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엉뚱한 소문 (2)
잠시 후, 흉부외과 3년차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 손상은 신경 쓰지 말고, 바이탈하고 호흡 유지에만 집중해. 그리고 폐렴 오면 순식간에 나빠질 수 있으니까 일단 항생제 때려 넣어.)
“안 그래도 다친 부위가 많아 삼중 요법(세 종류의 항생제를 투여하는 치료)으로 시작했습니다.”
(잘했어. 수고해. 일반 외과 환자도 좀 보고.)
소문이 잘못 나도 단단히 잘못 난 모양이었다.
‘소문이 어떻게 나든 무슨 상관이야.’
박경미가 언제 중환자실을 벗어날지 몰랐다.
입원 환자와 응급실까지 생각하면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야간 응급 수술이 뜨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경미에게 매달려야 했기 때문에 잠을 잘 시간조차 부족했다.
박경미가 받은 손상은 육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의식이 돌아오자 극심한 정신적 충격이 되살아나며 공포와 불안을 야기했다. 모든 것이 불안해, 자발적 호흡이 완전히 돌아왔지만 인공호흡기를 제거할 수가 없었다.
결국 천안 정신과에 연락해 한참 동안 상의를 해야 했다.
(어차피 불안해서 호흡기를 제거하지 못할 정도면 일단 재워. 수면 부족과 중환자실 환경이 상태를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아. 아니다. 음성에서 볼 환자가 아닌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전원을 시켜. 그게 가장 좋을 것 같다.)
맞는 말이었다. 김지훈과 음성 병원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였다. 특히 정신과적인 문제는 과를 막론하고 모든 의사들에게 벅차고 어려운 분야였다.
노티를 받은 이준영 과장이 보호자를 만났다.
상세하게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전원의 필요성을 말했다.
“그럼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합니까?”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보았다.
“천안의 정신과와 통화를 했다고 했지?”
“예, 과장님.”
“지금은 모든 것이 불안해, 환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 김지훈 선생이 천안 병원과 충분히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데, 그리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지역 병원에서 환자를 간호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보호자들이 망설였다. 이준영 과장이 가급적 빠른 결정을 원한다는 말을 하고는 외래로 돌아갔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외래 환자도 상당히 늘어나고 있어서 이준영 과장도 한가로울 틈이 없었다.
박경미의 아버지가 김지훈을 찾았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천안 병원으로 가도 괜찮겠습니까?”
“저희 병원에서 치료하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게 회복되실 겁니다. 환자와 관련된 모든 과가 다 있으니까요.”
보호자가 잠시 뜸을 들였다.
“실례지만, 환자는 병원이 아니라 의사가 치료하지 않습니까. 지난 사흘 동안 우리 아이 때문에 중환자실에서 꼬박 밤을 새우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처럼 진정으로 환자를 보시는 분이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아니면 충주나 청주를 놔두고 굳이 천안 병원으로 갈 이유가 없습니다.”
보호자가 보내는 신뢰가 이렇게 가슴 벅찬 일일 줄은 몰랐다. 가볍게 상기된 얼굴로 김지훈이 신중하게 답을 했다.
‘경석이 형하고, 창수 형, 성민이라면 누가 맡든 환자를 열심히 봐줄 거야.’
“저보다 열심히 환자를 보는 선생님들이 정말 많이 계십니다. 믿고 가셨으면 합니다.”
잠시 김지훈을 보던 보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영 과장에게 보호자의 결정을 노티 한 후 응급실 근무인 서도진을 찾았다. 밤새 수술을 하며 같이 고생한 만큼 보다 신경을 쓸 것이라 믿었다.
“도진아, 칼에 찔려 수술한 환자 천안 병원으로 갈 거야. 상태가 불안정하니까 이송할 때 같이 갔다 와. 호흡이 불안정해질지 모르니까, 앰부(호흡 보조를 위한 공기주머니) 꼭 챙기고.”
“예? 그럼 응급실은요?”
“내가 봐줄게.”
서도진의 등을 두드린 김지훈은 천안 병원에 전화를 했다.
응급실 당직인 이경석이 받았다.
“경석이 형, 저예요.”
(김지훈? 야! 잘 살고 있지? 힘들지는 않고?)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환자를 한 명 보내려구요.”
(환자? 지금도 난리가 아닌데, 이젠 너까지 우릴 죽이는구나. 무슨 환자야?)
환자에 대해 들은 이경석이 혀를 찼다.
