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6화 (116/1,329)

제10화 퍼스트(1st) 서다 맞아 죽겠다 (1)

잠시 한가했던 응급실이 다시 북적였다.

정신없이 환자를 보는 와중에 손이 많이 가는 환자가 왔다.

라면 먹는다고 물을 끓이다 홀라당 뒤집히는 바람에 발을 포함한 두 다리에 화상을 입은 환자였다.

화상 면적이 몸의 10프로가 넘거나 손과 발, 그리고 얼굴 혹은 중요 부위에 화상을 입은 경우에는 입원이 원칙이었다.

이미 발을 데었지만 면적도 정확하게 차팅을 해야 한다.

손바닥 하나의 면적이 대략 몸의 1프로다.

다리 한쪽은 18프로로 계산한다.

김지훈이 손바닥으로 화상 면적을 가늠했다.

15프로 정도 화상을 입었고, 물집만 잡혀 2도 화상이었다.

그런데 화기를 빼고 소독을 한다고 간장을 부었다.

몰라서 그런 거지만, 친절하게 웃는 얼굴로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한숨을 쉬며 목소리를 높였다.

“병원을 놔두고 왜 그놈의 민간요법을 합니까. 간장 잘못 부우면 도리어 감염이 돼요. 지금은 2도 화상이지만 감염이 되면 3도 화상이 됩니다. 그러면 피부 이식까지 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으세요?”

환자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사소한 화상이라도 다신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예, 죄송합니다.”

환자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자 미안해진 김지훈이 차가운 생리 식염수를 부우며 말했다.

“저한테가 아니라 환자분 몸에 미안한 일이죠. 그나마 빨리 오셔서 다행이네요.”

충분하게 화상 부위를 닦은 후 드레싱을 했다.

이번에도 구미의 덕을 봤다.

손과 발의 화상을 담당했던 장성훈 과장이 했던 드레싱 방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실버딘(화상 연고)을 바른 후 발가락 사이가 닿지 않도록 거즈를 끼우고, 남은 부위의 드레싱을 모두 끝냈다. 마치 장화라도 신은 것 같았다.

“부위가 넓고, 발까지 화상을 입으셔서 입원하셔야 합니다.”

“입원이요?”

입원을 얘기하면 환자들의 반응은 거의 다 똑같았다.

김지훈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 다리로 걸어 다니실래요? 그리고 감염되면 피부 이식까지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먹는 항생제로는 감염을 못 막습니다.”

거즈를 대고 붕대를 감은 두 다리를 보던 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외래에서 치료할 상황이 아니었다.

***

월요일 새벽, 파김치가 된 김지훈이 병동으로 올라갔다.

얼마 후, 원장과 최치수 과장이 들어섰다.

둘 다 입이 찢어졌다.

“최 과장, 그럼 입원 환자가 모두 몇 명이야?”

“입퇴원 카운트를 해 봐야 정확한 숫자를 알겠지만, 곧 100명이 넘을 것 같은데요, 원장님. 직원들 회식비라도 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허허허! 100명 넘으면 바로 연락해. 그 정도도 못하겠어.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던 게 사람 한 명 왔다고 일주일 만에 되다니, 세상 참 묘하네. 참! 김지훈 선생하고 토요일에 식사는 했지?”

“그게 말입니다.”

직원들과 탕수육 파티를 했다는 최치수 과장의 말에 원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실력만 좋은 게 아니라 성격도 멋지네. 나중에 금일봉이라도 줘야겠어.”

“그러시죠, 원장님. 그런데 말입니다, 3개월만 근무하시는 게 너무 아쉽네요.”

이제 일주일이 막 지났다.

벌써 걱정할 일이 아니었지만 원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이 막 나간 후 응급실에 거구 한 명이 들어섰다.

환자가 없으면 응급실 근처에도 오지 않았던 이준영 과장이었다. 대뜸 간호사에게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입원한 환자 있나?”

“그럼요, 과장님. 그런데 웬일로 응급실에 들르셨어요?”

