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30화 (130/1,329)

제5화 새로운 시작 (2)

‘이 교수도 모르는 일이 있다는 말인데, 도대체 뭐지? 인턴이 과장하고 엮일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다는 거야.’

“혹시 김지훈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무슨 말씀이시죠. 김지훈이 일을 제대로 못합니까? 절대 그럴 놈이 아닌데요.)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 줘.”

(제가 아는 한 그런 일은 없습니다. 혹시 김지훈이 마음에 안 드시고, 선생님 문제로 힘드시더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뛰어난 놈입니다. 제대로 가르치면 우리가 바랐던 의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의국에 마주 누워 한 말이 있었다.

최고의 써전이 되는 조건이었다.

이준영 과장은 실력과 지식을 먼저 거론했고, 이혁민 교수는 인성과 환자에 대한 마음을 꼽았다. 밤새 뜬눈으로 새우며 대화를 나눴고, 결국 모두 다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자신감이 넘치던 이준영 과장은 그래도 실력과 지식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었다.

‘이 교수의 말이 정답일지도 몰라. 지나친 자신감과 오만이 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까 말이야. 자네 말을 들었으면 어머님도 돌아가시지 않았을 테지.’

잠시 감상에 잠겼던 이준영 교수가 자세를 고쳤다.

이 이상 대화를 나누다 보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계속 떠오를 것 같았다.

“이 교수, 잘 들어.”

(예. 말씀하세요, 선생님.)

“김지훈, 잘 지켜.”

(무슨 말씀이십니까?)

“금 과장이 가만히 안 놔둘 수도 있어.”

이혁민 교수가 꽤 놀랐는지 숨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과장님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1년차인 김지훈하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문제가 있더라도 과장님인데 체면이 있지, 그렇게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준영 과장이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이혁민 교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래서 더욱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의사들 간의 암투도 어느 사회 못지않게 지저분했다.

더욱이 금경태 과장은 자신에게 해가 되거나 손해를 끼친 사람은 상대가 누구든 간에 절대 용서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10년 전, 음성 병원으로 떠나올 때 뼈저리게 그 사실을 느꼈다.

“자넨 금 과장을 몰라. 내 말을 들었다고 알려고 하지도 마. 그냥 이대로 살아. 대신 김지훈은 아직 어리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니까 자네가 지켜 줘.”

침묵이 흘렀다.

이혁민 교수가 아무리 무관심하다고 해도 금경태 과장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준영 과장보다 훨씬 긴 세월 동안 보아 왔는데 모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김지훈이 이제 1년차라는 사실이었다.

지위든, 돈이든, 뭐가 됐든 금경태 과장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위협할 능력조차 없다. 그런데 지켜 주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제가 자세히 알아보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겠습니다.)

“이 교수, 내가 충고할 처지는 아니지만, 금경태 과장 곁에는 가지 마. 알려고 하지도 말라고 했지? 자네까지 다쳐. 그냥 김지훈에게만 신경 써. 만일 힘에 부치면 물러나. 자네 인생까지 망칠 수는 없잖아.”

이혁민 교수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한 답답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숨을 내쉰 이준영 과장이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이 교수, 자네가 총무과에 전화를 했었나?”

(총무과요?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사실 선생님께서 연락을 하지 않으셨으면 지금쯤 전화를 하려고 하긴 했습니다. 한 달이면 김지훈에 대해 아셨을 것 같아서, 잘 좀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드리려고 말입니다.)

“그럼 금 과장이군. 3주 전에 우리 과 환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어떤 수술을 하는지 서울 병원에서 물어봤다고 하더군.”

(금 과장님이 알아보신 게 맞다면, 혹시 걱정이 되셔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혁신 위원회 일로 전화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혁신 위원회 일로 전화를 했다면 나도 좋겠어. 그랬다면 우리 과 상황만 묻진 않았겠지. 그리고 김지훈이 걱정이 됐다면 이 교수를 통해서 알아봤을 거야. 아니면 원장님에게라도 전화를 하든지 말이야. 내가 껄끄럽다고 해도 총무과를 통할 일이 아니야. 여하튼 내 말 흘려듣지 말았으면 해.”

