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일반 외과 환자 좀 봅시다 (2)
외래 진료가 끝나갈 무렵 총무과 최치수 과장이 찾아왔다.
“김지훈 선생님, 잠깐 시간 좀 있으십니까?”
“예, 말씀하세요.”
어째 최치수 과장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한참 뜸을 들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저… 이번 주에 오시기로 했던 인턴 선생님들이 다음 주 주말에나 오신답니다.”
날벼락이다.
“예? 왜요?”
“그게, 우리 병원에 오면 바로 응급실에서 근무를 해야 하는데 경험이 없잖습니까. 그래서 서울 병원에서 일주일 정도 근무를 한 후에 보낸답니다. 어떻게 하죠?”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충분히 버티겠지만, 혼자 일해야 한다는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인턴들의 트레이닝 일정을 관장하는 서울 병원의 결정인 데다 당연한 소리였다.
“최 과장님, 다음 주에는 확실히 온대요?”
“선생님 혼자서 계속 응급실을 커버할 수는 없을 텐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별다른 불평도 없이 간단하게 수긍하는 김지훈을 본 최치수 과장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하다못해 응급실 근무를 조정해 달라는 요청 정도는 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선생님은 정말 처음 보네.’
“그럼 죄송하지만 일주일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식사 시간인데, 혹시 시간 있으십니까?”
“왜 그러시죠?”
“원장님께서 너무 고생하신다고 점심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라고 하시네요. 제가 맛있는 집을 알고 있는데, 별일 없으시면 소고기라도.”
고기! 귀가 번쩍 뜨였다.
체력이 떨어질 때는 역시 고기가 최고였다. 하지만 1년차였고, 100일 당직 기간이었다. 밖에 나간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이었다.
‘아! 돼지도 아니고 소인데 포기해야 하나? 아니지, 돼지면 어떻고 소면 어때. 일단 먹는 게 우선이지.’
내심 한탄을 하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굳이 100일 당직이라는 말을 먼저 해서 좋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혼자 먹으면 맛이 없기 마련이었다.
“일이 있어서 못 나갑니다. 대신 음식을 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시켜 먹는 음식이 맛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탕수육이면 충분하고요. 이왕이면 주말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같이 먹게 예산 범위 내에서 한턱 쏘시죠. 다 같이 식당에서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은데요.”
최치수 과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제 일주일밖에 근무를 안 했는데 직원들까지 챙기다니, 실력은 물론 성격까지 좋은 선생님이 온 것이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선생님 덕분에 제 기분까지 너무 좋습니다.”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점심 식사를 하러 구내식당에 들어온 직원들이 고소한 냄새에 코를 벌렁거렸다. 사람 수에 맞춰 탕수육이 나오자 이런 일도 있다며 다들 난리가 났다.
식탁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얘기하던 최치수 과장이 김지훈 옆에 앉았다. 슬며시 캔 맥주 하나를 내밀었다. 100일 당직 기간에 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유혹이었다.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켜려는 순간 여기저기서 김지훈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김지훈 선생님,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김지훈 선생님.”
미스터 최가 맥주를 들며 소리를 질렀다.
“파이팅!”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맥주를 들며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꿀꺽꿀꺽, 맥주 넘어가는 소리만으로도 피곤이 쫙 풀렸다.
원래 1년차들에게 주말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외과 계열은 더욱 그렇다.
응급만 뜨지 않으면 수술도 없고, 회진이 없으니 드레싱도 여유 있게 할 수 있다. 신환 역시 거의 없어 괴롭히는 선배만 없으면 못 잔 잠도 자고, 따뜻한 물에 목욕까지 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김지훈에게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응급실이 점점 환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병동 일도 간신히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입원 환자들이 늘어 엘 튜브(코 줄)와 폴리(소변 줄)같은 소소한 일까지 늘었다.
토요일 밤새 시달리다 일요일 아침에 간신히 눈을 붙였다.
간호사들도 깨우기 미안한지 환자들이 10여 명이나 밀리고 나서야 콜을 했다. 크게 기지개를 펴도 온몸은 뻑적지근했고, 머리는 띵했다.
혼자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이제야 뼈저리게 느꼈다.