환자 목록을 본 이준영 과장이 아무 말도 없이 응급실을 나섰다. 주말 동안 외과에만 7명을 입원시켰다.

‘함몰 유두로 인한 유방 농양? 저놈 때문에 내가 유방 환자를 다 보네. 주말 동안 본 환자 수를 보니 잠을 거의 못 잤겠어. 시간상 아침 회진도 거의 준비를 못했겠지?’

주말 이틀이었지만, 이 정도면 서울 병원 1년차보다 더 로딩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인턴도 없이 회진을 제대로 준비한다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외래에서 가운으로 갈아입고 병동으로 올라간 이준영 과장이 흠칫 놀랐다. 김지훈이 평상시와 다름없이 회진 준비를 하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눈에도 완전히 피곤에 절은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환자 드레싱은?

회진을 돌던 이준영 과장이 간간이 김지훈을 보았다.

누구 하나 간섭하고 통제하지 않는데 이토록 열심히 하는 김지훈을 그냥 두고 보기에는 너무 신경이 쓰였다.

‘노력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제대로 가르쳐야 하나? 하지만 지금 내 손으로 그게 가능할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이준영 과장의 눈빛이 왠지 심각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슬금슬금 많아지던 일이 한 주만에 턱없이 늘어났다. 입원 환자가 많아지면서 드레싱과 차팅 등 기본적인 일들에 은근히 시간을 빼앗겼다. 사이사이 응급실과 병동의 콜을 받고 나면 낮에도 짬이 거의 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틀 연이어 아뻬가 떴다.

수술실 분위기는 여지없었다.

퍼스트를 서는 게 겁이 날 정도로 심하게 탔다.

분명 처음보다는 익숙하게 이준영 과장의 손을 따라갔지만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김진호가 혀를 찰 정도였다.

일이 터지려니 온갖 데서 다 터졌다. 새카맣게 탄 속이 미처 회복되기도 전이었다. 오후 회진을 돌던 중 유방 농양 환자가 이준영 과장에게 엉뚱한 말을 했다.

“과장님, 그런데 수술은 언제 하죠?”

“수술이요?”

“네. 입원한 김에 이번에는 확실하게 치료하고 싶어서요. 김지훈 선생님께서 수술을 하면 재발이 없을 거라고 하셨는데, 말씀이 없으시네요.”

이준영 과장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김지훈을 보았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었다.

‘이런! 수술 결정은 내가 하는 게 아닌데.’

입원할 당시 확실한 치료법을 알려 준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함부로 수술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은 성급한 일이었다.

수술은 무조건 이준영 과장이 결정할 일이었다.

최소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노티 했어야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목소리가 으스스했다.

김지훈이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을 했다.

“환자분이 입원하실 때, 염증이 가라앉으면 함몰 유두를 수술하시는 게 좋겠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굳은 표정으로 병실에서 나왔다.

함몰 유두는 흔히 보는 질병이 아니었다. 심한 경우 전문의가 되도 어떻게 수술을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 일반 외과를 시작한 1년차가 함부로 수술을 들먹였다니, 돼먹지 못한 일이었다.

아무리 수술에 대한 욕심이 있다고 해도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 수술을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말한 거야?”

가뜩이나 낮고 굵은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어지간히도 화가 난 모양이었다.

간호사까지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김지훈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죄송합니다. 서울 병원에 근무하시는 이혁민 선생님께서 수술하실 때 어시스트를 서며 본 게 생각나 그만…….”

인턴 때 어시스트를 섰다면 잘 해야 세컨드다.

수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준영 과장이 기가 막힌지 헛웃음을 흘렸다.

“퍼스트라도 섰단 거야?”

