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음성에도 전공의와 인턴이 있다 (1)
지속적인 음주와 속 쓰림에도 불구하고 약조차 제대로 복용하지 않은 환자였다. 십중팔구 위궤양 천공에 의한 복막염이었다.
그렇게 바라던 수술 환자가 연이어 왔지만, 지금도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이건 완전히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다.
그나마 인턴들 덕분에 2시간이라도 잤으니 다행이었다.
“5시네.”
대충 시간을 계산한 김지훈이 잠을 포기했다.
보호자를 만나 환자의 상태를 설명했다.
“보호자분, 여기 가슴 사진에서 이 부분 보이시죠? 이게 장 밖으로 빠져나온 공기입니다. 장 어딘가에 구멍이 났다는 말입니다.”
“구멍이 나요?”
“과음에 속까지 쓰렸는데 약도 제대로 복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궤양이 생겼을 겁니다. 치료를 안 했으니 당연히 궤양이 점점 심해졌겠죠? 결국 위벽이 너무 깎이다 못해 구멍이 나면서 복막염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수술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환자는 물론 보호자도 놀라는 눈치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다른 병원에 갈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음성 병원에 대한 새로운 소문이 쫙 퍼졌다. 실력 있는 의사가 온 이후 별의별 수술을 다 한다는 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환자의 부인이 한숨을 푹푹 쉬며 이 와중에도 바가지를 긁었다.
“으휴! 그러게 술 좀 작작 먹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수술까지 해야 된다는데, 어떻게 할 거야?”
환자가 아픈 배를 움켜잡으며 신경질을 냈다.
“이놈의 여편네. 남편이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데 바가지야? 뭘 어떻게 해. 그럼 이대로 콱 죽어?”
“언제 죽으래? 수술 여기서 받을 거야, 말 거야.”
응급실에서도 싸우다니, 참 대단한 부부였다.
김지훈이 슬며시 사이에 끼어들며 결정해 달라고 했다.
“선생님, 수술만 하면 괜찮은 건가요? 이 양반이 밥도 안 먹고 술만 먹어서 몸이 약해요.”
고개를 돌리자마자 남편 걱정을 하다니, 부부이긴 부부인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금 전에도 비슷한 환자를 무난히 수술했고, 잘 회복됐습니다. 어디서 하실지 결정만 하시면 됩니다.”
환자 부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말이 정말 사실인 모양이었다.
수술과 마취로 인한 위험성과 술로 인한 문제들을 충분히 듣고 난 후에도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노티를 받은 이준영 과장이 아침 9시에 수술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오더를 냈다. 김지훈이 시간을 확인했다.
‘도리어 이 시간에 환자가 온 게 다행이네. 서두르면 차팅 할 시간까지 날 것 같은데.’
“안호석 선생, 준비하자.”
엘 튜브와 폴리를 들고 오던 안호석이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입이 방정이었다. 택시 안에서 응급실이 만만치 않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어제 저녁 음성에 도착해 월요일 새벽까지 서너 시간도 자지 못했다. 그나마 틈틈이 돌아가며 졸다시피 잠을 청한 것이 다였다.
‘서울보다 훨씬 더 힘드네. 우린 셋이라도 되지만, 지훈이 형도 정말 대단하다. 밤새 응급실에 매달렸는데 병동 일은 언제 할까? 저렇게 안 자고도 사람이 살 수 있구나.’
힘들었던 저녁이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시곗바늘이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응급실이 점점 한산해졌다.
인턴들도 정말 오랜 시간 끝에 당직실에 앉을 수 있었다.
남은 환자를 처리할 안호석만 남기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온 안호석은 문득 자신들의 숙소가 따로 있는지 궁금해졌다.
간호사들이 3층 김지훈의 숙소 바로 옆방이 인턴들의 숙소라고 알려 주었다. 마침 한가한 김에 3층으로 올라간 안호석은 한숨을 푹 쉬었다.
김지훈이 의자에 앉아 차트를 수북하게 쌓아 놓고 기록을 하고 있었다. 뭔가를 열심히 적다 말고 슬슬 눈이 감기더니 그대로 탁자에 이마를 박았다.
아프지도 않은지 김지훈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계를 보고 나서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부랴부랴 드레싱 카를 끌고 나갔다.
안호석과 눈을 마주친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환자 있어?”
“아니요. 3층에 우리 숙소가 있다고 해서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김지훈이 숙소를 가리키고는 병실로 향했다. 복도를 따라 드레싱 카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문득 서울에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 안호석이 혀를 내밀었다.
