. 한동안 둘이 뭔가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아뻬 수술 기록은 껌 값이었다.
그냥 볼펜이 혼자 움직이는 것처럼 수월했다.
마지막 글자를 쓰던 김지훈이 갑자기 자신의 손을 요리조리 보았다. 손이 빠르다고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외과 의사가 손이 느리면 수술을 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솔직히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이게 다 첫 수술부터 마무리를 주신 과장님 덕분이겠지? 이렇게만 가다가 3개월 후에는 수처의 신이라고 불리는 거 아냐?’
김지훈이 손을 보다 말고 미친놈처럼 히죽히죽 웃었다.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또 지났다.
점점 일이 많아졌다.
김지훈이 틈만 나면 어디서든 눈을 감고 졸았다.
차팅을 하다 말고 탁자에 고개를 박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기본 업무가 많은 수술이 늘어난 이유도 있지만, 이준영 과장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수술 기록이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다시 쓰게 할 정도였다.
오늘도 환자에 대한 오더 중 뭔가 빠졌는지 차트를 손가락으로 콕콕 찍으며 못마땅한 눈초리를 지었다.
“김지훈, 이제 한 달 조금 더 지났어. 벌써 꾀를 부리는 거야? 오더 똑바로 내. 넌 주치의야, 주치의.”
그 순간 김지훈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주치의!
이제 전공 수련을 시작했고, 수술을 해 본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는 존재가 1년차였다.
김지훈이 예외적인 경우였지, 실제 서울이나 천안에서는 오더조차 마음대로 내지 못했다. 수술실에서도 세컨드 어시스트를 서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는 1년차였다.
책임감을 갖고 환자를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은 물론, 고통을 호소하면 직접 가서 살피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간호사들도 환자의 불평과 호소가 생기면 가장 먼저 1년차에게 노티를 했다.
그동안 주치의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다른 병원과는 상황도 크게 달랐다.
어쩌면 2년차나 3년차의 일까지 하는지도 몰랐다.
보다 긴장하고, 확실히 책임감을 가져야 했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오더 다시 확인해 보고 제대로 내겠습니다.”
“확실히 해.”
회진을 끝낸 후, 김지훈이 서울에서 가져온 기록들과 책을 들추며 빠진 오더를 찾아냈다. 방심하거나 귀찮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핑계일지도 몰랐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잠과 한계에 몰린 체력을 변명으로 삼았다. 환자마다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오더도 조금씩은 달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 있었던 지식만으로 환자를 보았다. 부인할 수 없었다.
‘주치의! 맞아, 내게 주어진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잊고 있었다. 방심하거나 자만하면 안 돼.’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몸이 따라 주지 못했다.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이 감기고 있었다. 그래도 병실과 응급실에 일이 없는지 확인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얼마나 잤을까?
꿈결처럼 들려오는 벨소리에 더듬더듬 전화기를 찾았다.
“네, 김지훈입니다.”
(선생님, 서도진입니다. 64세 여자 환자로, 교통사고로 인한 복부 통증을 주소로 내원했습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바이탈은?”
(혈압이 90에 60이고, 심박 수는 100회입니다.)
“뭐?”
잠이 확 달아났다.
깜짝 놀란 김지훈이 벌떡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부랴부랴 응급실로 향했다. 모두가 달려들어 필요한 처치를 해 혈압을 회복시켰다. 바로 복부 CT를 찍었다.
“헤모뻬리(Hemoperitoneum:혈복강)네.”
두 번째 혈복강 환자가 왔다.
자세히 CT를 확인해 보니 비장 파열이 의심됐다.
문득 혈복강으로 수술한 첫 번째 환자가 생각났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보면 볼수록 어려운 것이 수술이었다. 아뻬라고 해도 염증 진행 정도에 따라 상당히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단 한 번도 수술해 보지 못한 상황에서 비장을 절제했다는 것은 천운이었다. 실력하고는 하등의 상관이 없었던 일이었다.
‘재수가 엄청 좋았기에망정이지, 까딱했으면 수련이고 뭐고 난리 날 뻔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과장님이 하란다고 한 나도 참 정신없는 놈이었어.’
부르르 어깨를 떤 김지훈이 노티를 했다.
잠시 후, 응급실에 온 이준영 과장이 말없이 환자만 보았다.
‘어머니!’
10년 전 어머니를 수술했을 때와 상황이 똑같았다.
손상 부위가 비장인 것은 물론 심지어 나이까지 같았다.
옆에 서 있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준영 과장이 긴장하는 것 같았다.
김지훈에게는 당연히 긴장되고 어렵기만 한 수술이었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 정도의 경험을 가진 의사가 긴장할 정도로 고난도 수술은 아니었다.
그간 복막염이나 담낭 절제술 같은 수술을 보며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 실제로도 최근 이준영 과장은 수술을 앞두고 신중하기는 했지만, 긴장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정말 긴장하신 걸까? 설마 아니겠지. 그럼 혹시 몸이 또 안 좋으신가?’
아까운 시간이 5분이나 흘렀다. 기다리다 못한 김지훈이 입을 열려는 순간 이준영 과장이 결정을 내렸다.
“김지훈, 수술하자. 보호자 불러.”
“예, 과장님.”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이준영 과장을 보며 김지훈이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이준영 과장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3월의 날씨라 더울 리도 없었고, 응급실은 항상 적정 온도를 유지했다. 전에는 흘리지 않던 땀을 흘릴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그 점을 빼고는 모든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수술하자.”
이준영 과장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 김지훈이 오더를 내고 마취과에 스케줄을 제출했다. 수술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환자 상태를 살피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어느새 금요일이었다.
