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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7화 (127/1,329)

제4화 엉뚱한 소문 (1)

김지훈에게 의견을 구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이런 습관은 없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보호자들에겐 흉부외과 전문의가 없어 문제라고 말했지만, 흉부 수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준영 과장이 수련을 받을 당시에는 흉부외과 의사가 상당히 드문 시기였다. 그 덕에 흉부외과 수술은 물론 심한 경우 신경외과 수술까지도 일반 외과 의사가 집도했던 시절이 있었다.

김지훈이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런데 잠깐 머뭇거리던 김지훈이 간호사를 불렀다.

“왼쪽 흉부 도관에 연결된 병 좀 봅시다.”

간호사가 소독된 천 밑에 있는 플라스틱 병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지금도 밝은 선홍색이 아니라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양은 많지 않았지만 여전히 피가 나온다는 사실이 꺼림칙했고, 색깔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과장님, 도관을 따라 흐르는 피로 봐서 정맥에 손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이준영 과장이 놀란 표정으로 직접 피 색깔을 확인했다.

‘이놈 봐라. 나도 놓친 것을 보고 있었네.’

그 와중에도 이런 점을 보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아주 오래전의 경험이긴 했지만, 예전에 보았던 1년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지훈만큼 열심히 한다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물론 그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이긴 했다.

그런데 그 생각에 하나를 더 더해야 했다.

생각을 해 보니, 순간적으로 지나쳤던 일들이었지만 누구보다도 환자에 대한 열의가 넘쳤다.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심하게 살펴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집어냈었다.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놈이었나?’

잠시 김지훈을 보던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흔들며 수술에 집중했다. 남은 부위는 복부였다. 혈복강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겼지만 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준영 과장이 과감하게 배를 열며 물었다.

“복부 자상일 때는 어디를 열어?”

“자상은 건드리지 않고, 정중앙을 절개합니다.”

“왜?”

“칼에 찔린 상처에 이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부 장기의 손상이 의심된다면 어차피 정중앙을 열어야 하는데, 자상을 건드린다면 쓸데없는 상처나 감염만 더 유발하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이준영 과장이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수술을 진행했다.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자신 있게 손을 놀리던 이준영 과장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식은땀을 흘리진 않았지만,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메스를 들고 환자의 배를 바라보던 이준영 과장이 마스크가 불룩해질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장 폐쇄 환자를 수술했을 때의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수술용 가위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 김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과장님, 괜찮으십니까?”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이 1년차였을 때의 모습과 김지훈의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

스승이 아니었다면, 음성이라 한들 지금 이 자리에 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 난 김지훈에게 스승이다. 절대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스승이다.’

회피하기엔 늦었다. 또다시 김지훈에게 칼을 넘길 수도 없었다.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결심한 지 이틀도 되지 않았다. 혈복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지만 결코 물러날 수는 없었다.

‘집도식 때 받은 메스에 담긴 의미를 기억하자. 어머니도 내가 이렇게 살기를 바라진 않으실 거야. 난 외과 의사다. 여기서 또 무너지면 다신 일어나지 못한다.’

수술복 주머니에 든 케이스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굳어 가던 손이 움직였다.

이준영 과장이 과감하게 복막을 절개했다.

시뻘건 피는 보이지 않았지만, 안도의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비록 3개월의 인연에 불과하지만, 스승으로서 보여야 할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감하고도 자신 있는 손길로 내부의 장기를 섬세하게 다뤘다. 소장 네 곳에서 칼에 의한 손상을 확인했다.

이준영 과장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김지훈, 똑바로 해. 장 꿰매는 거 본 지 이틀도 안 됐어.”

터진 장을 봉합하는 내내 김지훈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동안 숱하게 혼이 났고, 일천하나마 경험도 쌓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준영 과장의 성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때쯤 장 봉합이 끝났다.

그때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렸다.

“손상 부위 확인하자. 간 확인해 봐.”

난데없는 말에 믿겨지지가 않아 다시 물었다.