‘손일석 선생님이 음성은 일반 외과 일이 별로 없을 거라고 걱정을 하면서도 몸은 좀 편할 거라고 부러워하지 않았나? 완전히 잘못 아셨네. 이 정도면 서울 1년차 선생님들보다 더 힘든 거 아닌가?’
내년이면 자신도 같은 길을 걷겠지만, 1년차들은 경이로운 존재들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수면 시간에 관한 것만은 확실히 그랬다.
드레싱을 마치고 온 김지훈은 잠시도 쉬지 못했다.
졸음이 밀려오는지 계속 눈가를 비비고 있었다.
서울 병원 1년차들의 두 번째 주 첫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일어난 신현수가 드레싱 카를 끌고 아직 불도 안 켜진 병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손일석과 김경수도 치료를 시작했는지 드레싱 카 끄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금경태 과장 파트를 도는 신현수가 맡아야 할 환자의 수만 45명이 넘었다. 그보다 적다고는 하지만 손일석과 김경수의 파트도 만만치 않았다.
큰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많아 꼬박 드레싱에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치료가 끝나자마자 허겁지겁 차트를 정리하고 회진 때 확인해야 할 사진과 검사 결과 등을 챙겨야 했다.
그래야 간신히 4년차가 회진을 도는 시간인 7시까지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회진을 도는 동안 4년차가 추가로 내는 오더를 받고 나면 미처 챙길 새도 없이 스태프 회진이 시작됐다. 그렇게 같은 환자의 얼굴을 세 번 보고 나서야 아침 일과가 끝났다.
잠깐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신현수와 손일석이 수술실로 달려갔다. 짧게는 두세 시간에서 길게는 네다섯 시간 정도 걸리는 수술이 줄지어 이어졌다. 점심을 건너뛰는 일은 예사였고, 심한 경우 저녁 회진 때까지도 수술이 끝나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면 바로 오후 회진을 돌고, 파트 전공의들이 모두 모여 오더를 냈다. 시간이 없어 4년차가 오더를 부르면 환자 리스트에 임시로 받아 적어야 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면, 오후 드레싱을 하고 난 후에야 정식으로 차트에 오더를 적을 시간이 생겼다. 신환들의 입원 기록과 그날의 수술 기록은 물론 드레싱하면서 본 환자들의 상태까지 모두 당일에 기록해야 했다.
환자가 많은 탓에 가장 먼저 일어난 신현수가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빨라야 한두 시였다.
손일석이 마지막 차트를 덮으며 기지개를 폈다.
“야! 벌써 1시 반이네. 이제 일주일 지났는데 정말 죽겠다. 현수야, 수술실에서 졸다가 다리 안 꺾였냐?”
신현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일 다 끝났으면 가서 자. 방해하지 말고.”
“짜증은. 그래도 내일 수술이 없어서 좋다.”
수술이 없는 날이라고 한가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 날 수술 스케줄을 챙기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한두 시간 정도 짬이 생기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김경수가 졸음에 겨운 눈으로 중얼거렸다.
“내일 우리 파트 수술 많아. 챙길 것도 꽤 되고.”
“몇 갠데?”
“8개. 수술실에서 언제 나올지 모르겠다.”
“에이! 하루 종일 뛰어다녀야겠네. 뭔 놈의 환자가 이렇게 많아. 현수야, 내일 수술실에서 양방 뜨면 네가 들어갈 차례인 건 알지? 챙겨야 할 것 있으면 지금 알려 줘.”
조용히 메모지 한 장을 내민 신현수가 손일석과 김경수를 보았다. 어느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1년차의 일은 끝이 없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체력의 한계까지 느낄 줄은 몰랐다.
여유라고는 똑같이 없을 손일석과 김경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일에 지쳐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간신히 차트 정리를 모두 마쳤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응급실이었다.
오늘 응급실 당직인 신현수가 관자놀이를 꽉꽉 누르며 일어났다. 손일석이 턱을 괸 채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현수야, 고생해라. 별 환자 아니길 간절히 빈다.”
진담 반 농담 반인 말에 신현수가 멈칫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이상하게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힐끗 손일석을 쳐다본 신현수가 응급실로 향했다.
오늘은 3시간도 채 못 잘 모양이었다.
“저 자식은 웃으면서 일해도 짜증이 솟구칠 판에 아직도 저렇게 차갑냐. 일만 못했으면 벌써 몇 대 팼을 거야. 경수야, 안 그래?”
