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네가 있어 도망가지 않을 수 있다 (1)
바로 그때 금경태가 마지막 희망을 짓밟았다. 교묘하고도 치졸한 음해가 동료들에게 통했고, 결국 대학 병원을 떠나야 했다. 희망이 사라지고, 라이벌로 생각지도 않았던 금경태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버릴 뻔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소아과 신상민 교수와 이혁민 교수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곁을 지켜 주었다. 신상민 교수의 끈질긴 설득에 그 당시 막 재단이 인수한 음성 병원으로 향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10년으로도 부족했나?’
음성에 와서도 처음 몇 년은 피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 깰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수술대에 누운 환자를 볼 때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희망과 꿈을 잃은 사람에게 미래는 없었다.
다시 술에 빠졌고, 결국 가족들까지 떠났다.
수시로 연락을 해 온 신상민 교수와 이혁민 교수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어쩌다 연결이 되면 불같이 화를 내고 짜증을 토해 냈다.
몇 년을 그랬으니 지쳤을 것이다.
가족들도 등을 돌렸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 지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자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마지막 짐을 정리하던 도중 잊고 있었던 한 가지 물건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집도식 때 받은 은색 메스와 금빛 칼 대.
이제는 녹이 슬어 빛까지 바랬지만 그 당시 느꼈던 흥분과 자부심, 그리고 앞날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열망이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외과 의사로서의 생명을 끝낼 수는 없었다.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아뻬나 탈장 같은 마이너 수술이나 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의 수술은 칼을 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데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바로 김지훈 때문이었다.
왜 음성에 보내졌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는 못했지만, 김지훈에게 엄청난 실망과 좌절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지훈은 자신과는 달랐다.
유일한 희망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일반 외과에 대한 열정과 배움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았다. 포기라는 말은 모르는 것처럼 앞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렇게도 견고했던 죄책감과 불안이 까마득한 후배로 인해 틈을 보였다. 슬금슬금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르며 다시 외과 의사로서 살고 싶다는 강렬한 의욕이 솟구쳤다.
포기했던 써전의 삶이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 가능한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고, 한계는 여전했다. 비장 파열 환자의 배를 열고 피비린내를 맡는 순간, 그날의 악몽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대로 무너지고 마는 걸까?
또다시 회피하든지, 아니면 정면으로 부딪칠지 결정해야 할 때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조용히 서랍에 고이 간직했던 케이스를 꺼냈다. 형광등 불빛에 의해 군데군데 녹이 슨 은색 메스가 반짝였다.
‘이대로 도망치면 얼마 안 가 김지훈도, 내 자신도 잊겠지. 그러면 정말 편안해질까?’
20년도 넘은 은색 메스의 날은 무뎌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 숨은 희망과 열정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며 버리지 못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준영 과장 자신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외과 의사였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
깜빡 잠이 들었던 김지훈이 요란한 경고음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비장을 절제한 환자가 아니라 내과 환자였다. 간호사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내과 과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보호자들과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후우! 우리 환자가 아니었구나.’
5시 30분이 넘었다.
지난 밤 간호사들이 기록한 바이탈을 확인하고 있을 때 환자가 눈을 떴다. 절개한 부위가 상당히 아플 텐데도 김지훈을 보며 웃고 있었다.
“많이 아프시죠?”
“끄응! 예, 많이 아프네요.”
코 줄을 낀 환자의 목소리는 언제나 갈라지고 탁했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지금은 수술을 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통증 조절도 조심스럽네요. 지금처럼 계속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면 곧 병실로 가실 수 있으니까, 필요한 조치를 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등이 배겨 몸을 뒤척이던 환자가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참을성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내과 환자 때문에 손이 없어 김지훈이 드레싱 카를 끌고 와 혼자 드레싱을 시작했다. 절개 창을 깨끗이 소독하고 드레인을 덮었던 거즈를 열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때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때?”
깜짝 놀란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과장님! 몸은 어떠세요?”
이준영 과장이 손가락으로 거즈를 가리켰다.
“어때?”
분홍빛이 약간 섞여 있었지만, 맑으면서도 노란 체액으로 거즈 십여 장이 젖어 있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같은 게 아니라 이렇게 나오면 괜찮은 거야. 아침까지 변동 없으면 병실로 옮겨.”
“예, 과장님. 근데 몸은 어떠신지…….”
이준영 과장이 여느 때처럼 필요한 말만 했다.
“엘 튜브는 유지하고, 폴리는 빼. 이삼 일 동안은 소변량 체크하고. 장 폐쇄 환자의 아침 사진은?”
“찍으라는 오더 냈습니다.”
다행히 이준영 과장의 안색이 전과 다름이 없었다.
이준영 과장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중환자실을 나갔다.
김지훈이 수술 환자를 살피고는 재빨리 병동으로 올라갔다.
여느 때와 똑같은 근무가 시작됐다. 다만 이준영 과장의 말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드레싱을 확인하며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수술한 환자들의 상태를 말했다. 환자들에게도 이것저것 세세하게 물었다. 간호사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용히 곁에서 듣고만 있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어? 이거 전부 다 확실하게 파악해야 될 사항들이잖아?’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후끈 달아올랐다.
까마득한 일반 외과 선배의 가르침이었다.
귀를 열고 정신을 집중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중했다.
회진이 끝날 무렵 장 폐쇄 환자의 사진이 나왔다.
이준영 과장이 물었다.
“수술해야 돼, 아니면 지켜봐?”
