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음성에도 전공의와 인턴이 있다 (2)
1년차가 무슨 인턴 스케줄을 관리한단 말인가?
“제가요?”
“그래. 네 말대로 우린 여기 과장으로 왔어. 그렇게 생각하면 전공의라고는 너 하나뿐인데 인턴 교육을 누가 맡아?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오프를 줄 건지 말 건지하고 응급실은 어떻게 돌릴 건지 정도만 결정해.”
난감한 표정으로 김진호를 봤지만 커피만 홀짝거리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머리가 띵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솔직히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그때 김대성이 솔깃한 말을 했다.
“너 힘들어서 지금처럼은 일 못한다. 맨날 교통사고 환자에 매달리면 일반 외과 일은 언제 할래? 적절하게 일을 배분해야 원래 네가 하고 싶었던 일에 집중할 수 있어. 그리고 요즘 수술실에서 무지하게 깨지잖아.”
“예, 심하게 깨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인턴 근무를 조정하고 트레이닝도 시켜야지. 앞으로 수술이 늘면 늘었지, 줄겠어? 덜 깨지려면 책이라도 봐야 할 거 아냐.”
맞는 말이었다.
적절한 일의 분배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결정해야 하나요.”
“빠르면 빠를수록 네게도 좋겠지? 그리고 언제 한번 밥이라도 같이 먹게 시간 좀 내자.”
“과장님, 저 100일 당직입니다.”
“100일 당직이라고 구내식당에서만 먹으라는 법 있어?”
김대성이 타박 아닌 타박을 하자 김진호가 슥 나섰다.
“이준영 과장님께는 내가 말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아니다, 아예 넷이 한번 먹자. 김대성 선생, 어때?”
“좋죠.”
이준영 과장과 함께 밥을 먹는다?
아직은 어렵기만 한 관계를 개선할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김지훈이 마치 다짐이라도 하듯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선생님, 일단 일반 외과 1년차로서 제대로 일을 한 후에 식사를 했으면 합니다. 어시스트도 제대로 서지 못하면서 과장님과 함께 밥을 먹는 건 상상이 안 됩니다.”
김진호가 크게 웃었다.
“하여간 김지훈 너, 참 희한한 놈이다. 일반 외과에 목을 매도 이렇게 매는 놈이 있나?”
“그러게요. 내가 그래서 우리 과 하라고 꼬셨는데, 얼굴을 볼 시간도 없었으니. 남 주기에는 정말 아까운 놈이에요.”
눈앞에서 칭찬을 해 대는 통에 얼굴이 시뻘게진 김지훈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김대성 선생님, 인턴 선생들 수처 문제는 어떻게 할까요? 초번이니까 얼굴은 그렇다고 쳐도 조금만 더 익숙해지면 팔다리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
“네가 알아서 하라니까. 대신 엉망이면 지훈이 네가 타는 거야. 선배들이 괜히 후배 태우는 거 아니다. 인턴들 의사로 만들어 줘야지.”
김지훈이 입가를 문지르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네. 나도 나지만, 저 자식들도 배워야 하잖아. 일단 정신부터 차리고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한동안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뭔가 서늘한 느낌에 시계를 보았다.
‘으악! 벌써 4시 반이 넘었네.’
부랴부랴 병동으로 올라가 드레싱을 하고 회진 준비를 했다. 차트에 빠진 부분이 없는지 열심히 살폈다. 그런데 정작 이준영 과장은 차트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늘만 날이 아니었다.
일을 안 하거나 오더를 어기는 놈은 하루도 안 돼 티를 내기 마련이었다. 서울 병원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한 이준영 과장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날 밤 늦게 김지훈이 인턴들과 머리를 맞댔다.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었고, 상의할 종류의 일도 아니었다.
“2명이 24시간 풀로 응급실을 돌고, 1명은 병동과 수술실을 커버해. 병동 일은, 내과, 소아과. 정형외과 환자 리스트를 만들고, 시간이 되는 대로 과장님들 따라서 회진 돌아.”
서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오프는요?”
“주중에는 병동 근무한 사람이 오프를 가는데, 만일 응급 수술이 뜨면 들어와야 하니까 술 마실 타임 잘 잡아라.”
‘헉’ 소리가 났다.
사실상 주중 오프는 없다는 말이었다.
서울보다 더 가혹한 조건이었지만, 단 3일 만에 음성 병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언제 잠을 자는지도 모를 김지훈 앞에서 오프 타령을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다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안호석이 총대를 멨다.