이준영 과장은 굉장히 날카로우면서도 신중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말이라면 귀담아들어야 했다. 더구나 10년 동안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던 사람이 먼저 연락을 했다.

이혁민 교수도 일단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2주 후에 입국식이 있습니다. 주말에 김지훈을 서울로 보내 주십시오.)

“알았어.”

이혁민 교수가 잠시 뜸을 들였다.

(다른 이야기지만, 지금 기분이 굉장히 좋습니다.)

“무슨 소리야?”

(변하신 것 같습니다. 아직은 제가 10년 전에 알던 이준영 선생님은 아닌 것 같지만, 마지막 통화를 했던 5년 전의 선생님은 아니십니다.)

이준영 과장이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비볐다.

벌써 5년이나 흘렀다는 말인가?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지만, 김지훈을 잘 가르쳐 주십시오. 그놈만 보면 선생님과 함께 수련하던 시절이 떠오르더군요. 그때가 정말 그립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 수련을 같이 받았던 선후배들은 서로를 잊지 못했다. 4년을 동고동락하며 갖은 고생을 함께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난 이미 늦었고, 김지훈은 자네가 잘 가르쳐 주게. 음성이 제대로 트레이닝을 시킬 수 있는 병원이 아니라는 것은 자네가 더 잘 알잖아. 특히 나처럼 자만하지 않도록 말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끊네.”

갑자기 가슴이 북받쳐 오른 이준영 과장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공연히 전화를 했다는 생각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뒤엉켰다. 왠지 술을 한잔하고 싶은 날이었다.

이혁민 교수도 묘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길게 통화를 하는 분도 아니었는데, 확실히 변하셨어. 목소리도 한결 좋아지셨네.”

10년 동안 기다리던 일이었다. 다시는 서울 병원으로 복귀하지는 못하겠지만, 외과 의사로서의 이준영은 반드시 보고 싶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그렇게 바라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신상민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야겠어. 얼마나 기뻐하실까? 오래간만에 찾아 뵙고, 술이나 한 잔 대접해야겠네.’

가벼운 흥분과 기쁨에 전화기를 들던 이혁민 교수가 한동안 다이얼을 누르지 못했다. 김지훈이 떠오른 것이다.

“과장님과 김지훈 사이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10년이나 음성에서 있었던 이준영 과장의 말이었다. 무언가 착각했거나 오해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준영 선생님은 절대 허튼소리를 할 양반이 아니니까 일단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

이혁민 교수가 신상민 과장과 약속을 잡았다.

신상민 과장이 뛸 듯이 좋아하며 당장 만나자고 했다.

들뜬 마음으로 기분 좋게 술자리를 시작했다.

이준영 과장이 한 말을 전하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신상민 과장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같은 생각일세. 금경태 과장은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야. 출세와 돈에 유난히 집착한다는 생각이 들어. 10년 전에도 한두 달만 더 기다려 주었다면 이준영 선생의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이야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일이지만, 당시 금경태 과장이 재단을 상대로 여러 가지 수를 쓴 것으로 알고 있네. 자네가 마침 단기 해외 연수 중이라 다행이었어. 만일 병원에 있었다면 금경태 과장과 부딪쳤을 테고, 결국 자네도 다쳤겠지.”

이혁민 교수의 눈치가 이상해졌다.

“그럼 김지훈을 지키라는 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눈가를 좁힌 신상민 교수가 다짐부터 받았다.

“자네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네만, 절대 발설하면 안 되네. 확실한 사실도 아닐뿐더러 신동석 이사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는 문제야.”

“알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장례식장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신상민 과장이, 자신이 의심하고 있던 일들을 설명했다.

이혁민 교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들은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확실하지 않다고 했지만, 신상민 과장 역시 절대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 이준영 과장의 일은 이해라도 할 수 있었다. 수단과 방법이 비열해서 그렇지, 대등한 위치에서 틈을 보인 상대를 짓누르는 일은 어디에서나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지훈의 경우는 달랐다.

