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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6화 (126/1,329)

제3화 네가 있어 도망가지 않을 수 있다 (2)

사소한 실수 하나가 사람의 목숨을 경각에 이르게 했다.

29세 여자 환자, 박경미.

1년 전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났다.

단순한 만남이었고, 사랑이라는 말은 어울리지도 않았다.

몇 번 얼굴을 본 것이 다였지만 남자는 사랑이라고 느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박경미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사랑은 집착으로 변했고, 점점 집요해졌다.

별의별 방법을 다 썼지만 남자는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피해 다니기에 급급했던 박경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확실하게 끝을 내겠다며 나간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술이 들어갔고, 말은 점점 길어졌다.

애원하고 화를 내던 남자가 결국 박경미의 차갑고 단호한 말에 승복을 했다. 깨끗하게 지난 만남을 잊기로 했다.

각자 집으로 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박경미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마지막이라고 배웅해 주겠다는 남자의 말을 믿은 것이 치명적 실수였다. 집 앞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남자가 이미 다 끝난 얘기를 다시 꺼냈다.

언성이 높아지며 둘 다 흥분을 이기지 못했다.

갈등과 분노가 극에 이르자 남자의 눈이 돌았다.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과도가 번쩍였다.

목을 찌른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박경미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비명 소리에 사람들이 달려 나왔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들이 광분하던 남자를 제압하고 나서야 소란이 멈췄다. 하지만 이미 박경미는 전신에 피가 낭자한 채 정신을 잃은 후였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박경미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

“칼에 찔린 환자입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의식은 거의 없었다.

한눈에도 촌각을 다루는 상태였다.

때마침 응급실에 있던 김지훈이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다.

“간호사, 인투베이션 준비하고 수액 라인 잡아요. 빨리.”

즉시 인투베이션을 하고 수액을 투여했다. 간호사들이 바이탈을 재는 동시에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속옷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겼다.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목부터 배까지 칼에 찔린 상처를 세기도 힘들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살아 들어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인턴 선생, 폴리 꽂고. 간호사, 모니터 연결해요.”

의사에겐 환자의 사연이 아니라 환자의 목숨이 먼저였다.

김지훈이 빠르게 환자의 상처를 살폈다.

내부 장기는 어디를 다쳐도 생명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부위를 치료할 수는 없었다.

우선순위에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배가 불러 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 혈복강일 가능성은 떨어진다. 칼이 복막을 뚫었는지만 확인하면 되니까 당장 급한 부위는 목과 가슴이다.’

목에 난 자상부터 확인했다.

기도를 비롯해 경동맥 등 목숨과 직결되는 구조물을 확인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다행히 양측 경동맥의 박동이 확실하게 촉진되었다. 신경이나 다른 혈관들의 손상은 두고 봐야 알겠지만, 주요 구조물은 모두 빗겨 나갔다.

‘치명적인 손상은 피했다. 다행이다.’

“간호사, 포터블(portable:이동식 방사선 촬영 장치)은?”

때맞춰 연락을 받은 방사선 기사가 포터블을 끌고 들어왔다. 모두 달려들어 의식을 잃어 축 늘어진 환자의 상체를 억지로 세워 흉부 사진을 찍었다.

거친 움직임에 기도에 삽입된 튜브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칼에 의해 기흉이 발생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사진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남은 상처를 일일이 확인했다. 무려 열일곱 군데에 자상이 나 있었다.

인간의 잔인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복부에 난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응당 있어야 할 근육의 저항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환자의 의식뿐만 아니라 전신 상태까지 극히 나쁘다는 말이었다.

배 속으로 쑥 들어간 손가락이 별다른 저항 없이 움직였다.

뭉클뭉클한 구조물이 만져졌다.

장이었다.

‘이런! 복막이 뚫렸네. 배는 100프로 열어야 하고. 가슴은 괜찮을까? 사람을 이렇게 만들다니, 도대체 어떤 놈이지?’