“선생님, 저희도 3명뿐이라 오프를 주기가 쉽지 않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쉬는 날은 있어야 버티죠.”
“맞아, 쉬어야지. 주말 오프는 한 주에 한 명씩 보내 줄게. 대신 토요일 오후 1시부터 일요일 저녁 9시까지다. 더 이상은 안 돼.”
그나마 주말 오프는 준다는 말에 반색하던 서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그때 응급실은 혼자 커버해야 하나요?”
“주말에는 병동 일이 거의 없으니까 병동 당직이 응급실도 함께 커버하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
인턴들의 안색이 변하자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하지만 초반이니까 당분간은 내가 응급실을 같이 서 줄게.”
서도진이 깜짝 놀라 물었다.
“선생님이 주말 내내 응급실을 선다고요?”
“최소한 한두 달은 같이 근무해야 니들끼리 응급실을 커버할 수 있는 텐데, 그 방법밖에 더 있어?”
김지훈이 말을 하다 말고 연거푸 하품을 했다.
인턴들도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김지훈의 성격에 병원과 인턴들의 상황을 최대한 고려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선후배 이전에 전공의와 인턴 사이였다. 까라면 까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게 인턴이었다. 군대나 병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당직실을 나서던 김지훈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잊은 게 있다. 오프 가고 싶으면 한 가지 통과해야 할 게 있어?”
오프는 생명이었다.
깜짝 놀란 인턴들이 동시에 외쳤다.
“예? 뭔데요?”
“삼겹살에 수처해 와라. 통과하면 팔다리 정도는 꿰매고 오프도 가지만, 반대이면 알지? 셋 다 모두 통과해야 해.”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오프를 가야 한다는 마음과 수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뒤섞였다. 잠시 후, 당직실에서 가위바위보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휴! 또 졌네. 차라리 사다리를 탈걸. 세 근 사 온다.”
“수고해라, 도진아.”
서도진이 성질을 내며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그래, 빨리빨리 배우고 익혀. 한동안 살벌하게 태운다고 서운해하지들 말고. 니들이 잘해 주지 않으면 나도 죽을 판이다.’
독불장군은 없다. 수련 과정을 밟는 의사들에겐 특히 그렇다. 서로 믿고 일할 수 있는 동료가 되지 않으면 결국 자신에게 모든 피해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작정을 했다.
‘니들이 미숙하면 우리 다 죽는 거야. 나도 이제 1년차지만 최선을 다해 보자.’
가뜩이나 모자란 잠을 쪼개 가며 인턴들에게 아는 것은 모두 알려 주고자 애를 썼다. 모두 머리를 맞대고 서로 배워 갔지만 때론 잡아먹을 듯이 화를 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은 알려 주면 되는 일이었고, 당연히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방심과 태만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스스로 선택했고,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었다.
“니들 수처 연습 왜 안 해? 하루에 고작 100바늘도 못 꿰매면 환자한테는 언제 수처 할래? 잘할 때까지 오프 없다고 했다. 시간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연습해. 그리고 질환별 오더하고 술기 확실하게 암기해.”
큰 소리가 나올 때마다 인턴들의 어깨가 축축 쳐졌다. 하지만 역시 김지훈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후배들이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을 기울였고, 하루가 다르게 능력이 향상됐다.
시간이 지나며, 음성 병원에 적응하고 자신들의 자리를 잡아 가자 인턴들의 존재는 엄청난 힘이 되었다.
어찌 보면 잡일이라고 할 수 있는 환자 리스트부터 병동 일까지 착실하게 챙겼다. 불과 2주 정도의 경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응급실 환자의 상당 부분을 커버했다.
많은 연습이 필요한 수처나 복잡한 술기 등을 빼면 나무랄 데가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이제 인턴 된 지 2주 정도 지났잖아. 오더도 못 내는 서울 응급실을 달랑 일주일 돌고 이 정도까지 해? 이 자식들, 생각보다 대단하네. 어디서 몰래 특훈이라도 받았나?’
은근히 감탄도 나오고 궁금해 슬쩍 물었다.
“니들 왜 이렇게 잘해? 꼭 응급실 한 텀은 끝낸 것 같다.”
조금은 여유를 찾은 서도진이 웃었다.
“선생님 덕분이죠. 그동안 탄 게 얼만데.”
“태우긴.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인마.”