수술을 할지 말지는 집도의의 판단이었지만 전공의들이 있다면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질문을 할 것이다. 왠지 긴장되면서도 한껏 들뜬 김지훈이 회진을 돌며 한 말을 상기했다.
“사진상 어제와 거의 변동이 없고, 환자의 장 소리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엘 튜브를 통해서도 하루 만에 700시시 정도 나왔기 때문에 수술을 해야 합니다.”
이준영 과장이 환자에게 했던 말이었다.
또한 장 폐쇄 환자의 수술 적응증이기도 했다.
“환자하고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스케줄 올려.”
“오늘 바로 하시는 겁니까?”
“뭐? 방금 전 나한테 한 말은 뭐야?”
일순 말문이 막힌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자 이준영 과장이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어후! 항상 느끼는 거지만, 말을 안 하실 때가 더 무섭네.’
급히 수술에 필요한 오더를 내는 김지훈을 보던 이준영 과장이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만지작거렸다.
빛바랜 은색 메스가 담긴 낡은 케이스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준영 과장이 수술을 끝냈다. 처음 수술을 들어온 서도훈만이 살벌하게 타는 김지훈을 보고 충격을 먹었을 뿐이었다.
어제 일로 걱정이 됐는지 김진호가 수술을 끝내고 쉬고 있는 이준영 과장을 찾았다. 한동안 낮은 목소리가 오고 갔다. 확실히 김지훈에게 말할 때와는 톤도, 느낌도 달랐다.
“김진호 선생, 고맙네.”
“아닙니다. 당연히 입단속을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다신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다행입니다. 그런데 어디가 불편하셨던 건지는…….”
“약도 소용이 없는 병이 있어. 하지만 앞으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럼 일봐.”
김진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과적인 문제라면 병이 있다는 것 자체를 숨겼을 것이다. 마음의 병이 무엇을 말하는지 애매모호하기만 했다.
서도훈이 서도진과 똑같은 말을 했다.
“선생님, 과장님 말이에요.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왜, 무슨 일 있었어?”
어라? 너무 타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서도훈 역시 동기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상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솔직히 태우는 것도 정도가 있죠.”
김지훈이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을 했다.
“도훈아, 배 열 때 안 탔잖아. 흐흐흐! 이거 점점 신나는데. 야! 그 큰 손으로 어떻게 찰떡처럼 들러붙은 장을 그렇게 정교하게 풀어 주지? 회진 돌 때 말이야. 밴드(band)가 있을 가능성이 90프로가 넘는다고 그러셨거든. 그런데 배를 열자마자 딱 보이더라구. 그걸 어떻게 아셨을까?”
대답을 하는 건지, 혼자 좋아서 감탄을 하는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서도훈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김지훈은 고민에 빠졌다.
‘밴드라고 해서 혹시나 했는데, 정말 고무줄처럼 생겼네. 그게 장을 묶고 있으니까 절대 폐쇄가 안 풀리겠지. 결국 밴드가 원인으로 의심되면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어후!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회복실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지훈이 눈을 번쩍 떴다. 평소 수술이 끝나면 바로 사라졌던 이준영 과장이 이제야 수술실에서 나가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김지훈이 용기를 내 물었다.
“과장님, 한 가지 여쭤 볼 게 있습니다.”
“뭐?”
무뚝뚝하게 날아온 말에 멈칫했지만 이왕 내친걸음이었다. 서도훈이 보기에는 살벌했지만, 전보다 덜 탔다는 사실에 기분까지 고조돼 있었다.
“밴드가 원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준영 과장이 말없이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너, 들고 다니는 책은 폼이냐?”
음! 맞는 소리였다.
괜히 물어봤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하지만 분명히 교과서나 수술 과정을 서술한 책에는 없었다.
‘에이! 자세히 가르쳐 주시면 어디 덧나나?’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돌아서던 김지훈의 입이 쫙 찢어졌다.
놀랍게도 이준영 과장이 힌트를 준 것이다.
답이 있는 책을 아는 것도 지식이었다.
“새비스톤(외과 교과서)말고, 메닌고트(복부 수술에 대한 생리와 방법 등이 모두 서술된 책)에서 찾아봐.”
하마터면 만세를 부를 뻔했다. 분명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런데 두 주먹이 천장을 찌르고 있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급히 팔을 내리는 순간, 누군가가 피식 웃은 것 같았다.
설마 이준영 과장이?
수술실을 나온 이준영 과장이 정말 웃고 있었다.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언제인지 몰랐다.
어제 그런 일을 겪고도 오늘 수술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아뻬 수술조차도 못했을 것이다. 정신적 상처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대단한 변화였다.
은색 메스가 든 케이스를 꺼내 든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떠올렸다.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워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원인 물질을 끝까지 회피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지속적인 노출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다.
정신적 충격도 마찬가지였다.
회피하거나, 정면으로 맞붙거나.
이준영 과장에게 다시 한 번 시험이 다가왔다.
밤 11시경 김지훈이 다급한 목소리로 노티를 했다.
“29세 된 여자 환자입니다. 경부와 흉부 및 복부에 입은 다수의 스탭 운드(stab wound)를 주소로 내원했습니다.”
“칼에 찔렸어? 몇 군데야?”
“열일곱 곳입니다.”
“뭐?”
노티를 하는 김지훈에게나, 받는 이준영 과장에게나 경악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어느 미친놈이 17번이나 사람을 찔렀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