“예. 퍼스트 서며 딱 한 번 본 것이 전분데 제가 말을 함부로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준영 과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 교수가 인턴을 퍼스트로 세웠어? 이거 봐라.’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는 막역한 선후배 사이로 서울 병원 개원 시 함께 부임했다. 몇 년간 같이 근무해 이혁민 교수가 인턴이나 전공의를 어떻게 평가하고 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방 수술은 간단하다고 해도 기능과 미용을 모두 고려해야 하기에 함부로 어시스트를 세우지 않는다. 그런데 인턴 때 이혁민 교수가 퍼스트를 세울 정도였다면 정말 대단한 기대를 받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 교수가 그 정도로 인정한 놈을 도대체 왜 보낸 거야? 설마 나 때문은 아닐 테고. 후우! 고작 1년차 한 놈 때문에 머리가 아파지다니, 정말 우습군.’

10년 동안 음성에 박혀 지난날을 잊고자 애썼다.

지난 몇 년간은 그렇게 친했던 이혁민 교수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도 편안했고, 음성 생활에도 익숙해져 가벼운 수술만 하며 지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지훈이란 놈이 나타나 잔잔했던 마음에 돌을 던지고 있었다.

사실 경험도 없는 1년차가 만족스럽게 어시스트를 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타고난 손재주도 중요하지만, 그만한 열의와 숨은 노력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번밖에 못 본 수술을 환자에게 권했단 말이지. 내가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이준영 과장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간만에 유방 수술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함몰 유두 수술 정도로는 예전의 아픈 기억이 떠오를 리도 없었다. 물론 김지훈을 아예 숯덩이로 만들 기회이기도 했다.

경험상 정말 배우고 싶어 하는 놈은 아무리 태우고 구박을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김지훈도 과연 그럴까?

고작 열흘 만에 판단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금요일로 잡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결정을 기다리던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함몰 유두 수술에 들어갔던 김지훈이 수술 후 오더도 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미 한 번 봤던 수술이었고, 책으로나마 과정까지 달달 외웠다. 마치 도상 연습을 하는 것처럼 머릿속으로 연상하고 또 연상을 했다.

시작은 좋았다. 서릿발 같은 눈길이 날아오기 전에 먼저 착착 알아서 어시스트를 했다. 이때까지는 이준영 과장도 별말이 없었다. 하지만 유두를 반으로 절개한 후 본격적으로 기둥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봉합 후 매듭에 남긴 실의 길이부터 가위가 들어가는 방향까지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지적을 당했다. 얼마나 혼이 났는지 얼굴이 빨개지고 귀가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겨우 오더를 내고 마음을 진정시켰을 무렵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다. 환자를 진찰하는 순간 한숨부터 터졌다.

아뻬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만세를 불렀을 테지만, 지금은 겁이 와락 났다. 최소한 무엇이 잘못됐는지, 아니면 어떻게 하라는 말만 들었어도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준영 과장에게 바로 노티를 하고 검사를 냈다.

수술 준비를 하는 사이 이준영 과장이 환자를 보고 있었다.

김지훈이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째려보았다.

‘과장님, 저 이제 1년찹니다. 뭐 좀 가르쳐 주시고 태우세요. 야! 환자에게 말씀하는 거에 절반만이라도 부드럽게 말씀하시면 안 되나? 이건 헐크도 아니고, 완전 딴사람이야.’

바람과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환자 준비되는 대로 올리고 연락해.”

화들짝 놀란 김지훈이 벌떡 일어나자 이준영 교수가 웬일인지 쓰윽 입원 기록을 보았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원칙대로 하고 있었다. 꾀를 부리는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계속해.”

한 번도 차팅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한 적이 없었다.

혹시 빠진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지훈이 온 신경을 다해 기록을 해 나갔다. 그런데 너무 바짝 붙어 있어서인지 이준영 과장의 몸이 자꾸 팔꿈치에 걸렸다. 김지훈이 슬며시 몸을 빼자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불편해? 나도 수술할 때 불편해.”

이준영 과장이 그 한마디만 툭 던지고 응급실을 나갔다.

무슨 소린지 몰라 멍하니 뒷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간 생각하지도 못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시스트는 단순히 수술을 보조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특히 퍼스트는 집도의와 함께 수술을 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 간의 호흡이 무척 중요했다. 아무리 수술이 능숙해도 퍼스트가 받쳐 주지 못하면 수술하는 내내 힘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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