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8화 (118/1,329)

제11화 이제야말로 1년차 시작이다 (1)

환자와 보호자가 뒤섞여 아직도 도떼기시장처럼 정신이 없는 응급실에 들어선 김대성이 환자 차트를 보다 깜짝 놀랐다. 단체로 교통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고 왔지만, 환자가 30명이 넘는 줄은 몰랐다.

김대성이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과장님, 환자가 서른세 명이나 왔는데, 우리가 너무 늦게 온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절반 정도 남았고, 오더까지 다 낸 상태니까 빨리 확인하고 처리하겠습니다.”

“서른세 명?”

그때 이준영 과장을 본 김지훈이 급히 다가왔다.

“과장님, 오셨습니까.”

“우리 과 환자 있어?”

“예. 빤뻬리(panperitonitis:복막염) 한 명 있습니다.”

“빤뻬리?”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사 결과를 챙겼다.

환자의 복부를 촉진하고 CT를 확인한 이준영 과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결정을 기다렸다.

이준영 과장이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보호자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보호자에게 최대한 빨리 연락하고, 외래에 있을 테니까 오는 대로 전화해.”

뭔가 이상한 눈치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지훈이 이내 남은 환자들을 보기 시작했다.

김대성이 정형외과 환자들을 책임지고, 최치수 과장이 직접 입원 수속을 처리하자 환자들이 빠르게 해결됐다. 33명의 환자가 내원한 지 2시간 반 만에 모두 처리됐다.

김대성과 인턴 3명이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동료들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남은 환자는 외상성 기흉 환자와 복막염 환자뿐이었다.

보호자들은 아직도 도착하지 못했다.

이제야 한숨을 돌린 김지훈이 서도진을 보며 손짓을 했다.

“인턴 선생님들, 이리 좀 와 보셔.”

인턴에겐 하늘인 1년차의 부름이다.

서도훈과 안호석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형이라고 불렀던 후배들이 선생님이라고 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뿌듯함과 동시에 책임감이 교차했다.

“어떻게 너희들 셋이 음성을 오냐.”

“에이! 선생님이 오셨는데 당연히 우리가 와야죠.”

역시 서도진답게 넉살이 좋았다.

빙그레 웃던 김지훈이 한결 여유를 찾으며 주변을 둘러보다 흠칫 놀랐다.

‘가만, 복막염 환자! 우리 병원에서 수술한다고 하면?’

이준영 과장은 이미 외래에서 대기 중이었다.

보호자가 동의하고 마취과와 연락이 되면 곧바로 수술에 들어갈 것이다. 등짝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뻬 수술 어시스트도 제대로 서지 못했는데 복막염이라니, 이건 초비상이었다.

“도진아, 도훈아, 호석아, 미안하다. 응급실에 환자 오면 일단 너희들이 보고, 복막염 환자 보호자 오면 바로 연락해. 부탁한다.”

김지훈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한달음에 숙소로 달려갔다. 어느 부분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장이 터졌다. 외상으로 가장 많이 터지는 부위인 소장일지, 대장일지 그것이 문제였다. 재수 없으면 드물지만 위가 터졌을 수도 있었다.

부랴부랴 책을 뒤져 수술법을 찾았다.

‘한글 책은 왜 없는 거야.’

영어가 원망스러웠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장을 꿰매는 방법을 그린 그림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예 찬물에 머리까지 감고 다시 읽었지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기본적인 술기도 약간씩은 다 다른 데다 장이 터진 부위에 따라 수술 원칙과 유의할 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었다.

“침착하자, 침착.”

혼자 중얼거리며 책을 읽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보호자가 왔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이준영 과장이 불도 켜지 않고 진료실에 앉아 있었다.

복막염 수술을 마지막으로 언제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수술 방법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마치 한 번 배운 운전은 평생 잊어먹지 않는 것처럼 수술도 그랬다.

불과 며칠 전에 했던 것처럼 배를 여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문제는 수술이 아니었다.

