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새로운 시작 (1)
꽤 두툼했다.
“의국비다.”
“예? 의국비요?”
“열심히 했다고 원장님이 주신 거니까, 인턴들과 써.”
봉투를 받아 든 김지훈이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두툼한 것이 100만 원은 되어 보였다.
각 병원은 자체 회식도 하고,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라고 전공의들에게 의국비를 주었다. 사실 모든 의국이 복사용 용지부터 시작해서 필요한 공용 물품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의국이 병원에서 주는 돈으로는 부족해 사비를 써야 했다. 하지만 음성은 김지훈 단 한 명뿐이었다. 1년차에게는 볼펜만 있으면 될 정도로 필요한 물품도 없었다. 더구나 100일 당직이라 오프도 없어서 회식을 할 수도 없었다.
사실상 돈이 필요한 일이 없는 것이다.
“과장님, 저 100일 당직이고, 필요한 물품도 거의 없습니다. 인턴들만 챙기면 되는데, 돈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인턴들한테 다 써. 빨리 올라가서 회진 준비나 해.”
참 간단명료했다.
손을 휘휘 젓는 이준영 과장을 보며 병동으로 올라가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에휴! 그래, 인턴 이 자식들한테 다 쓰자. 돼지고기보다는 소고기가 낫지. 쩝! 부럽다. 나도 소고기 먹고 싶은데.’
곧 오후 회진이 끝났고, 모두들 퇴근하거나, 당직들은 구내식당으로 행했다. 그때 김진호가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김진호 선생님이 이 시간에 날 왜 찾지?”
수술실에 들어서자 김대성이 함께 있었다.
김대성과는 원래 학교 때부터 친했고, 김진호도 자주 본 데다 항상 잘해 줘 이제는 꽤 친해졌다.
“안녕하세요, 마취과 과장님, 정형외과 과장님.”
김지훈의 넉살에 김대성이 크게 웃었다.
“자식, 감히 4년차에게 농담까지 하고, 많이 컸네. 이리 와 앉아, 인마.”
“예, 과장님. 근데 왜 찾으셨어요?”
“응, 별건 아니고, 의국비 받았지? 오늘 인턴들하고 밥 먹고 들어와. 좋은 거 먹어라.”
“예? 선생님, 저 100일 당직인데요. 그리고 인턴들까지 다 나가면 응급실은 누가 봐요?”
“다 얘기 됐으니까 걱정 말고 4시까지만 들어와. 100일 당직인 건 맞지만, 우리가 내리는 오더야. 그러니까 딴말 말고 맛있는 거나 먹어. 그리고 이준영 과장님께 잘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저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과장님이 뭐라고 하세요?”
“뭐라고 하긴, 그 양반이 얼마나 무뚝뚝한지 너도 잘 알잖아. 근데 의국비 줘야 된다고 원장님께 직접 말씀하셨단다. 50만 원 받았지?”
김지훈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100만 원인데요.”
“100만 원? 뭐야, 그럼 이준영 과장님이 50만 원을 보탰단 말이네. 야하! 김지훈 이 자식은 어디를 가나 귀염을 받네. 비결이 뭐냐? 나도 좀 알자.”
김대성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이준영 과장의 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수술실에서 그렇게 태우고 항상 무뚝뚝하기만 했지만, 김지훈도 조금은 이준영 과장의 마음을 알아 가고 있었다.
이혁민 교수 같은 방식도 있지만, 이준영 과장은 또 다른 방법으로 김지훈을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모든 병원의 스태프들은 교육과 수련을 담당하기에 전공의들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중 몇이나 정말 마음을 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문득 이혁민 교수가 생각났다. 암담하기만 했던 음성에서 일반 외과에 대해 배우는 것도 모자라 그런 존재가 한 명 더 생길지도 몰랐다.
가만히 하얀 봉투를 내려다보던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급히 김진호에게 인사를 하고는 외래로 달려갔다.
모두들 이미 퇴근해 진료실에는 냉기만 흘렀지만 가슴은 따뜻하기만 했다. 김지훈이 미친놈처럼 진료실에 놓인 명패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일반 외과 1년차라는 사실을 가슴으로 느꼈다.
젊음은 이래서 좋다.