장례식장과 사설 구급대와의 유착은 잘잘못이 명백한 문제였다. 금경태 과장 자신의 입으로 김지훈에게 상이라도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이 장례식장 문제의 당사자였어? 그것도 모르고 김지훈이 문제를 제기했다고 말을 했다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자신과 일반 외과 구성원들을 모두 속였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김지훈에 대한 미안함에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압도적인 위치에서 힘없는 전공의의 인생을 짓밟으려 할 정도로 치졸한 인간이었나!

그것도 모르고 맞장구를 쳤단 말인가!

이혁민 교수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반드시 진실을 알아내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의사에게는 높은 도덕성과 좋은 품성이 필요하다고 여겨 왔다. 스스로 노력해 왔고, 후배들과 제자들에게도 이를 강조했다. 그런데 정작 가장 기대를 하고 아낄 수밖에 없었던 김지훈을 지켜 주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경솔함이 아니었다면 김지훈이 음성으로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동안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이혁민 교수가 눈빛을 굳혔다.

“선생님, 저도 이제 변해야겠습니다.”

신상민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경태 과장처럼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은 확실히 문제였다. 하지만 이혁민 교수처럼 환자의 진료와 전공의들의 교육 이외에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는 것 또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병원 내에서만 통하는 조그만 권력과 돈만을 좇는 의사들로 인해 가슴이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 자네도 이젠 주변에 어떤 의사들이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그래야 연못을 온통 흙탕물로 만들 미꾸라지를 막을 것이 아닌가?’

그날 밤이 깊도록 술자리는 끝나지 않았다.

***

어찌 보면 반복적인 일상이었다.

환자가 입원하고, 그중 일부는 수술을 하고 필요한 기록을 하다 보면 어느새 퇴원을 했다. 하지만 김지훈에게는 매일매일이 새로웠다.

환자마다 특징이나 병원에 온 이유가 다 달랐다.

수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는 눈에 훤히 익었을 아뻬 수술조차도 볼 때마다 가벼운 흥분과 설렘을 느꼈다. 이준영 과장의 손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수술이 끝나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멋있다. 정말 손이 빠르시다. 이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노력하고,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할까?’

오늘도 어김없이 마무리를 하던 김지훈이 내심 감탄을 터뜨리며 부러운 눈으로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쓱쓱쓱!

5센티미터 정도 되는 절개 창은 다섯 바늘이면 끝났다.

환자를 깨우던 김진호가 소리를 질렀다.

“야, 김지훈.”

“예? 왜 그러세요, 과장님.”

“배 좀 천천히 닫아. 환자 아직 눈도 못 떴다. 자식이, 무슨 배를 이렇게 빨리 닫아.”

김지훈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했다.

“에이! 과장님, 바짝 마른 몸이라 케이스가 좋고, 상처도 조그맣잖아요.”

“지훈아, 내가 본 아뻬가 몇 개인 줄이나 알아? 너보다 수백 배는 더 봤어. 1년차에 맞게 꿰매면 안 되냐? 원! 마취과 3년 동안 너 같은 놈 처음 본다.”

김진호가 투덜거리며 마취를 끝냈다. 그러고 보니 함께 들어온 서도훈은 물론 미스터 최까지 놀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선생님, 정말 손이 빠르시네요.”

서도훈의 말에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자신이 이준영 과장을 보며 놀라듯 후배도 자신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외과 의사에겐 경험이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도훈아, 인턴의 눈에는 당연히 그렇게 보이지 않겠냐? 너도 만일 내년에 외과 하게 되면 똑같은 소릴 들을걸?”

“그럼 김진호 선생님은요?”

그런가?

김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마취과잖아.”

“그래. 나 마취과다, 인마. 그렇다고 보는 눈도 없는 줄 알아? 이 자식이 이준영 과장님한테 덜 타더니 요새 점점 기어오르네. 집합 한번 해?”

“앗!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도훈아, 환자 옮기자.”

김지훈이 딴청을 부리자 김진호가 크게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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