“과장님, 제가요?”

“그럼 누가해? 그쪽에서 훨씬 잘 보인다는 거 몰라?”

간은 오른쪽에 있기 때문에 환자의 왼편에 선 김지훈이 훨씬 잘 볼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수술을 책임져야 하는 집도의가 확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비장을 절제할 때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이준영 과장의 의도를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김지훈이 입술에 침을 적시며 재빨리 손을 넣어 간을 확인했다. 반들반들하고 매끈한 간은 따뜻했고, 육안으로도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괜찮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직접 간을 다시 확인한 후 말했다.

“장기들의 정상적인 모습과 촉감을 절대 잊지 마. 방심하고 무시하는 순간 사고가 나기 마련이야.”

이제야 알았다.

이준영 과장은 지금 김지훈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칼에 찔려 장에 구멍이 난 것을 제외하곤 어떤 손상도 없었다. 김지훈이 슬쩍 눈길을 주자 김진호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바이탈은 안정적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거의 3시간이 지났다. 기적적으로 중요한 장기에는 손상을 하나도 입지 않았다. 마무리만 하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목에서부터 정중앙을 절개한 복부까지, 봉합해야 하는 상처가 너무 많았다. 김지훈 혼자 했다가는 두세 시간은 걸릴 정도였다.

마취 시간이 길어지면 의사는 힘들 뿐이지만 마취제의 독성 때문에 환자의 장기 기능에 손상을 줄 수 있었다. 쓸데없이 수술 시간을 연장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마무리는…….”

이준영 과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지훈이 수술대 아래를 보며 말했다.

“과장님, 피가 안 멈추는데요. 벌써 1,000시시가 넘게 나왔습니다. 가는 정맥이 아닌가 봅니다.”

“뭐?”

대부분의 정맥은 완전히 절단이 되도 자연적으로 지혈이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1,000시시가 넘을 정도로 출혈했다면 상당히 굵은 정맥이라는 의미였다.

더구나 폐 안쪽에는 정맥을 압박할 수 있는 구조물도 없기에 환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었다.

‘가슴을 열어야 하나?’

난감한 눈으로 환자를 보며 고민에 잠겼던 이준영 과장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김지훈도 똑같은 곳에 시선을 주었다.

‘설마 같은 생각을?’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너, 지금 뭘 의심하는 거야?”

“환자 좌측 쇄골 위의 자상이 좀 이상합니다. 아까 확인할 때 칼이 비스듬히 들어갔는데, 그렇다면 혹시 쇄골하 정맥과 흉강을 동시에 찢은 것은 아닐까요?”

이준영 과장의 마스크가 묘하게 찌그러졌다.

자신과 똑같은 의심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어떻게 했어?”

생각을 어떻게 하다니, 질문이 좀 이상했다. 굳이 대답을 해야 한다면 하나뿐이었다. 어쩌면 맞는 답일 수도 있었다.

“과장님 덕분입니다.”

“내 덕분?”

김지훈이 멋쩍게 웃었다.

“하도 많이 혼나서 과장님의 손이 가는 부위에는 굉장히 집중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난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답이었다. 그렇다고 아부할 성격도 아니었다. 결국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김진호 선생, 수술 길어지겠어. 간호사, 쇄골 자를 기구들 준비하고, 혈관 봉합할지도 모르니까 미리 준비해. 헤파린(응고 방지제)도 같이.”

수술이 새로운 국면으로 치달았다.

동맥이 아닌 정맥의 손상이 의심되는 덕에 다소의 여유가 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정형외과 수술 기구가 준비됐다.

자상을 따라 크게 피부를 절개한 후 쇄골의 일부를 제거했다.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마취과 간호사에게 눈짓을 해 좌측 도관에 연결된 플라스틱 병을 확인했다. 피의 양이 현저하게 줄고 있었다.

“과장님, 도관을 따라 나오는 피가 줄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준영 과장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상처를 따라 피가 흥건하게 고이고 있었지만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은근한 흥분과 함께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 이준영 과장이 쇄골하 정맥을 찾았다.