응급실로 간 김지훈이 인턴들에게 회식을 통보하자 환호성이 터졌다. 방금 전까지 감정에 빠졌던 김지훈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후배들을 보며 주먹을 흔들었다.
“선생님, 정말 소고기 먹는 겁니까?”
“그럼! 자식들, 돼지 먹을 일 있어? 가만, 총무과 최 과장님 퇴근하기 전에 어디가 맛있는지 물어봐야겠다. 빨리 나가자.”
우르르 당직실을 빠져나오자 김대성이 손을 흔들었다.
4시까지 응급실을 커버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모두들 꾸벅 인사를 하고 부리나케 총무과로 향했다.
막 퇴근하려던 최치수 과장이 식당 이름을 알려 주었다.
“택시 타고 가면 20분 정도 걸립니다. 4시까지 들어오셔야 한다면서요. 벌써 1시가 넘었습니다. 빨리들 다녀오세요.”
왜 좋아하는지 몰라도, 최치수 과장이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부랴부랴 숙소에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막 나오려는 순간, 방송이 나왔다.
“오늘따라 찾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시간도 없구만.”
투덜거리며 전화를 받은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고경아였다.
“정말 여기 와 있어요?”
(네, 병원 로비예요.)
“나 100일 당직인 거 잘 알잖아요?”
(알아요. 전해 줄 게 있어서 왔어요. 잠깐이면 돼요.)
고경아가 무턱대고 병원으로 찾아오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허겁지겁 로비에 내려온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도진과 서도훈이 웃으며 고경아와 반갑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호석과도 이미 인사를 나눈 것 같았다.
“어? 니들이 경아 씨를 어떻게 알아?”
“에이! 선생님, 청평에서 봤잖아요.”
너무 당황스러워 전에 봤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 그렇지. 경아 씨,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맛있는 거라도 챙겨 주고 싶어서 왔어요. 이거 받으세요. 전 갈게요.”
엉? 간다고?
김지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인턴들이 난리가 났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냥 가냐며 고경아를 붙잡았다.
“형수님, 마침 지금 우리도 회식이거든요. 같이 가요. 선생님, 설마 달랑 돈 몇만 원 주고 둘만 따로 가실 생각은 아니시죠?”
그럼 그렇지. 만에 하나 따로 가게 된다면 마음껏 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었다. 소고기에 눈이 팔렸던 것이다.
김지훈이 피식 웃으며 고경아를 보았다.
어떻게 딱 이런 날에 맞춰 왔단 말인가!
그것도 시간까지 정확하게 맞췄으니, 정말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보고도 싶었다.
“경아 씨, 괜찮으면 같이 가죠. 어차피 이놈들이 떨어지지는 않을 거고, 내가 회식도 시켜 줘야 하거든요.”
“아니에요. 선생님들끼리 드시는데 괜히 제가 끼면 분위기만 이상해질 텐데요.”
서도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수님, 그런 말씀 마세요. 같이 가면 우리가 더 좋죠. 지금 바로 가시면 나중에 우리 죽을지도 몰라요. 김지훈 선생님, 주먹 좀 보세요. 힘은 또 얼마나 센데.”
“자식이, 내가 니들을 언제 때렸어? 경아 씨, 불편해할 거 없어요. 같이 갑시다.”
고경아가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도진이 주먹을 흔들며 외쳤다.
“오늘, 정원 가든의 소고기 바닥을 내자. 가자.”
김지훈과 고경아, 그리고 인턴 셋이 병원을 나섰다.
역시 소고기는 맛있었다.
의국비라고는 하지만, 다른 데 쓸 일도 없어서 양껏 시켰다.
아쉽다면 술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주말 오프인 서도진이 어차피 집에 갔다 오기는 글렀다면서 혼자 소주를 물처럼 들이켰다. 김지훈이 입맛만 다시며 맥주 한 잔으로 갈증을 달랬다.
먹고 마시며 떠드는 사이, 어느새 시곗바늘이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병원으로 돌아갈 시간을 고려하면 곧 일어나야 했다. 문득 전해 줄 것이 있다는 고경아의 말이 생각난 김지훈이 물었다.
“근데 전해 줄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고경아가 웃으며 보자기를 풀었다.