사진을 확인한 김지훈이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양측 흉부에 모두 기흉이 발생해 있었다.

복부가 뚫릴 정도로 강하게 찔렀다. 가슴을 찌른 칼에 폐가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기흉이 조금이라도 더 커진다면 그나마 붙어 있는 호흡까지 방해할 상황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간호사, 체스트 튜브 2개 준비해요.”

최대한 신속하게 양측 흉부에 흉부 도관을 삽입했다.

공기와 함께 좌측 흉부에 박은 튜브에서는 피까지 흘러나왔다. 밝은 선홍색이 아니라 검붉은 피였다. 의아한 눈으로 도관을 타고 나오는 피를 확인하던 김지훈이 모니터를 보았다. 혈압이 떨어지고 있었다.

대량으로 수액과 피를 투여해야 했다.

즉시 쇄골하 정맥에 중심 도관을 넣었다.

손상을 받은 쪽이나, 혹은 심장의 반대편인 우측에 중심 정맥 도관을 넣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경우 역시 당연히 우측에 넣어야 했다.

김지훈과 인턴들은 물론 간호사들까지 모두 달라붙었다. 모두들 땀범벅이 될 정도로 대처한 끝에 간신히 바이탈을 유지시켰다. 응급실에서 할 수 있는 처치는 다 했다. 하지만 손상된 부위가 너무 많아 오래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지훈이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이준영 과장이 도착했다.

창백한 환자의 얼굴을 본 이준영 과장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무언가를 만지며 굳은 안색으로 환자를 살폈다.

당장이라도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경부 및 흉부의 손상과 다른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냐는 것이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과연 이준영 과장이 흔들리지 않고 수술할 수 있을지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심각한 기색으로 물었다.

“김지훈, 보낼 여유가 있겠어?”

비교도 할 수 없이 경험이 적은 김지훈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김지훈이 그간 응급실에서 봤던 환자들에 대한 기억을 모두 살렸다. 비록 일천하지만 한 시간 정도의 여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동맥과 기도를 다치진 않은 것 같지만, 혈흉과 기흉이 모두 발생했습니다. 만일 혈복강까지 동반됐다면 다른 병원으로 보낼 여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CT 찍을 여유는?”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칼이 들어간 깊이에 따라 내부 장기나 동맥에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확인해야 했지만, CT 찍는 시간도 아끼는 것이 유리했다.

“만일 수술에 들어간다면 CT는 수술실에서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진까지 확인하고 난 후에 수술을 시작할 여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혈복강이 발생했을까?”

급박한 상황임에도 질문이 이어졌다.

다급하기만 했던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문득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수술할 수 있는지 결정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환자의 바이탈은 아슬아슬하게 생사의 경계선에 걸쳐져 있었다. 그러나 목과 흉부는 일반 외과 소관이 아니었다. 수술을 결정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 환자가 수술 중 사망할 수도 있었다.

“혈흉과 혈복강이 동시에 발생했다면 지금 정도의 바이탈조차 유지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동반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생각과는 달리 정말 김지훈의 의견을 듣고자 했던 것일까?

“할 수 있겠어?”

어시스트를 할 수 있냐는 말일 것이다.

일반 외과 과장인 이준영이 수술을 결정하면 전공의는 당연히 어시스트를 서야 한다. 혹시 흉부 수술 때문에 걱정이라면 구미에서 변상훈 과장과의 경험이 있었다.

그때 문득 비장 절제 수술 때 있었던 일이 기억났다.

‘또 몸이 안 좋으신가? 아닌데, 얼굴은 괜찮으신데. 날 못 믿어서 그러시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집도의는 이준영 과장이었고, 믿고 따르면 되는 일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대답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이준영 과장이 입을 꽉 다문 채 환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김지훈은 초조하게 결정을 기다렸다. 불과 이삼 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30분은 지난 것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이준영 과장이 보호자를 찾았다.