서도진이 힐끗 동기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선생님 덕분도 있지만, 서울에서 많이 배웠어요. 이혁민 선생님께서 얼마나 닦달을 하셨는데요. 시간만 나면 응급실에 오셔서 우리 셋을 붙잡고 오더 내는 법부터 술기까지 직접 가르치셨다니까요. 깨지기도 무지하게 깨졌어요. 거기다 일주일 내내 오프도 없이 밤낮으로 환자들을 보라고 하셔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니까요.”
“이혁민 선생님께 직접 트레이닝을 받았어? 이 자식들, 복 받은 놈들이었네. 그럼 인투베이션 하는 법도 배웠지?”
“실제로는 못 해 봤지만, 인형으로는 여러 번 해 봤죠. 진짜 환자가 오면 할 수 있을까요?”
첫 인투베이션이 기억난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뭣도 모르고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달려들었었다. 다행히 나름의 요령으로 성공했지만, 사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겁도 많이 났었다.
인턴들도 모두 그럴 것이다.
“막상 닥치면 다 하게 돼 있어. 걱정하지 마.”
선배들과 똑같은 답을 한 김지훈이 인턴들을 닦달하는 이혁민 교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1년차에 불과한 전공의 한 명 달랑 있는 음성에 보낸다고 더 신경 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턴 정도는 음성의 과장들이 가르쳐도 충분한 일이었다.
혹시 자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응급실 때문에 전공의로서 아무것도 못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일 수도 있었다. 엉뚱한 상상일 수도 있었지만 김지훈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공연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평생의 멘토로 모시고 싶다는 사실은 아실까? 아셨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이 자식들이 더 엑설런트해져야 나도 우리 과 환자에 집중할 수 있겠지?’
말이 나온 김에 김지훈이 인턴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다시 전했다. 사람이 는 덕분이지만, 이런 여유까지 생길 줄은 몰랐다.
인턴 3명이 그간 궁금했던 것까지 물어 왔다.
“와우! 형한테 들으니까 귀에 쏙쏙 들어오네.”
“도훈아, 형이 뭐야? 선생님이지.”
안호석의 말에 서도훈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래, 도훈아. 병원에서는 형이 아니고 선생님이다. 똑바로 해라.”
“예, 존경하는 김지훈 선생님. 명심하겠습니다.”
서도훈의 넉살에 모두 웃었다.
선배들과의 관계와는 또 달랐다.
후배와 함께 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이 되고 즐거울 줄은 몰랐다. 김지훈이 웃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급실은 얘들이 맡고, 병동 잡일도 없으면 낮에는 뭐 하지? 대부분 응급 수술이라 계속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렇다고 빈둥빈둥 굴러다닐 수는 없잖아. 난 현수하고 달라서 필드 체질이라 끈덕지게 책 보고 공부하는 거에는 한계가 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월요일 아침부터 복막염 수술을 한 덕인지 매일 수술이 있었다. 게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준영 과장이 로칼(국소 마취) 수술까지 하기 시작했다.
전신 마취가 필요한 수술에서는 여전히 까맣게 탔고, 국소 마취하의 수술에서는 실만 잘랐다. 하지만 무조건 퍼스트로서 어시스트를 했기 때문에 상당한 경험이 쌓이고 있었다. 역시 퍼스트는 세컨드나 써드 어시스트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즐거운 나날이었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생각도 하지 못한 일주일이 가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 차팅을 하던 김지훈이 히죽히죽 웃었다.
다른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기들이 생각난 것이다.
‘낮에 조금씩 노는 게 찜찜하다만, 이 자식들아, 난 수술실에서 퍼스트를 선다. 니들은 세컨드지? 배우는 게 달라. 일석아, 경수야, 경석이 형, 고생들 많이 해. 신현수, 나 음성 돈다고 방심하지 마라. 금방 쫓아간다.’
사실 수술이라고는 마이너 수술이 거의 다였고, 입원 환자도 다른 과 환자가 훨씬 많았다. 내심 1년차들 중 가장 처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스스로 해결할 방법도 없는 상황이었다.
역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최선이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차팅까지 다 마치고 창밖을 보던 김지훈이 또 웃었다.
간호사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김지훈 선생님, 좋은 일 있으세요? 뭔가 그렇게 좋아서 아까부터 웃기만 하세요. 우린 선생님 덕분에 일에 치여 죽겠는데.”
“그럴 일이 있습니다. 일들 하세요.”
이준영 과장 때문이었다.
낮에 내과에서 컨설트 하나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