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2화 (122/1,329)

제1화 음성에도 전공의와 인턴이 있다 (3)

장기 입원 환자인데, 수액 라인을 잡기가 곤란해 중심 정맥을 확보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컨설트 용지를 본 이준영 과장이 중심 정맥을 잡을 준비를 하라는 오더를 내렸다.

다른 경험이 없는 김지훈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쇄골하 정맥을 잡겠다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응급실 환자들이 늘고 중환들이 심심찮게 보여 최치수 과장에게 쇄골하 정맥용 도관을 준비해 달라고 했었다. 다행히 최치수 과장이 잊지 않고 준비를 해 놨다.

잠시 후, 준비가 다 됐다는 연락이 왔다.

2층에 있는 내과 병동으로 가 환자 앞에 선 이준영 과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간호사들이 엉뚱한 준비를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10년의 세월 때문이었다.

쇄골하 정맥을 확보하는 방법은 최근에 도입됐다.

그전까지는 상완부 근육 사이에 위치한 정맥을 잡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패할 확률도 높았다. 반면 쇄골하 정맥은 폐를 찌를 수 있는 위험은 있었지만 간편하고 실패할 확률도 적었다.

“이거 뭐야?”

의아한 눈으로 묻는 이준영 과장을 보며 김지훈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을 했다.

“말씀하신 대로 쇄골하 정맥을 잡을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대답을 하는 사이 아차 싶었다.

과에 따라서는 전공의들에게도 아직 생소한 술기였다.

음성에서 수술도 거의 하진 않았던 이준영 과장에게는 당연히 처음 접하는 방법이 분명했다.

‘어이쿠! 도관도 내가 부탁해서 가져왔는데 이걸 보셨을 리가 없잖아. 큰일 났네. 다시 준비하라고 해야 하나?’

당황한 김지훈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준영 과장이 심각한 안색으로 환자를 보다 결정을 내렸다.

“해 봐.”

경험이 있다고 해도 이제 불과 세 번째였다. 신중하게 준비를 하고 도관을 삽입했다. 다행히도 환자가 말라서인지 쉽게 쇄골하 정맥에 도관을 넣을 수 있었다.

이준영 과장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슬며시 도관 케이스 뒤에 쓰여 있는 삽입 방법을 읽으며 김지훈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원칙대로 정확하게 하고 있었다.

흉부 사진을 찍어 안전하게 들어간 도관을 확인하고 나서 이준영 과장에게 확실하게 끝났다고 보고를 했다.

그때 본 이준영 과장의 표정이란!

씁쓸하면서도 낭패스러운 모습?

김지훈이 간호사의 시선을 피하며 웃었다.

‘계속 웃으면 안 되는데. 하하하! 그래도 과장님의 표정이 자꾸 떠올라서 어쩔 수가 없네.’

이준영 과장에게 쌓인 것은 없으니 통쾌함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꾸 웃음이 나왔다. 1년차가 전문의도 모르는 술기를 했을 때의 황당함을 본 것일까?

알 수 없는 즐거움에 다소 여유까지 생겼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음성에 온 지 3주가 다 됐으니 전화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이것도 다 인턴들 덕분이라는 생각에 김지훈이 흐뭇하게 웃었다.

“경아 씨, 잘 지내죠?”

(네, 잘 지내요. 지훈 씨는요? 혼자 일하는데 얼마나 힘들까. 잠은 좀 자요?)

고경아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나야 뭐 1년찬데 힘든 게 당연한 일이죠. 그래도 인턴들이 있어서 한결 편해졌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오프는 언제 받으세요?)

“100일 당직이잖아요.”

(음성도 오프는 없는 모양이네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과를 불문하고 1년차의 첫 3개월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근무하는 고경아가 이를 모를 수는 없었다.

통화를 하는 사이 시간이 너무 늦어졌다.

정훈철과 한수임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는 말을 끝으로 아쉬운 작별을 했다.

고향 친구인 고재현의 집에 전화를 걸어 몇 분도 채 통화하기 전에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다. 서둘러 몇 마디 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서운할 테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은 어떤 일보다 환자를 우선시했고, 이는 의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철칙이었다.

토요일 오후, 약속대로 인턴 중 한 명을 오프 보냈다.

‘쩝! 마음 같아서는 보내고 싶지 않다만, 그랬다간 단체로 덤비겠지?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에휴! 더 어려운 일을 조건으로 내걸걸 그랬나?’