계속 터져 나오는 하품을 간신히 참으며 환자를 봤다.
환자가 많아질수록 입원을 해야 할 환자도 많아졌다.
환자 수가 2배가 되면 일은 2배가 아니라 그 몇 배로 늘었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2월의 해가 짧아서인지 응급실과 병동을 오가는 사이 어느새 어둠이 깔렸다. 그만큼 밤이 길고, 할 일도 많아진다는 말이었다.
“휴우! 한 시간만 잡시다. 급하지 않으면 환자들에게 양해 좀 구해 줘요.”
다른 병원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음성 병원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간호사들이 도리어 재촉을 했다.
“걱정하지 마시고 빨리 눈 좀 붙이세요. 이러다 쓰러지시겠어요.”
체력하면 김지훈이었는데, 머리에 베개가 닿자마자 코를 골았다. 누가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그 덕인지 콜이 왔을 때 그나마 몸이 조금은 나아졌다.
당직실에서 나오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저 아줌마 또 왔네.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나, 왜 이렇게 자주 봐. 에휴! 환자도 달랑 한 명이구만, 조금 더 있다가 깨우지.’
오지랖이 무척이나 넓은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 여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간호사가 쪼르르 달려왔다.
“한 명밖에 없는데 깨워서 죄송해요. 환자가 너무 아파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별게 다 죄송한 일이다.
김지훈이 어깨를 주무르며 환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같이 오셨나 봐요.”
“아이구! 선생님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상철이 엄마, 이분이 내가 말한 그 선생님이셔. 괜찮을 거야. 조금만 참아.”
김지훈을 보고는 무척이나 반가워하면서도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오지랖이 넓은 게 아니라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픈 사람 앞에서 오지랖만 떨면 환영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환자분,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환자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가슴을 가리켰다.
“가슴? 그러니까 유방이 아파서 오셨어요?”
“네. 열도 나고, 머리까지 아파요.”
김지훈이 혹시 몰라 간호사에게 옆에 꼭 붙어 있으라고 하고는 커튼을 쳤다. 주저하던 환자가 옷을 풀었다.
왼쪽 유방의 유두 주변이 퉁퉁 부어 있었고, 유두는 유방에 묻혀 끝만 보였다. 촉진을 해 보니 국소적인 발열이 심했다. 염증이 상당히 심해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얼굴을 찌푸리며 비명을 질렀다.
“유방에 고름이 찼네요. 언제부터 이랬죠?”
“일주일 전부터 아팠어요.”
“일주일이요? 그런데 왜 이제 오셨어요?”
“개인 병원을 다녔어요. 전에는 약만 먹어도 잘 나았는데 이번에는 전혀 효과가 없네요. 그 병원 원장님도 약 먹어서 안 나으면 큰 병원에 가 봐야 한다고 그러셨어요.”
유방 농양이었다. 일반 외과 환자! 정말 반가웠다.
원인으로는 이혁민 교수와 함께 수술했었던 함몰 유두가 의심됐다. 물론 먼저 간질환이나 당뇨 등 다른 기저 질환이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김지훈이 난감한 눈으로 환자를 보았다.
농양의 치료 원칙은 절개 및 배농이었다. 하지만 수유 기능이 있는 유방도 그렇게 치료하는지는 확실하지가 않았다.
의사가 질병이나 치료법을 모르는 기색을 보이면 환자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잠시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설명을 했다.
“일단 염증 검사부터 하고, 다른 이상이 없으면 바로 치료를 하겠습니다.”
“여기서도 가능한가요? 영훈이 엄마가 선생님이 계시면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왔거든요.”
“검사 결과부터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답을 한 김지훈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의사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다. 하지만 의사가 슈퍼맨은 아니다. 더군다나 전공의 1년차다. 유방 농양이어서 다행이었지만, 이러다 산부인과 환자까지 데려올 판이었다. 부담 백배였다.
간호사가 환자의 혈액을 뽑는 사이 슬며시 응급실에서 나온 김지훈이 부리나케 숙소로 달려갔다.
답은 항상 교과서에 있다.
유방 농양을 찾은 김지훈이 열심히 읽어 내려갔다.
