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3화 (113/1,329)

제8화 경험이 있고 없음의 차이 (3)

김지훈이 모른 척하며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아침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맹장염은 당장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급한 질환이 아니니까 서두를 필요도 없습니다. 혹시 오시기 전에 뭐 드신 거라도 있나요?”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습니다.”

“잘됐네요. 지금부터는 물도 마시면 안 됩니다. 조금이라도 뭘 먹으면 마취를 하지 못해 수술 시간이 뒤로 밀릴 수도 있으니까요.”

어떻게든 다른 병원으로 가는 일은 막아야 했다.

마음이 급한 김지훈이 서둘러 오더를 냈다.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입원 기록을 작성한 적이 없었다.

‘시간이 애매모호하네. 어차피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회진 돌 때 노티를 하면 딱 맞겠다.’

아침 회진 때문에 시간이 늦어질 수도 있다는 양해를 구한 김지훈이 급히 병동으로 향했다.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일을 반복했지만 즐겁기만 했다.

드디어 첫 수술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서울에서 가져온 수술 기록지를 찾았다. 생각해 보니 퍼스트(1st) 자리에서 어시스트를 서야 했다. 단순 보조만 하는 세컨드나 써드와는 완전히 역할이 달랐다.

문제는 단 한 번도 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슴이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났다.

일단 글로라도 확실하게 외워야 했다. 김지훈이 아뻬 수술 과정을 확실하게 외우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거랑 실전은 엄청 다른데 큰일 났네. 과장님이 부드러운 사람도 아니고. 어시스트 못한다고 맞아 죽는 거 아냐? 가만! 세컨드와 써드를 설 사람도 없네. 과장님하고 나랑 단둘이서 수술을 해야 하나?’

갑자기 다가온 불안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아침 회진이 시작됐다.

신환 차트를 보던 이준영 과장이 한 환자의 차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기흉 환자였다.

생각지도 못한 환자를 입원시킨 것이다.

‘이 자식 봐라. 흉부 외과도 없는데, 설마 체스트 튜브를 혼자서 박은 거야? 이제 인턴을 마친 놈이?’

물어보아야 할 것들이 정말 많았지만, 이준영 과장은 궁금함을 꾹꾹 눌렀다.

“이 환자 사진 보자.”

김지훈이 재빨리 맨 처음 사진과 흉부 도관을 삽입한 직후의 사진, 그리고 아침에 다시 찍은 사진을 차례로 걸었다.

제대로 들어가 있는 흉부 도관을 확인한 이준영 과장이 물었다.

“해 봤어?”

“예. 구미에서 두 번 해 봤습니다.”

이준영 과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인턴 때 흉부 도관을 삽입해 봤다니, 상당히 엑설런트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히 실력뿐만 아니라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환자에 대한 오더 역시 정확하게 냈다.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말이었다.

이런 1년차가 음성에 오다니, 정말 의아한 일이었다.

연줄이 있었다면 음성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간 하는 걸 봐서는 품성은 물론 실력도 뛰어나다는 쪽이 맞았다.

‘아무리 봐도 여길 올 놈이 아니야. 그렇다면 금경태 과장에게 찍혔단 말인데. 아무리 금경태라고 해도 웬만한 잘못이 아니고서는 인턴이 과장과 엮일 이유가 없잖아.’

힐끗 김지훈을 본 이준영 과장이 혀를 찼다.

세상일이 싫고, 자신에 대한 회의 때문에 음성에 왔다.

이제 와서 단 3개월 동안만 근무하는 1년차 때문에 정신이 사나워지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회진 돌자.”

회진을 돌던 이준영 과장이 슬쩍 환자 리스트를 보았다.

어디가 불편해 입원한 환자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환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김지훈이 일차적으로 환자를 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문득 서울 병원에서 근무하던 때가 생각난 이준영 과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도 가끔 환자가 많을 때는 착각을 하고는 했다.

김지훈이 긴장된 표정으로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다른 환자들과는 달리 기흉 환자는 꼼꼼하게 살피고 있었다. 도관이 잘 고정됐는지부터 공기가 잘 빠져나오는지까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많이 아프면 간호사에게 말씀하세요. 김지훈.”