인턴을 평가할 능력이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삼겹살 수처만큼은 다들 충실히 했다. 부러운 눈으로 오프를 보내고, 일요일 밤 9시까지 응급실 근무를 했다.

환자가 점점 늘고 있었다.

이제는 같은 군이지만, 음성에서 꽤 떨어져 있는 금왕이라는 곳에서도 환자들이 밀려 들어왔다.

금왕!

예전에는 금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한때는 지나가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닐 정도로 돈이 넘쳐 났던 지역이었다. 이제는 금이 거의 나지 않아 쇠락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군청이 있는 음성보다 더 번화했다. 그만큼 인구도 꽤 많았다.

그 탓에 환자에 치여 병동 일도 간신히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함께 근무한 서도진이 꽤 능숙하게 환자를 보았고, 병동을 커버하는 안호석은 깔끔하고 확실하게 일을 처리했다. 믿음직한 후배들이었다.

1년차로서 가르치는 재미도 있었고, 후배들에게 배우는 것도 있었다. 자신은 생각하지도 못한 재치에 가끔은 놀라기도 했다. 환자를 대하는 의사들의 태도와 방법은 같은 것 같았지만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고 있었다.

일요일 밤 노티를 받고 응급실을 오가는 사이 주말이 지났다. 새롭게 시작되는 네 번째 주도 즐겁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랐다.

시작이 정말 좋았다.

외래를 통해 입원했던 탈장 환자를 시작으로, 응급실로 온 아뻬 환자의 수술이 이어졌다. 연이은 2개의 수술이 끝나고 새카맣게 탄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 응급실에 새로운 환자가 왔다.

“도훈아, 무슨 환자야?”

“장 폐쇄가 의심됩니다.”

“장 폐쇄?”

단순 복부 사진을 본 김지훈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공기 음영이 보이지 않아야 할 소장에 공기가 꽉 차 사진이 온통 까맣게 보일 정도였다(공기는 X-ray상 검게 나타나고, 액체는 하얗게 보인다.).

2년 전, 담낭염으로 담낭 제거술을 받은 병력이 있었다.

병력상 기능적 장 폐쇄가 아니라 기계적 장 폐쇄일 가능성이 높았다. 노티를 받고 온 이준영 과장이 입원을 지시하며 보호자에게 설명을 했다.

“장 어딘가가 심하게 막혔습니다. 복부를 여는 수술을 받은 사람에게는 종종 발생하는 질환입니다. 일단 코 줄을 꼽고 지켜보겠습니다만, 증상이나 복부 사진이 좋아지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합니다. 바로 입원하시고, 경과를 관찰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환자와 보호자가 군말 없이 입원에 동의를 했다.

김지훈이 장 폐쇄 때의 오더를 기억하려 했지만 뭔가 부족했다. 일단 기본적인 원칙에 따라 오더를 낸 후 빠진 것이 없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이준영 과장이 응급실로 왔다.

오더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항생제 써. 그리고 엘 튜브(코 줄)만 끼우면 다야?”

김지훈이 내심 깜짝 놀랐다.

오더 지적은 처음이었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확인? 당장 환자가 입원을 하는데 그게 1년차가 할 소리야? 침과 위액이 하루에 얼마나 생겨?”

지금도 수술실에서는 똑같았지만, 차트 미비를 지적한 이후 점점 질문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제는 생리학적인 문제까지 나오다니, 정말 의아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지훈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리였다.

‘이제는 확실히 뭔가 가르쳐 주실 모양이다. 좋았어!’

이준영 과장의 질문에 김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을 했다. 질문을 받는 것이 이렇게 기쁠 줄은 몰랐다.

“하루에 침과 위액은 각각 1~2리터 정도 생깁니다.”

“최소 2리터에서 최대 4리터네. 장이 막혔는데 그게 다 소장으로 내려가면 어떻게 되겠어? 장이 부어서 더 막혀. 그런데 엘 튜브만으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그 순간 뭔가 머릿속을 때렸다.

예전에 일반 외과를 돌 때 본 적이 있었다.

“엘튜브 용 석션(suction:흡입) 기를 달겠습니다.”

“그러면 복부 사진은?”

“오늘 저녁에 한 번 찍고, 내일 아침에 다시 찍겠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 갔다.

“구체적인 원인이 대개 뭐야?”

