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7화 (117/1,329)

제10화 퍼스트(1st) 서다 맞아 죽겠다 (2)

김지훈이 두 손으로 턱을 감싸고는 생각에 잠겼다.

‘맞아. 과장님의 손을 따라가는 게 다가 아니었어. 같은 동작을 해도 집도의를 방해하는 꼴이 있으면 결국 수술을 방해하는 거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문득 처치대 위에 놓인 니들 홀더(needle holder:수처 시 바늘을 잡는 기구)가 눈에 들어왔다.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이 있었지만 이혁민 교수는 손바닥만으로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어떤 자세에서도 자연스럽게 수처(봉합)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기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기구를 익숙하게 사용하지 못해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어시스트를 서면 결국 집도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이준영 과장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분명 하나를 배웠다.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며 눈빛을 굳혔다.

다섯 번째 아뻬 수술이 시작됐다.

이준영 과장의 동작을 방해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험악하게 타긴 마찬가지였다.

“과감하게 들어와.”

“이 부분에서는 자신 있게. 몇 번을 말해야 해?”

낮았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이것만이 아니었나?’

일순 실망감이 스쳤다.

그때 정말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여기선 그렇게 해야지.”

‘그렇지’라니! 음성에 와서 처음 듣는 소리였다.

김지훈이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이 아무리 간사하다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단 한마디에 갑자기 힘이 샘솟고, 수술이 너무 즐거워지려 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딱 한 번 그 소리를 듣고 또 새카맣게 탔다.

아뻬 수술 시간이 40분 내외였기에 망정이었지 더 길었으면 재만 남았을 것이다.

“김지훈, 벌써 다섯 번째다.”

이준영 과장도 수술 횟수를 세고 있었나?

의아한 일이었지만 그런 것에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수술을 마무리하던 김지훈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 한 번 제대로 호흡을 맞췄던 그 순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때 어떻게 호흡을 맞췄을까?

알듯 말듯 어렴풋하게 뭔가가 스쳤지만 잡히질 않았다.

하필이면 김진호의 말에 생각마저 산만해졌다.

“김지훈, 그래도 오늘은 한 번 덜 탔다.”

“어휴! 지금도 등짝이 다 땀이에요.”

“그럴 만도 하지. 나도 마취과 하는 동안 어시스트를 저렇게 태우는 양반은 처음 본다. 근데 말이야, 그게 혼을 내는 건지, 가르치려는 건지 그걸 잘 모르겠다.”

이게 혼나지 않는 거면?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김진호가 묘하게 웃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퍼스트를 제대로 못 서서 수술에 문제가 생겨 봐. 아예 죽는 게 낫다는 소리 나온다.”

수술실에서 외과 전공의들이 혼나는 걸 마취과만큼 많이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3년차의 판단이니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은근히 기분이 좋은 말이었다.

마무리를 끝낸 김지훈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역시 긍정적인 생각만이 살길이었다.

‘힘내자, 힘. 다른 1년차는 엄두도 못 낼 퍼스트를 서는데 이 정도 타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지. 김진호 선생님 말대로 가르치시는 거라면 감사한 마음으로 타자.’

“수고하셨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온 모든 이들에게 힘차게 인사를 한 김지훈이 환자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오더를 냈다.

한창 오더를 내던 중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몸집 큰 사람이 방금 전까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

이제야 조금은 일반 외과 1년차가 된 느낌이 들었다.

아뻬 3명에 화상 환자, 그리고 함몰 유두까지.

남들이 보면 웃을 정도로 일반 외과 환자가 적었지만 김지훈으로서는 정말 기쁜 일이었다.

지난 2주간 생각한 것 이상으로 수술도 많이 들어갔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래도 기본적인 트레이닝은 받을 것 같았다. 물론 이준영 과장에게 거의 모든 것이 달려 있긴 했지만 말이다.

오늘도 정신없는 토요일이 지났다.

일요일 아침에도 쉴 시간이 없었다.

병동 회진을 돌고 드레싱을 하는 사이 응급실 환자가 쭉 밀렸다. 최선을 다해 진료를 하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밥 먹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한가한 틈을 타 잠깐 눈을 붙였다.

오후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어후! 조금만 더 참자. 이제 곧 인턴들이 온다.’