내심 토요일의 여유를 간절히 바랐는데, 비장 절제 수술 환자 때문에 글렀다. 통상 하루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바이탈이 확실하게 안정되면 병실로 올라가지만, 주말은 다르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주말에는 어느 정도 나태해지기 마련이었다.
병동 근무를 하는 간호사들은 물론 의사들도 방심하기 쉬웠다. 따라서 수술 후 확실하게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면 병실로 올릴 수 없었다. 결국 월요일까지 중환자실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고, 그만큼 여유도 없다는 의미였다.
‘이젠 마음 놓고 두세 시간 잘 여유도 없네. 환자도 많고, 잡다한 일까지 해야 하는 서울하고 천안은 더 힘들겠지? 그렇게 보면 내가 운이 정말 좋은 거네.’
응급실 근무인 안호석이 다가왔다.
“선생님, 25세 남자 환자로, 우하 복부 통증을 주소로 내원했습니다. 압통과 반사통이 모두 나타납니다.”
“아뻬가 의심돼?”
김지훈의 눈이 갑자기 반짝반짝 빛났다.
수술에 관한 한 기본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였다. 메이저 수술도 큰 도움이 되지만, 역시 가장 익숙한 수술이 기본을 익히기에는 딱 좋았다.
김지훈이 휘파람을 불며 환자를 보고는 노티를 했다.
이준영 과장이 잠시 김지훈을 보다 수술 결정을 내렸다.
“바로 이어서 하자.”
목소리가 조금은 이상해진 탓에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고개를 흔들며 수술 스케줄을 작성했다.
스케줄을 받아 든 김진호가 혀를 찼다.
“지금 4시인데, 아뻬까지 하면 8시는 넘어야 끝나겠네. 지훈아, 너 때문에 저녁도 못 먹게 생겼다. 어쩔래?”
“죄송합니다, 과장님.”
“맨입으로?”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리자 김진호가 한숨을 쉬었다.
“자식, 서울이나 천안에서 어떻게 하는지 인계를 못 받았구나. 맥주 한 캔 사. 안주는 양념 오징어.”
이제야 알아들었는지 김지훈이 머리를 쳤다.
응급 수술이 연이어 뜨면 관례적으로 마취과에게 일종의 뇌물을 제공했다. 마취를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대부분 맥주 몇 캔이었고, 모두들 선후배 간이었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사실 그런 일이 불가분의 관계인 외과와 마취과의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맥주 몇 캔으로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득을 얻는 것이다.
‘아! 그렇지.’
“예, 과장님. 수술 끝나면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휴게실로 가져올까요?”
“오케이!”
김진호가 기분 좋게 웃는 사이, 수술할 환자가 올라왔다.
병동 당직인 서도진과 함께 급히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환자를 수술대로 옮겼다. 다행히 아직까지 바이탈은 안정적이었고, 환자의 의식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모니터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마취가 시작됐다.
김지훈이 입을 오물거리며 수술 과정을 상기했다.
김진호가 수술을 해도 좋다는 사인을 냈다.
“시작하셔도 됩니다.”
수술 가운 위로 뭔가를 만지던 이준영 과장의 마스크가 불룩해졌다. 지그시 환자의 배를 보며 뭔가를 생각하던 이준영 과장이 나직하게 말했다.
“수술 시작합니다.”
메스를 잡은 손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복부 정중앙을 절개하고 복막을 열었다.
손상된 비장을 통해 새어 나온 피가 복강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져 느끼지 못할 법도 했지만, 진한 피비린내가 코를 자극했다.
김지훈에게는 도리어 그것이 자극이었다.
수술에 대한 기대와 함께 흥분과 긴장이 몰려왔다.
‘확실히 따라가자. 탭부터 찾으시겠지?’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과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탭.”
이준영 과장의 말에 간호사가 탭을 건넸다. 피를 잔뜩 머금은 탭이 나오자마자 김지훈이 손에 들고 있던 탭을 넣었다. 빠르게 배 속의 피가 제거됐다.
비장을 확인해야 할 차례였다.
김지훈이 불현듯 다가온 이상한 느낌에 힐끗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이미 지금쯤이면 새카맣게 탔어야 하는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수술 모자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것 같았다.
‘어제 수술하실 때와는 분명히 뭔가 다른데 뭔지를 모르겠네. 내가 긴장을 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잠깐 정신을 팔았던 김지훈이 두 눈을 부릅떴다.
가장 중요한 과정이 시작됐다.
이준영 과장이 동맥과 연결된 조직들을 묶고 잘랐다.
어시스트만 섰던 수술과 한 번이라도 직접 해 본 수술은 확실히 달랐다. 어쩔 수 없이 했을 뿐인데도 수술 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손을 맞췄다.
‘주 동맥은 확인했으니까 부 동맥이 있는지 찾아야지. 아! 이쪽은 동맥이 주행하지 않는 곳이었지.’
이준영 과장이 전에 없이 신중하게 수술을 했다.
마침내 비장이 절제되고 내부의 장기를 모두 확인했다.
이때까지도 이준영 과장의 입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심지를 박고 복부 절개 창만 닫으면 끝이었다.
이제부터는 김지훈의 몫이었다. 그런데 이준영 과장이 아무 말도 없이 수술을 계속 진행했다. 심지를 넣고, 절개 창을 봉합하는 것까지 모두 직접 했다.
실을 자르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고,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처음 수술하는 사람처럼 신중하기만 했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김진호도 의아한지 자꾸 이준영 과장의 얼굴을 보았다.
툭!
김지훈이 마지막 봉합사를 잘랐다.
때맞춰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가 몸부림을 쳤다.
이준영 과장이 직접 김지훈과 함께 환자를 이동 침대에 옮겼다. 전에 없었던 일에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김지훈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눈동자는 오로지 환자에게만 향했고, 가운을 벗자 드러난 수술복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