김밥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다른 거는 일하면서 드시기 불편할 것 같아서, 김밥 조금 싸 왔어요.”
김밥을 본 후배들의 눈이 빛났다.
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손을 뻗고 있었다.
“어허! 건드리지 마. 이건 나만 먹을 거야.”
“선생님,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 더 맛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지난날의 정이 있지, 설마 치사하게 혼자 드시진 않으실 거죠?”
“치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림도 없어, 이 자식들아.”
아우성과 웃음이 터졌다.
소고기로 채운 배는 어디로 갔는지 김밥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남은 김밥을 먹었다.
김밥이 사라지는 사이 30분이 더 흘렀다.
터미널에 들렀다 병원으로 가기에도 시간이 빠듯했다.
부랴부랴 계산을 하고 마침 와 있던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잠깐 택시에서 내린 김지훈이 고경아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미안해요, 경아 씨.”
“아니에요. 잠깐 들렀다 가려고 온 건데, 2시간이나 봤잖아요. 정말 즐거웠어요. 지훈 씨, 몸조심하시고 식사 잘 하세요. 그럼 전 갈게요.”
아쉽고 미안해서 고경아가 안 보일 때까지 서 있던 김지훈이 택시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암담했는데, 지금은 도리어 더 많은 걸 배우고 있네. 1년차 때는 생각도 하지 못할 퍼스트를 당연하게 서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비장까지 제거해 보다니 일석이가 알면 부러워 죽으려고 하겠지?’
고경아를 떠올리자 은근히 벅찬 가슴이 더욱 따뜻해졌다.
한강 공원에서 함께 먹었던 김밥과 그때 시작된 정훈철과의 인연이 생각났다. 음성에는 이준영 과장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처럼 운 좋은 놈도 없네.’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다. 10분 늦었다.
환자를 보고 있던 김대성이 눈을 부라렸다.
“100일 당직이라고 안 간다던 놈이 늦어?”
“죄송합니다, 과장님. 인턴 선생들, 뭐 하니. 빨리 가운으로 갈아입고 환자 봐.”
서도훈과 안호석이 급히 당직실로 들어갔고, 술에 취한 서도진은 비틀거리며 숙소로 올라갔다.
김대성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뭐 먹었어?”
“소고기요.”
“맛있었겠다. 빈손으로 오다니, 치사한 놈.”
“싸 올 걸 그랬나요? 죄송합니다.”
“됐다. 아까 그 여자는 누구야. 애인이야? 그런데 이상하게 낯이 익더라. 내가 어디서 봤나?”
‘어? 설마 서울 수술실에서 얼굴을 보셨나?’
당황한 김지훈이 얼버무렸다.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저도 본 지 얼마 안 되는데 선생님이 어떻게 보셨겠어요.”
“그치. 그런데 진짜 어디선가 본 것 같아. 희한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대성을 뒤로한 김지훈이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
이준영 과장이 한참을 망설이다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몇 년이 지났지만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 교수, 나 이준영이야.”
(예? 이준영 선생님?)
이혁민 교수의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울렸다.
“그래, 별일 없었고.”
(예. 선생님도 별일 없으셨습니까?)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목소리까지 떨렸다.
“한 가지만 묻자. 김지훈이 왜 음성으로 보낸 거야?”
원래 조금은 무뚝뚝했지만, 10년 전의 일 이후 말이 더 없어진 이준영 과장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이혁민 교수가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대충 전해 들으셨겠지만, 재단과 혁신 위원회에서 음성 병원을 다시 세워 보겠다고…….)
“이 교수, 그 얘기는 들었고, 금 과장이 뭐라고 했어?”
(과장님이요? 설명하기 복잡한데 간단히 말씀드리면, 음성 병원으로의 파견이 3개월이라 트레이닝에 문제가 안 생길 정도로 뛰어난 놈을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수도 같은 생각이야?”
이혁민 교수가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솔직히 예전의 선생님이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제 입장에서는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화를 주시다니, 이젠 이겨 내신 겁니까?)
“그 문제는 됐고, 결국 금 과장이 보낸 거지?”
(따지고 보면 그런 셈입니다.)
이준영 과장이 눈가를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