주향 방향을 따라 2센티미터 정도 찢어져 있었다.

김지훈이 혈관 수술까지 본 경험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이준영 과장이 혈관용 집게로 한쪽을 잡으며 말했다.

“반대쪽도 똑같이 잡아.”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혈관을 잡았다.

피가 멈추자 혈전 생성을 막기 위해 헤파린(혈전 용해제)을 섞은 식염수로 혈관에 남은 피를 씻어 냈다. 굵은 정맥을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실로 봉합했다.

“풀어.”

혈관용 집게를 풀자 봉합을 한 자리를 따라 미세하게 피가 새어 나왔다. 이준영 과장이 아무 말도 없이 거즈로 압박을 했다. 바늘구멍을 막는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표정이었다.

‘압박! 역시 지혈에는 가장 쉽고 좋은 방법이구나.’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수술 과정과 방법을 눈에 박고 머릿속에 각인시켜야 했다. 수술을 할 때 저절로 몸이 반응하는 것은 무척 중요했다. 수술 중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본능적으로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집도하는 의사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자세였다.

김지훈은 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

5분 후, 이준영 과장이 압박을 풀었다. 김지훈이 다시 도관과 연결된 병을 확인했다. 더 이상 나오는 피는 없었다.

“과장님, 흉부 도관에도 피가 흐르지 않습니다.”

가장 최상의 결과가 나왔다.

혈복강도 발생하지 않았고, 경부 손상 역시 중요 부위를 비켜 나갔다. 더욱이 혈흉이 의심됐지만, 가슴을 열지 않고 해결했다. 손상된 정맥도 완벽하게 복구했다.

크게 숨을 내쉰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과 함께 마지막으로 수술 부위를 꼼꼼히 살폈다.

“놓친 부위 없지?”

“예, 없는 것 같습니다.”

“김진호 선생, 바이탈은?”

“아주 좋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힐끗 시계를 보았다.

새벽 6시였다.

“닫자.”

끝없는 수처가 시작됐다.

이준영 과장은 목에 난 자상들을 봉합했고, 김지훈은 복부 절개 창부터 닫기 시작했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만 울렸다.

마침내 모든 수술이 끝났다.

무려 8시간이 걸렸다.

단 하나의 수술로 꼬박 밤을 새운 것이다.

환자는 천운처럼 치명적인 손상을 입지 않았다.

이준영 과장의 손은 과감하고도 섬세하게 움직였다.

김지훈은 1년차로 보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게 어시스트를 섰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박경미를 살려 냈다.

세컨드 어시스트를 선 서도진이 시뻘게진 눈으로 아우성을 쳤다. 주중 오프인 날에 꼬박 날밤을 새운 것도 모자라 바로 응급실 근무를 서야 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 죽었다.”

“이게 진정한 인턴의 삶이야, 인마.”

김지훈의 말에 서도진이 뒤로 넘어갔다.

수술은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비장을 절제한 환자에 이어 박경미 환자가 중환자실로 입원했다. 바이탈은 안정적이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해 인공호흡기까지 연결해야 했다.

양측 흉부에 흉부 도관을 박았다. 이 정도의 폐 손상을 입은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로 강제 호흡을 시켜도 괜찮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김지훈이 서울 병원 흉부외과 동기에게 전화를 했다.

(김지훈, 이번엔 또 뭐냐? 일반 외과 한 놈이 어떻게 일주일이 멀다 하고 전화를 해. 너, 신경외과에도 자주 전화한다며? 음성 가서 애먼 환자만 본다고 소문 쫙 났다.)

얼마 전이었으면 염장을 지르는 말이었다. 심지어 음성에도 병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커녕 음성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동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엉뚱한 소문에 김지훈이 히죽 웃었다.

“여기가 그래, 인마. 하나만 물어보자.”

환자의 상태를 들은 동기가 입을 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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