“그 성격 어디 가겠어? 그래도 가장 힘든 파트를 도니까 이해해야지. 그나저나 지훈이는 잘 돌고 있을까?”
손일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음성 병원 얘기 들으니까, 수술이라고 해 봐야 아뻬 정도란다. 몸은 편할지 모르지만, 지훈이 성격에 미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솔직히 그 자식만큼 일반 외과에 욕심이 많은 놈도 없잖아. 응급실에서 다른 과 환자만 보다 보면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칠 텐데, 걱정이야.”
“근데 정말 왜 보냈을까? 난 이혁민 선생님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돼.”
“그걸 누가 알겠어. 과장님이 내린 결정이고, 이혁민 선생님도 따랐으니까 그때 한 말이 정답이겠지. 너무 잘나도 문제인 모양이다. 내일 시간 나면 전화나 해 볼까?”
김경수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얘기하다 보면 분명히 우리 생활을 물어볼 텐데, 괜히 지훈이 기분만 울적해질 거야.”
“하긴, 수술실에 거의 매일 들어간다는 소릴 들으면 미칠지도 몰라. 에이! 지훈이 생각만 하면 기분이 안 좋아. 어이쿠! 2시가 넘었다. 경수야, 자자.”
고양이 세수만 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 후 환자를 보고 병동 의국으로 올라온 신현수가 물끄러미 자고 있는 손일석과 김경수를 바라보았다.
‘정갑수하고 돌았다면 한두 달은 몰라도 100일 당직조차 버티지 못하겠지?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줄 알았는데.’
빡빡해진 눈을 비비며 침대에 누운 신현수가 문득 김지훈을 떠올렸다. 함께 일했다면 지금보다 덜 힘들었을까?
생각할 힘도 없는지 신현수 역시 이내 잠에 빠졌다.
불편한 침대에서 동기들의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리는데 이렇게 쉽게 잠이 들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
그 시간, 김지훈은 아직도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지난 월요일은 정말 악몽이었다.
회진을 올라온 이준영 과장이 차트를 보다 말고 눈을 부라렸다. 입원 기록이 미비하다는 이유였다.
“오후 회진 돌기 전까지 확실하게 해 놔.”
회진을 돌면서도 환자에 대해 깐깐하게 물었다.
입원 기록을 작성하지 못한 환자만 15명이 넘었다. 그러니 대답을 제대로 할 턱이 없었다.
눈가를 찌푸리며 혀까지 찬 이준영 과장을 본 김지훈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준영 과장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채 들기도 전에 수술을 들어가야 했다.
소장 파열로 인한 복막염이나 위궤양 천공에 의한 복막염이나 수술 과정은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천공된 부위를 봉합할 때는 보다 신중하고 세심한 손길이 필요했다. 외상으로 인한 파열은 주변 조직 손상이 심하지 않았지만, 궤양으로 인한 천공 부위는 염증이 심하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이준영 과장의 손과 요구를 따라갈 수 없었다. 결과는 명확했다. 아예 재만 남은 김지훈이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고 수술이 끝나자마자 병동 일을 해야 했다.
40명이 넘어가자 환자에 대한 기록을 작성하는 일도 엄청나게 시간이 걸렸다. 기왕 입원하고 있는 환자라면 상태만 기록하면 되지만, 몇 배나 일이 많은 신환의 비중이 높은 탓이었다. 그것도 다른 과 환자가 대부분인 탓에 심리적으로 두 배는 더 힘들었다.
‘사실 우리 과 환자도 아니고, 이삼 일이면 우르르 퇴원을 할 텐데 이렇게 기록을 해야 하나?’
그래도 김지훈 자신이 보아야 할 환자였다.
점심도 거르고 일을 해야 했다.
잠시 짬이 나 눈을 붙였다 싶은 순간 김진호가 찾았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수술실에 가자 김대성도 함께 있었다. 김대성이 웃으며 김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믹스 커피 한 잔으로 쏟아지는 잠을 쫓아야 했다.
“힘들지? 1년차 때는 다 그래.”
“예, 과장님. 그런데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
과장이라는 말에 김대성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간단하게 말할게. 인턴들 근무 문제 때문에 불렀어. 진호 형하고 상의했는데, 우리가 나서기에는 좀 그러네. 네가 응급실을 커버하니까 잘 생각해서 근무 스케줄 좀 짜.”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