10년 전의 기억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복막염을 수술하기 위해서는 복부 정중앙을 절개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옛 기억이 떠올랐다.

억누를 수 없는 불안에 가슴이 답답해진 이준영 과장이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둠만이 보였다.

‘이젠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내가 정말 아무 문제 없이 수술을 할 수 있을까? 일반 외과 의사인 내가 피를 두려워하게 될 줄이야.’

자신이 없었다.

만일 복막염에 혈복강까지 동반됐다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도중에 수술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 1년차인 김지훈이 대신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숨만 내쉬던 이준영 과장이 어둠 속을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어깨를 떨었다.

‘보내자. 후우! 내가 이러고도 일반 외과 의사라고 할 수 있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조용히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던 이준영 과장이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김지훈과 마주쳤다. 손에 책을 든 채 머리를 때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준영 과장이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손에 든 거 뭐야?”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책을 뒤로 감췄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줘 봐.”

이준영 과장이 손을 내밀자 김지훈이 마지못해 책을 내밀었다. 소장과 대장을 봉합하는 과정이 펼쳐져 있었다. 이준영 과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33명이나 되는 교통사고 환자를 보았다.

누구나 환자에 대한 처리가 모두 끝나면 쉬고 싶은 마음뿐일 것이다. 그런데 김지훈은 그 와중에도 수술을 대비하고 있었다.

어색한 웃음 속에서 배우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가 보였다.

말없이 책을 돌려주며 응급실로 향하는 이준영 과장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젠 기억조차 희미했지만 자신도 분명 그랬었다.

응급실에 들어서자 인턴들과 간호사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들에게 이준영이란 인간은 일반 외과 과장이었다.

환자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듣는 보호자 역시 이준영을 의사로서 대했고, 믿음을 보였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들이었다.

어쩌면 항상 느끼고 있으면서 외면했는지도 몰랐다.

다시 한 번 X-ray와 CT를 보며 생각에 잠긴 이준영 과장 옆에 김지훈이 바짝 긴장을 한 채 서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운 밑으로 숨긴 손을 열심히 놀리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장을 봉합하는 동작이었다.

도저히 김지훈을 외면할 수 없었다.

‘분명 배에 피가 찬 것은 아니다. 단순히 장만 터졌다면 문제없다. 이 정도는 웃으면서 했던 수술에 불과해.’

이준영 과장이 결정을 내렸다.

“보호자분, 동의하시면 지금 바로 수술하겠습니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수술을 꺼렸을 보호자들이었다. 그만큼 음성 병원은, 아니 이준영 과장은 환자들에게 신뢰를 잃었었다. 그런데 보호자들이 서로 눈길을 마주치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과장님.”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준영 과장 자신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김지훈과 의료진들이 만들어 낸 신뢰였다. 자신의 마음을 담아 최선을 다해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 시간과 장소는 중요치 않은 법이었다.

누구보다 환자가 먼저 그 사실을 깨닫기 마련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살짝 입꼬리를 말며 말했다.

“수술 준비하자.”

“예, 과장님.”

아직도 손을 꼼지락거리던 김지훈이 힘차게 대답했다.

‘어? 근데 웃으신 건가?’

마취과 김진호에게 연락을 취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사건이었다.

왜 웃었을까?

고민도 잠시,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다.

아뻬도 아닌 복막염 환자였다.

죽지 않고 살아서만 나오면 다행이었다.

수술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책을 보던 김지훈이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뻬는 셋이 해도 무방했지만 지금은 복막염 수술이었다. 마침 미스터 최가 당직이니 한 명만 더 있으면 됐다.

“인턴 선생님들, 잠시만.”

인턴 3명이 쪼르르 달려왔다.

“수술 들어갈 사람이 필요한데, 누가 들어갈래?”

다들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임상 실습 때 경험한 것이 전부인 탓이었다.

“어차피 세컨드인데 뭘 그렇게 고민해. 실습 돌 때하고 똑 같으니까 아무나 들어와. 가위바위보를 하든지.”