“예.”

“진통제 PRN으로 내라.”

PRN(pro re nata라는 라틴어의 약자)은 필요할 때마다 알아서 하라는 의미의 약자다. 즉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면 의사의 오더 없이도 간호사의 판단하에 진통제를 주어도 무방하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내심 꽤 놀랐다.

환자를 어떻게 보는지 의아할 정도로 말이 짧은 이준영 과장이었다. 이렇게 세심하게 환자를 보고 길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1년차에게 PRN 오더라니!

환자가 안정됐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김지훈이 제대로 치료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김지훈이 마지막 환자를 보고 성큼성큼 스테이션으로 향하는 이준영 과장에게 노티를 했다.

“과장님, 응급실에 아뻬가 의심되는 환자가 있습니다.”

“아뻬?”

“예. 새벽 6시에 와 노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아무 말도 없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재빨리 1층을 누르고는 부리나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인턴 때 습관이 몸에 밴 탓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준영 과장이 기다리고 있는 김지훈을 보고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다음부터는 타.”

“예? 예, 알겠습니다.”

공연히 쑥스러워진 김지훈이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앞장섰다. 응급실 차트를 확인한 이준영 과장이 환자를 진찰했다.

김지훈이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과거력부터 현재 증상까지 자세하게 묻고 있었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할 줄은 몰랐다.

목소리까지 달라진 것 같았다.

‘회진 돌 때하고 지금하고 어느 쪽이 진짜 과장님이지? 설마 나한테만 무뚝뚝하신 건가?’

마지막으로 배 여기저기를 만져 보고는 바로 수술을 결정했다. 보호자에게도 나직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수술에 대해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

“동의하시면 바로 수술하겠습니다.”

자신 있고 확신에 찬 말에 보호자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동의를 했다. 다른 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침부터 여러모로 놀랄 일이 많은 날이었다.

멍하니 이준영 과장을 보던 김지훈이 수술 준비하라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수술과 입원에 필요한 오더를 내리고, 수술 스케줄을 작성했다. 부리나케 2층 수술실로 올라가 김진호를 찾았다.

음성 병원은 정형외과를 빼면 거의 수술이 없었다.

그나마도 하루 한두 개에 불과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며 하품을 하던 김진호가 스케줄을 받아 들며 반색을 했다.

“지훈아, 빨리 올려, 빨리.”

“예, 선생님.”

응급실에 연락을 하고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환자가 도착하자 화이트 가운이 나와 환자를 수술실로 옮겼다.

“김지훈 선생님이시죠. 잘 부탁드립니다. 미스터 최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예? 미스터 최요?”

나이가 한참은 위로 보였다. 호칭이 영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자 미스터 최가 웃으며 말했다.

“수술 보조를 맡고 있습니다. 정형외과는 과장님 한 분뿐이지만, 선생님이 오셨으니 과장님께서 편히 수술을 하시겠습니다.”

의사가 부족한 병원의 현실이었다.

대학 병원은 아뻬 수술에도 의사 4명이 참여한다. 하지만 개인 병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화이트 가운들이 수술을 보조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간호사 면허증은 물론 간호조무사 자격증조차 없어 불법이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이 없었다. 실제로 일부 경험이 많은 화이트 가운들 중에는 전공의들보다 더 노련한 이들도 있었다.

이를 알 리 없는 김지훈은 수술을 보조할 사람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수술 준비를 모두 마쳤다.

마취가 끝난 후 들어온 이준영 과장이 손을 씻고 소독된 수술 가운을 입었다. 김지훈이 부지런히 수술 과정을 외우고 또 외웠다.

일반 외과에서 가장 간단한 수술이라지만 퍼스트는 처음 선다.

자신을 가지려 아무리 애를 써도 가슴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경험이 없다는 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김진호의 사인이 떨어졌다.

“메스.”

이준영 과장이 피부를 절개했다.

김지훈이 재빨리 거즈로 새어 나오는 피를 닦았다.

피하 조직을 절개하고 근육 층에 도달할 때까지는 잘 따라갔다. 여기까지였다. 이준영 과장은 김지훈을 배려하지 않았다. 익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수술을 진행할 뿐이었다.