이를 악물고 응급실 근무에 매진했다. 하지만 시간이 가도 환자는 줄지 않았고, 병동 일을 할 틈조차 없었다. 가까스로 환자를 모두 해결하고 병동으로 올라가려는 찰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시간, 음성 버스 터미널에 3명의 인턴이 도착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숨을 쉬던 인턴들이 택시를 잡아탔다. 이제 막 3월에 접어들어서인지, 아니면 시골 읍내 거리인 탓인지 벌써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도진아, 음성은 좀 편할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도 서울 같지는 않겠지. 일단 이혁민 선생님도 안 계시고. 그래도 응급실 근무가 그렇게 빡 셀 줄은 몰랐네. 호석아, 안 그래?”

“힘들더라. 그래서 솔직히 걱정이야. 음성 병원이 아무리 작아도 3개월 동안 응급실 커버가 말이 되냐? 너나 도훈이나 나나 어째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지훈이 형이 있으니까 마음은 편할 것 같다.”

“하긴, 나도 그게 유일한 위안이다.”

그때 택시 운전사가 아는 척을 했다.

“음성 병원에 근무하러 가시는 의사 선생님들이신가요?”

서도진이 그렇다고 하자 운전사가 반색을 했다.

“아! 그러세요. 이번에 오신 선생님 때문에 음성 병원 응급실 환자가 많이 늘었어요. 전에는 가물에 콩 나듯 갔었는데, 요샌 툭하면 환자를 싣고 간다니까요.”

“그래요? 그렇게 환자가 많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휑한 게 응급실 같지도 않았죠. 지금은 바글바글합니다. 그것뿐이 아니에요. 수술도 안 하던 병원이 요새는 매일처럼 수술을 한다는 말이 있어요. 온 동네에 끝내주는 선생님이 한 분 오셨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 선생님 성함이 김 뭐라더라?”

“김지훈 선생님이요?”

“아! 맞아요. 김지훈 선생님.”

서도진이 홱 뒤돌아보며 말했다.

“도훈아, 호석아.”

서도훈과 안호석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어느새 택시가 병원에 들어섰다.

택시 기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저거, 저거 보세요. 앰뷸런스가 도대체 몇 대가 온 거야?”

서도진이 입을 벌린 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내밀던 서도훈과 안호석이 털썩 의자에 몸을 던졌다.

김지훈은 아무 말도 못했다.

앰뷸런스에 경찰차까지 환자를 싣고 왔다. 교통사고가 크게 난 모양이었다. 대충 세도 30명이 넘었다. 원무과 직원들까지 응급실로 와 환자를 받아야 했다.

“어떻게 된 일이죠?”

김지훈의 말에 환자를 옮기던 경찰이 대답했다.

“백마령 고개 아세요? 길이 위험해서 툭하면 사고가 나는 곳인데, 오늘은 버스가 넘어갔어요.”

“그렇다고 이 많은 환자를 다 이리로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의사라고는 나 하난데.”

“어이쿠! 선생님이 한 분이신가요? 평소 같았으면 충주나 청주로 갔을 텐데, 환자들이 이 병원으로 온다고 난리를 쳐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거 큰일 났네.”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수였다.

이런 경우 대처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간호사, 번호표 작성해서 환자들에게 일일이 다 붙여요. 먼저 볼 환자들 번호하고 필요한 검사 불러 줄 테니까 내 차팅 없어도 검사 나갑시다.”

마지막 번호가 무려 33번이었다.

일단 중한 환자부터 걸러 내야 했다

무엇 때문에 단체로 버스를 탔는지 모르지만, 거의 다 나이가 지긋한 환자들이었다. 기존의 환자까지 있는 데다, 파악을 하지 못해 모두 복도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몇몇은 꽤 심한 부상을 당했다.

김지훈이 메모지에 번호를 적으며 빠르게 환자를 살폈다.

“간호사, 앰뷸런스 가지 말라고 해요. 급한 환자가 많으면 다른 병원으로…….”

그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서도진, 서도훈, 안호석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인턴들이 정말 기가 막힌 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김지훈이 소리를 질렀다.

“야, 니들 왔구나. 딱 맞춰 왔네. 빨리빨리 가운으로 갈아입고 환자부터 보자. 서울에서 응급실 돌았다고 했지?”

“예, 선생님.”

김지훈이 메모지를 보며 외쳤다.

“간호사, 1번, 8번, 15번 환자들 빨리 안으로 모시고, 22번하고 26번 환자도 안으로 모셔요. 니들은 복도에 있는 나머지 환자들 보고, 필요한 오더부터 내.”