눈치를 보던 서도진이 손을 들었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도진이가 들어오고, 너희 둘은 응급실 커버해. 각 과 노티는 누구에게 어떻게 하는지 간호사들에게 물어보고. 일단 정형외과 빼고 다른 외과는 다 나한테 하면 돼.”

“성형, 흉부, 신경외과 전부 다요?”

“음성 병원에 대한 말 못 들었어? 여긴 일반 외과하고 정형외과밖에 없어. 만일 심근 경색 같은 초응급 환자가 오면 수술실에 바로 연락해. 아니면 다이렉트로 내과 과장님에게 콜을 하든지.”

안호석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선생님, 혹시 인투베이션 할 환자가 오면요?”

“내가 없으면 니들이 해야지.”

“허억! 저희가요?”

“그럼 누가 해. 수술하다 말고 내려올 수는 없잖아. 일단 요령을 알려 줄 테니까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처해.”

응급실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세하게 설명했다. 곧 수술실에서 환자를 올리라는 연락이 왔다.

김지훈이 한숨을 쉬며 서도진에게 속삭였다.

“도진아, 나 수술실에서 과장님한테 무지하게 깨지거든. 소문내지 마라.”

서울 응급실에서, 1년 선배들 중 가장 뛰어났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런데 김지훈이 무지하게 깨진다고?

후배에게 말할 정도면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서도진은 눈만 껌뻑거렸다.

수술 준비를 마치고 퍼스트 자리에 선 김지훈이 긴장을 풀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간 눈으로 본 수술은 많았지만 새로운 수술이 있을 때마다 퍼스트를 서는 것 자체가 처음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경험이 있는 아뻬나 탈장과는 차원이 다른 수술이었다.

배를 열어 봐야 어느 정도 큰 수술이 될지 알겠지만, 시작은 메이저 수술에 준했다. 솔직히 깨지는 것도 싫었지만 그보다 어시스트를 잘 설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수술은 개뿔. 어시스트라도 제대로 한번 서고 싶다.’

눈을 감고 복부를 절개하는 과정부터 장을 봉합하는 방법까지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언제나 머릿속으로는 곧잘 따라갔지만 실제 수술에 들어가면 항상 손이 어지러워졌다.

시작도 하기 전에 기가 죽을 수는 없었다.

‘난 잘할 수 있다. 아뻬나 복막염 수술이나 다를 것도 없다. 수술 정원도 처음으로 4명을 다 채웠고, 도진이 앞에서 창피를 당할 수는 없다. 힘내자. 파이팅!’

김지훈이 주먹을 꽉 쥐며 쉬지 않고 파이팅을 외쳤다.

수술실 밖에서 손을 깨끗이 씻고 들어와 소독 가운을 입던 이준영 과장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취를 끝내고 수술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마취과.

환부만을 남긴 채 완벽하게 준비된 드랩(drap:수술 부위를 제외한 환자의 모든 부위를 소독된 천으로 덮는 과정).

절개할 부위에 정확하게 맞춰진 무영등.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어시스트들.

퍼스트 자리에 서서 긴장된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김지훈.

10년 전 환자 앞에 섰을 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잊은 줄만 알았던 수술을 앞뒀을 때의 미묘한 긴장감과 일반 외과 의사로서의 자부심이 슬며시 가슴을 자극했다.

집도의 자리에 선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보았다.

인턴 한 명을 데리고 들어와 수술 정원인 4명을 모두 채울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음성 병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전공의들의 수련을 담당하는 대학 병원에서는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오해일 수도 있지만, 배움에 대한 열의가 아니면 이런 원칙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태우기만 했다. 솔직히 가르치겠다는 마음보다 두고 보자는 생각이 더 컸다. 제대로 가르친 것도 없었다. 귀찮았던 건지,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랬던 건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김지훈은 포기하기는커녕 더 열심히 환자를 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꾹 다문 입술에서 잘하고 싶다는 의지와 열의가 보였다.

까마득한 후배가 이렇게 큰 자극을 줄지는 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