보조를 맞추려고 하면 어느새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복막도 열지 않았는데 김지훈의 손이 어지러워졌다.

빠르게 움직이던 이준영 과장의 손이 멈췄다.

서늘한 기운에 슬며시 눈을 든 김지훈은 마른침만 삼켰다.

이준영 과장이 눈가에 힘을 꽉 준 채 노려보고 있었다.

“복막 연다. 반대쪽 잡아.”

다시 수술이 진행됐다.

복막을 열고 맹장을 확인한 후 충수 돌기를 찾았다.

본격적으로 손이 멈추기 시작했다.

“동맥 잡는다. 위쪽으로 들어와.”

“동맥 안 끊어져. 확실하게 타이(tie:실매듭) 해.”

“여기는 힘줘서 타이 하면 찢어져.”

“아뻬 자른 부위는 두 번 묶어야 안 터진다.”

정말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냉정하고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할 정도였다.

머릿속에는 모든 과정이 확연하게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손이 따라가질 못했다. 그렇게 타이를 연습했건만, 실제는 너무 달랐다. 조직의 강도와 중요도에 따라 강약과 횟수까지 조절해야 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게 원했던 수술이었고, 잘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어시스트조차 제대로 서지 못한 것이다. 스스로에게 분하고 차근차근 가르쳐 주지 않는 이준영 과장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 또한 트레이닝이었고, 방식은 이준영 과장이 결정할 문제였다. 원망하고 핑계를 대면 댈수록 제자리에서 뱅뱅 맴돌 것이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난 잘할 수 있다.’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속으로 할 수 있다고 수없이 외쳤다.

아뻬를 절제한 부위를 마무리하고 복막을 닫은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보았다.

“이게 힘들어?”

기가 죽을 일이 아니었다.

실력이 부족한 것이지, 잘못한 일은 아니었다.

김지훈이 눈빛을 굳히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준영 과장의 눈이 반짝였다.

‘이 정도 따라오면 수술에 대한 열의도 있고, 손재주도 괜찮군. 체스트 튜브도 어쩌다 해 본 것이 아니었고, 멘탈까지 제법 강해.’

잠시 동안 말없이 김지훈을 보던 이준영 과장이 뒤로 물러나며 장갑을 벗었다.

“마무리해.”

대답도 듣지 않고 수술실을 나갔다.

이게 뭔 상황이란 말인가?

가르칠 생각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수술을 하고는 배는 혼자 닫으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스터 최가 슬그머니 김지훈의 반대편에 서며 가위를 잡았다.

“김지훈 선생님,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원래 저런 분이세요. 제가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선생님이 꽤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예? 무슨 말이에요?”

“제가 10년을 함께 수술했는데 마무리를 맡기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저도 수처는 좀 할 줄 아는 걸 빤히 아시는데 말입니다. 혼나기도 무지하게 혼났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억울하던지 그만두려고 한 적이 몇 번인지도 모릅니다.”

미스터 최의 말에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몰라도 왠지 열심히 하면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도 미스터 최 말이 맞는 것 같다. 겉은 저러셔도 같이 술 마시다 보면 속은 무척 여리신 부분이 있어.”

며칠이나 됐다고 그새 술을 여러 번 먹은 모양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거의 매일 마셨다는 말이었다.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술을 워낙 좋아하는 김진호는 그렇다고 쳐도 이준영 과장은 의외였다. 술 좋아하면서 무뚝뚝한 사람은 정말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이준영 과장도 김진호만큼이나 술을 좋아하는 걸까?

문득 천안에서 보았던 알코올 중독 환자가 떠올랐다.

자식을 잃은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중독까지 됐다.

‘설마 과장님에게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나?’

그럴지도 몰랐다. 이준영 과장이 한때 서울 병원에서 근무했다는 김대성의 말이 기억났다. 뭔가 일이 있지 않고서는 서울에서 음성으로 올 이유가 없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억측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근육과 피하 조직에 이어 피부까지 다 봉합을 했다.

보조를 서던 미스터 최가 다소 놀란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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