인턴 3명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일을 시작했다.

고작 일주일을 배웠고, 그것도 원래는 오더조차 내지 못하는 서울이었다.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본 김지훈이 손을 저었다.

“침착하게 봐. 일단 기본 검사는 무조건 나가니까 X-ray 오더부터 내. 서두르지 말고.”

정작 김지훈에겐 여유가 없었다.

22번과 26번 환자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빠르게 필요한 검사를 내고 간호사들에게 주의할 환자들이라고 알렸다. 응급실 침대가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인턴들은 복도에서 진찰을 해야 했다.

그래도 인턴 3명이 가세한 것은 정말 큰 힘이었다.

“간호사, 차트 넘기는 대로 검사하는데, 순서 잊지 말아요. 급한 환자부터 검사합니다.”

“네, 선생님.”

김지훈이 접수를 하려고 환자 옆에 선 원무과 직원까지 불렀다. 환자 접수는 나중 문제였다.

“원무과 직원이시죠. 복도에 환자들은 검사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불안하지 않게 옆에서 같이 있어 주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연락하세요.”

응급실 간호사는 단 2명뿐이라 손이 너무 부족했다. 김지훈이 직접 병동과 수술실에 전화를 걸어 간호사들을 내려오게 했다. 당직이었던 미스터 최까지 내려왔다.

한가하다 싶은 간호사들과 직원들까지 모두 동원됐다.

응급실이 전쟁터로 변했지만 김지훈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환자를 보는 사이 X-ray가 나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1번, 8번, 15번 환자는 골절상만 입었을 뿐이었고, 바이탈은 안정적이었다.

환자들에게 재빨리 상태를 설명하고 안심시켰다.

‘22번하고 26번 환자가 문젠데. 아무래도 불안해.’

두 환자는 CT까지 낸 탓에 사진이 나오려면 조금 더 있어야 했다. 복도에서 대기한 채 아직 진찰을 받지 못한 환자들을 마저 보았다.

근 30분이 지났지만 처리된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일단 중해 보이는 환자들부터 정리하지 않으면 밤을 새도 모자랄 판이었다. 김지훈이 인턴들을 불렀다.

“니들 혹시 부목 대 봤어?”

정말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런데 나란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서울에서 왔는데 정말 의외였다.

“좋았어. 저 환자들 임프레션 적어 놨으니까 그거에 맞게 부목 대. 이따가 다시 대면 되니까, 지금은 골절 부위만 안정시킨다고 생각해. 그리고 사진들 다시 확인하고, 이상 없다고 판단되면 간호사에게 입원실로 올리라고 해.”

한시름 덜었다.

남은 환자 2명이 관건이었다.

일반 사진과 CT가 나왔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늑골 골절이 의심됐던 22번 환자는 외상성 기흉까지 발생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복부 진찰상 복막염이 아닐까 의심됐었던 26번 환자였다. 단순 흉부 사진상 별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복부 CT에서 장 밖으로 빠져나온 프리 에어(free air:복막염의 중요 징후)가 보였다.

‘CT 찍어 보기를 정말 잘했네. 복막염 환자는 수술 준비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일단 기흉 환자부터 해결하자.’

“간호사, 흉부 도관 준비합시다.”

때마침 안호석이 부목을 모두 대고 다른 환자를 살피고 있었다. 김지훈이 의식이 명료한 26번 환자에게 일단 상태를 설명하며 안호석을 불렀다.

“호석아, 26번 환자 엘 튜브(코 줄)하고 폴리(소변 줄)해. 보호자 찾아서 바로 나한테 말해 주고.”

간호사가 흉부 도관을 준비하자마자 김지훈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길게 숨을 내쉰 후 침착하게 도관을 박았다. 10여 분 만에 도관 삽입을 끝낸 후 추가 오더를 냈다.

복막염이 발생한 환자는 응급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준영 과장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밤에 어디를 가셨지? 설마 술 마시고 계시나?’

다행히 아직 보호자가 도착하지 못했다.

여기서 수술을 할지, 다른 병원으로 갈지는 보호자가 도착해야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지훈은 남은 환자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제야 환자 절반 정도가 해결됐다.

그때 총무과 최치수 과장이 누군가와 함께 들어섰다.

이준영 과장과 김대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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