“수술로 인한 장 유착이나 밴드(band) 때문입니다.”

석션 기를 제외하고는 막힘이 없었다.

이준영 과장이 묘한 혓소리를 내며 외래로 향했다.

뭔가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수술 말고는 태우기가 쉽지 않네.’

그런 것도 모르고, 꾸벅 인사를 한 김지훈이 재빨리 오더를 수정했다.

엘 튜브용 석션 기는 강제로 침과 위액을 빨아내는 기계다. 당연히 자연적으로 배출할 때보다 훨씬 많은 양을 제거할 수 있다. 일정량 이상의 과도한 압력이 걸리면 자동으로 멈춰 위벽에 손상을 주지도 않았다.

장 폐쇄 환자에게는 장내의 내용물로 인한 부담을 절대 주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엘 튜브용 석션 기를 이용한 흡입은 보존 치료에 꼭 필요한 방법이었다.

복부 사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굳이 비싼 검사를 시행할 이유가 없었다.

반복적으로 찍어 장 폐쇄의 진행 정도만 알면 충분했다.

김지훈이 당직실로 들어가 서울에서 가져온 기록을 뒤졌다. 대부분 응급실 환자에 대한 오더가 문제 된 탓에 얼마 전 아예 숙소에서 당직실로 옮겨 놓은 덕분이었다.

찬찬히 오더를 비교하고 암기를 했다. 환자들마다 치료 방법이 다 달랐지만 기본은 같기 때문이었다.

머리도 식힐 겸 응급실 밖으로 나온 김지훈이 환자에 대해 생각하다 말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수술을 보고 싶다고 해도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으이구! 이러다 벼락 맞겠다.’

순간 장 폐쇄 환자의 수술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이다. 환자가 나빠지기를 바라다니, 정말 벼락 맞을 생각이었다.

음성에서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이준영 과장이 외래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통사고 환자가 한 명 내원했다. 창백한 안색에 식은땀을 흘리며 심한 복부 통증을 호소했다. 혈압은 괜찮았지만 박동 수가 빠르고 증상이 심해 뭔가 있어 보였다.

안호석이 낸 기본 검사와 복부 촬영을 하라는 오더를 확인한 김지훈이 복부 CT를 추가로 냈다.

얼마 후, 검사 결과들이 나왔다.

CT를 보던 김지훈의 표정이 변했다.

배 속에 피가 가득했고, 비장의 손상이 의심되는 소견이었다.

판독이 맞다면 비장 파열로 인한 혈복강이었다.

안호석에게 엘 튜브와 폴리를 하라는 오더를 내리고 간호사에게 쇄골하 정맥 도관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사이 보호자에게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는 바로 쇄골하 정맥을 잡았다.

수술에 필요한 검사 몇 가지만 더 하면 바로 수술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만일 다른 병원으로 간다고 해도 그만큼 시간을 절약할 테니 환자에겐 유리한 일이었다.

“과장님, 김지훈입니다.”

“왜?”

“교통사고로 내원한 36세 된 환자입니다. 복부 CT상 헤모페리토네움(Hemoperitoneum)이 의심됩니다.”

“뭐?”

이준영 과장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당장 진단이 맞는지 확인하고 응급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파열된 비장에서는 끊임없이 출혈이 있을 것이고, 수술적 제거 이외에는 지혈을 할 방법이 없었다.

이준영 과장이 오질 않았다.

슬슬 환자의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보호자분,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수혈을 해야겠습니다. 만일 출혈이 더 심해지는 증후를 보이면 바로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 빨리 좀 부탁드립니다.”

의사가 아닌 사람이 봐도 환자 상태가 나빠 보일 지경이었다. 보호자가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빠른 속도로 수액을 공급하며 수혈까지 시작했다.

이준영 과장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왜 안 오시지? 외래에도 급한 환자가 있나?’

환자의 혈압과 소변량을 지속적으로 체크하며 기다리던 김지훈이 결국 응급실을 나와 외래로 향했다. 환자의 혈압이 90/60mmHg까지 떨어져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그때 이준영 과장이 막 진료실을 나오고 있었다.

진료를 받고 나오는 환자는 물론 대기 환자도 없었지만 김지훈의 눈에 그런 것이 보일 상황이 아니었다.

“과장님, 환자 바이탈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혈압은?”

“방금 전에 체크했을 때, 90에 60이었습니다.”

이준영 과장의 얼굴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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