(우리 과 환자라고 말하기도 애매모호하네. 4년차 선생님과 상의해서 어느 과에 입원시킬지 결정할 테니까, 일단 보내.)
“감사합니다, 형. 신경 써서 잘 봐줘요.”
(환자 기록이나 잘 써서… 아니다, 네가 대충 할 놈이 아니지. 근데 너도 참 대단하다. 우리 과 환자도 거의 없다는데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이과, 저과 다 걸렸는데 수술하기 전에 보냈어야지.)
“그게 환자한테도 좋았을 텐데, 그럴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우리 과 환자 없다고 누가 그래요?”
(맨날 다른 과 문제로 전공의들에게 전화해서 물어본다고 소문 쫙 났어. 빨리 끝내고 와라. 우리 과 환자 봐야지.)
사실 그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다른 과 문제로 전화를 하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서울과 천안에 이렇게까지 엉뚱한 소문이 퍼질 줄은 몰랐다.
‘다들 뭘 모르네. 난 퍼스트를 서요. 거기다 메이저 수술까지 벌써 몇 개를 했는데, 우리 과 환자가 없다고 그러시나. 기분 나쁘네.’
은근히 부아가 난 김지훈이 입을 열려다 말고 고개를 흔들었다. 하마터면 비장 수술까지 해 봤다고 말할 뻔했다. 이준영 과장의 창백했던 얼굴을 생각하면 비밀로 하라는 김진호의 말이 백번 지당했다.
더구나 이경석도 심각한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잡아먹느니 그 시간에 잠이라도 자는 것이 나았다.
몇 마디의 안부를 전하고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부랴부랴 박경미의 전원을 준비했다. 인투베이션을 유지한 채 가야 하기 때문에 준비할 것이 많았다.
주렁주렁 수액 줄을 매단 채 가쁜 호흡을 유지하고 있는 박경미가 앰뷸런스로 옮겨졌다. 서도진에게 잘 보라는 당부를 하고 보호자와 인사를 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박경미의 아버지가 조용히 손에 봉투 하나를 쥐어 줬다.
“우리 딸 살려 줘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같이 고생하신 분들과 함께 식사라도 한 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미처 돌려줄 새도 없이 박경미의 아버지가 차에 올라탔다. 천안으로 향하는 앰뷸런스가 병원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던 김지훈이 돌아서다 말고 깜짝 놀랐다.
“잘 보냈지?”
“예, 과장님.”
이준영 과장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박경미 같은 환자까지 수술하게 될 줄은 몰랐다.
김지훈을 바라보는 눈빛이 묘했다.
***
5주가 지났다.
정식으로 1년차 근무를 시작한 지는 딱 4주가 지났다.
그사이 음성 병원에 믿기 힘든 변화가 일어났다. 박경미를 살린 게 온 동네에 퍼지면서 별의별 소문이 다 났다. 그 때문인지 환자들이 점점 늘어났다.
밤새 응급실이 팡팡 돌아갔다.
삼겹살 봉합 시험을 무사히 넘겼지만, 인턴들은 아직도 김지훈의 매서운 눈길 아래서 수처를 해야 했다. 하지만 자잘한 술기들은 물론 웬만한 오더까지 척척 알아서 냈다.
응급실에 국한된 일이었지만, 그 덕에 김지훈의 일이 상당히 줄었다. 반대로 병실 일은 정말 많이 늘었다.
외래를 통한 입원까지 많아졌고, 덩달아 거의 매일 벌어질 정도로 수술이 늘었다. 특히 그동안 내과에서 의뢰한 환자들을 보지 않았던 이준영 과장이 협진을 시작했다.
덕분에 제법 큰 수술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은 벌어졌고, 김지훈의 입은 점점 크게 찢어졌다. 타지만 않으면 정말 최상이겠지만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준영 과장이 아니라 김지훈이 문제였다.
트레이닝 때 1년차들에게는 퍼스트 어시스트 자리조차 함부로 주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어떤 수술이든 충분히 경험하고 숙지하지 않으면 수술 진행에 도리어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김지훈도 이젠 새벽 6시 전에 회진 겸 드레싱을 시작해야 했다. 인턴들이 환자 리스트를 챙겨 주지 않았다면 30분은 더 일찍 일어나야 했을 것이다.
이준영 과장과 회진을 돌고, 추가 오더를 낸 후 수술에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 있었다. 밤에 응급 수술이라도 뜨면 날밤을 새야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어젯밤도 응급 수술이 있어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녹초가 된 김지훈이 잠깐 스테이션에 앉아 숨을 돌렸다.