두 눈이 퉁퉁 부은 보호자들이 울며 달려왔다.

“보호자분, 환자가 목과 가슴, 배를 열일곱 곳이나 찔렸습니다. 지금 당장 수술을 해야 합니다만, 충주나 청주로 갈 여유가 없어 보입니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의하신다면 지금 바로 수술을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병원은 흉부외과가 없습니다. 이미 폐에 손상을 입었고, 출혈까지 해 최악의 경우 수술 중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다른 병원으로 가시겠다면 지금 바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보호자들 스스로는 도저히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의사들도 치료나 수술을 강제하거나 결정할 권한은 없다. 적절한 판단과 조언을 한 이상 보호자들의 결정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보호자의 마음은 누구나 똑같았다.

아무것도 못 해 보고 길거리에서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다가 죽을 바에는 차라리 수술실에서 죽는 것이 원이라도 남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 수술을 하면 살 수는 있습니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곡소리가 터졌다.

수술도 하기 전에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니, 아비 어미의 가슴이 찢어지고도 남았다. 누구도 달랠 수 없는 아픔이겠지만 울고만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준영 과장이 다시 결정해 달라는 말을 했다.

눈물범벅이 된 아버지가 수술 동의서에 지장을 찍었다.

김지훈이 수술 중, 혹은 이후에 사망할 수 있다는 글귀에 빨간 줄을 그으며 한 번 더 설명을 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들어가는 수술인데 정작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더 강조해야 하다니, 정말 힘드네.’

수술 동의서를 받는 일은 의사에게도 괴롭고 힘든 일이었다. 합병증 등을 설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불가항력적인 사고나 마취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을 반드시 설명해야 했다.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입술을 꽉 깨물며 수술실로 향했다.

환자의 목숨과 자신의 인생이 벼랑 끝으로 몰렸다.

또다시 손이 굳는다면 김지훈의 손을 빌려 수술을 끝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가운을 벗어야 할 것이다.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이준영 과장에게 있어서 이번 수술은 자신과의 전쟁이었다.

문득 창밖으로 까만 하늘이 보였다.

‘어머니!’

많은 형제들 중 유독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던 어머니였다.

자식을 원망하지도, 10년간의 고통을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가 김지훈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정과 희망을 보며 다시 일어서라고, 간절히 원하면서 말이다.

‘예, 어머니.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어금니가 부러져라 이를 악문 이준영 과장이 수술실로 들어섰다. 수술복 주머니에 은색 메스가 든 케이스를 넣으며 각오를 다졌다.

수술 준비를 모두 마친 후, 이준영 과장이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지훈, 시작하자.”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이 과도한 긴장을 풀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런 수술은 시간과의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이준영 과장이 손이 전에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기도와 경동맥 주변부터 확인했다. 상처의 폭이 작아 내부의 손상을 확인할 수 없는 상처는 추가로 절개를 했다. 응급실에서 확인한 대로 중요 구조물들은 모두 손상을 입지 않았다.

복부와 흉부를 먼저 확인해야 했기에 봉합은 뒤로 미뤄야 했다. 절개가 된 상처에 식염수로 적신 거즈를 덮어 피부와 내부 조직이 마르는 것을 방지했다.

‘휴우! 일단 한고비는 넘었다.’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모든 동작과 과정 하나하나가 외상을 입은 경우의 원칙이었다. 언제 이런 환자를 또 볼지 모르는 일이었다.

확실하게 머릿속에 박아야 했다.

“흉부 수술 들어가 봤어?”

“예, 구미에서 들어가 봤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슬쩍 눈을 치켜뜨며 김지훈을 보았다.

이 역시 인턴으로서는 경험하기 힘든 일들이었다.

‘확실히 뛰어난 놈이야. 그래! 서로 믿고 가자.’

이준영 과장이 흉부를 여는 과정을 떠올리며 물었다.

“지금 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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