천만다행으로 치료는 다른 질환처럼 절개 및 배농을 한 후 항생제를 투여하는 것이었다. 절개 시 주의할 점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응급실로 향했다.
그사이 온 환자들을 몇 명 본 후 환자의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백혈구 수치가 상당히 증가돼 있었지만 간 기능이나 당 등은 정상적이었다.
김지훈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준영 과장이 환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일단 치료하기로 결정하면 단호하고 자신 있게 대해야 환자가 안심하고 몸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환자분, 일단 고름이 잡힌 부분을 쨀 겁니다. 고름을 다 제거하고 나면 심지 하나를 박아서 고름이 더 고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염증이 심하기 때문에 며칠 입원을 해야 합니다.”
“입원까지 해야 하나요?”
난처한 얼굴이었다. 시부모들이 있거나 애가 딸린 주부들에게 입원은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외래 진료를 권할 수가 없었다.
“증상도 심하지만 반복적으로 발생했고, 특히 유두가 함몰된 게 원인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대충 치료했다가는 계속 고름이 잡힐 겁니다.”
“그래요? 영훈이 엄마, 어떻게 하지?”
“다른 생각 하지 마. 전에 보니까 아파서 울기까지 하던데, 상철이 엄마 몸부터 챙겨야지. 선생님 믿고 이번에 확실하게 치료해.”
곰곰이 생각하던 환자가 한 가지 더 물었다.
“입원을 하면 확실하게 치료가 되는 건가요?”
“확실하게 치료하는 방법은 함몰 유두를 수술하는 겁니다. 유두를 정상적으로 만들어야 이런 상황이 안 생깁니다.”
“수술이요? 생각보다 큰 병이네요.”
“큰 병이라기보다는 고통스러운 병이죠. 정말 쉽지 않으셨을 텐데 수유는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많이 힘드셨죠?”
김지훈의 말에 환자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의사라면 당연히 믿어야 했다.
“수술은 간단한가요?”
“간단한 수술은 없습니다. 하지만 힘든 수술이라고 하기에도 애매모호하네요.”
“그럼 여기서도 가능한가요?”
김지훈이 이혁민 교수와 수술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환자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 환자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말만 하며 시간을 질질 끌 수는 없었다.
“그럼 일단 치료부터 하시죠. 간호사, 절개 준비해요.”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환부를 깨끗이 소독한 김지훈이 국소 마취를 시작했다.
“아아악!”
환자가 엄청나게 아파했다. 맨살을 마취할 때도 아파 죽는다는 사람이 있다. 염증이 심한 자리를 마취할 때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통증이 뒤따른다. 통증을 없애기 위해 하는 것이 마취인데 통증이 수반된다니, 묘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순간 멈칫거렸다.
염증이 발생한 부위에 국소 마취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미처 얼마나 아플지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환자분, 많이 아프시죠. 조금만 참으세요.”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마취제를 살살 투여할 수는 없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도리어 그게 더 큰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이었다.
마취를 끝낸 김지훈이 메스를 잡았다.
유두와 유방의 경계 부분에 칼집을 넣었다.
모스키토(mosquito:켈리와 유사하게 생긴 도구로 크기가 작은 기구)로 피하 조직을 벌리자 고름이 쏟아져 나왔다.
거즈가 스무 장 이상 젖었다.
유방 조직 사이에 숨어 있던 고름을 제거하기 위해 과감하게 주변 조직을 압박했다.
“아악!”
환자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아랑곳하지 않고 고름을 짜냈다.
거즈에 더 이상 고름이 묻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가느다란 심지를 만들어 고름이 잡혔던 공간 속에 넣었다.
심지가 빠지지 않도록 한 바늘을 떠 피부에 고정시키고 두툼하게 거즈를 댔다. 한동안은 숨어 있는 고름과 뒤섞인 체액이 꽤 많이 나올 것이다.
김지훈이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환자분, 끝났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어요.”
얼마나 아팠던지 환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보낸 김지훈이 진통제 오더를 냈다.
얼마 후, 환자의 표정이 많이 편해졌다.
‘이혁민 선생님 덕분에 함몰 유두를 봤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갑갑할 뻔했네.’
외과의에게 경험의 유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