‘이렇게 힘든 거라면 얼마든지 힘들어도 좋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과장님에게도 덜 탈 수 있겠어.’
지난 밤 벌어진 수술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타는 횟수가 줄었다. 단지 그 사실이 기쁜 것이 아니라 손이 따라가고 있었다. 어제는 이상하게 손이 너무 잘 맞아 이준영 과장이 좀 놀라는 눈치까지 보였다.
피곤에 찌들어 의자에 앉기만 하면 잠이 몰려왔지만, 그것까지도 기뻤다. 일반 외과에 대해 배우는 게 이렇게 즐겁고 흥분될지는 몰랐다. 수술은 그야말로 흥분 그 자체였다.
웃음을 감추지 못했던 김지훈이 회진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는 토요일의 여유로움이 반가웠다.
이준영 과장과 회진을 돌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왔을 때 3층이 시끌벅적해졌다.
“수간호사, 왜 이렇게 시끄러워?”
“과장님, 병실 늘리잖아요.”
간호사의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왜긴요? 과장님하고 김지훈 선생님 때문이죠. 외과 환자만 평균 40명이 넘어요. 그것뿐인 줄 아세요? 내과하고 정형외과 환자도 꽤 늘었어요. 이제는 병실이 부족하다니까요.”
이준영 과장이 피식 웃었다.
처음이었다면 놀랐겠지만, 김지훈도 이젠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갑자기 웃음이 는 것이다.
“밥값은 해야지.”
“어머! 밥값이요? 과장님, 우리 일이 얼마나 늘었는지 정말 모르세요? 외과 입원 환자 중 수술 환자만 20명은 될 거예요. 일이 보통 많은 줄 아세요?”
“그럼 수술하지 마?”
단번에 묵직한 무뚝뚝함으로 수간호사의 입을 막은 이준영 과장이 외래로 내려갔다. 홀로 남은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간호사들이 여전히 새침을 떨었다.
“그래도 선생님은 나으세요. 환자들이 선생님 주라고 음료수 같은 걸 얼마나 가져다주는지 냉장고가 넘쳐 난다니까요. 그러면 과장님은 최소한 밥은 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 모릅니다. 과장님한테 밥 사 달라고 직접 말하세요.”
“어머머!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무서운데 과장님한테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해요? 김지훈 선생님은 할 수 있어요?”
김지훈이 천장을 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못하지. 잘못 말하면 주먹이 날아올 분위기는 여전하잖아. 나도 간호사들 마음이 이해가 되네요. 수술실 생각만 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니까요. 어제처럼만 할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병실로 가자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병원 전체 회식한다는 소문 들었어?”
“정말?”
“총무과에서 나온 말이니까 거의 확실해. 환자가 없어서 폐쇄했던 병실까지 다시 늘릴 정돈데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수 선생님, 제 말이 맞죠?”
수간호사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먹는 거라면! 회식은 곧 할 거고, 우리 인원도 늘릴지 몰라. 지금 인원으로는 늘린 병실을 어떻게 감당하니. 다들 후배 들어와서 좋겠다.”
때아닌 환호성이 터졌다.
병실에서 돌아온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신이 난 간호사들을 보며 차트를 모았다. 일반 외과 환자만 20명이 넘었다. 그중 지난주에 수술한 환자만 10명이었다.
그렇게 원했던 일이 한 달이 조금 지나 이루어진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상태를 신중하게 기록하고, 수술 과정과 방법을 상기했다. 때론 책을 통해, 때론 서울에서 가져온 기록들을 살피며 차곡차곡 정리했다.
이제는 독학이 아니었다.
수술실에서는 물론 회진 중에도 이준영 과장이 핵심을 찔러 주고 있었다. 선배의 경험은 이론 못지않게 중요했다.
‘맞아. 담낭을 절제할 때, 그 환자의 경우에는 과장님 말씀대로 했어야 했어. 책은 원칙이고, 경험은 응용인가? 야! 이러다 암 수술도 퍼스트를 서 보는 거 아냐? 아니지, 지금은 더 배워야 돼.’
지난 일주일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런데 토요일 오후 회진을 돌아야 할 시간에 이준영 과장이 외래로 내려오라는 연락을 했다.
“과장님, 부르셨습니까?”
힐끗 김지훈을 본 이준영 과장이 하얀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