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일단 일부터 하자 (1)
숙소는 3층 병동 맨 끝에 있는 1인실이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와 책상, 그리고 컴퓨터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티가 역력했다. 이만하면 4년차 숙소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지만 최치수 과장이 미안해하고 있었다.
“급히 마련하느라 부족한 게 많으실 겁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만.”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침대에 걸터앉은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내심 걱정도 많았고, 병원을 보는 순간 실망이 앞섰다. 하지만 간호사부터 직원까지 정말 친절했다. 자신을 어엿한 의사로 대우하고 있었다.
불현듯 새로운 각오와 책임감이 느껴졌다.
트레이닝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했다. 이준영 과장의 지나친 무뚝뚝함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깨지는 게 당연한 수련 기간이다.
‘몸부터 깨끗이 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구내식당에 들어섰다.
식당 아주머니들까지 깍듯이 인사를 했다.
김지훈이 자기도 모르게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어라, 식판이 아니네?
식당 아주머니가 일반 식당처럼 일일이 그릇에 식사를 담아 직접 내왔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지나친 대우였다.
‘혹시 나를 일반 외과 과장으로 착각하는 거 아냐?’
별생각이 다 들었지만 일단 배부터 채울 일이었다.
정성이 깃들어서인지 맛이 기가 막혔다.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응급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총무과를 살폈다. 막 퇴근하려던 최치수 과장이 달려 나왔다.
“뭐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병원 구조를 몰라서요. 중환자실하고 수술실이 어디에 있는지…….”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치수 과장이 직접 병원을 안내했다. 1층에 응급실과 중환자실 및 진료실이 있었고, 수술실은 2층에 있었다. 3층과 함께 2층 절반이 병실이었다.
“베드는 몇 개나 되죠?”
“120병상인데 절반 정도 차 있습니다.”
“환자가 많지는 않네요.”
“충주하고 청주가 한 시간 거리 조금 넘는 탓도 있지만, 응급실부터 잘 돌아가질 않아 그렇습니다. 보시다시피 병원이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응급실에서 근무할 선생님을 구하기가 쉽지도 않고요. 과장님들이 직접 봐야 하는 때가 많아서 오는 환자도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병원 전체 입원 환자가 60명에 불과하고 응급실 환자까지 적다면 그만큼 할 일도 없을 것이다. 몸은 편할지 몰라도 결국 배울 것이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얼굴을 찡그린 김지훈을 본 최치수 과장이 깜짝 놀랐다.
“그렇다고 선생님께 부담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무슨 오해?
김지훈이 영문을 몰라 그냥 웃으며 인사를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튼 감사합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응급실로 가 보겠습니다.”
응급실까지 따라온 최치수 과장이 깍듯이 인사를 하고 퇴근했다. 김지훈은 급히 인사를 받으며 허리까지 숙였다. 기분은 무척 좋았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과분한 대우에 적응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간호사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한 김지훈이 차트를 집었다.
그새 한 명은 퇴원을 했는지 단순 장염 환자 2명과 열 감기로 온 환아 1명뿐이었다.
이미 모든 치료가 끝났지만 음성에서 보는 첫 환자들이었다. 김지훈이 가운을 살피고는 환자들에게 다가갔다.
“환자분, 배가 아파서 오셨네요. 지금은 괜찮으세요?”
“예, 괜찮습니다.”
“혹시 불편하신 점 있으면 바로 말씀하세요.”
열 감기로 수액을 맞고 있는 환아의 보호자에게도 아는 한도 내에서 충실히 설명을 했다.
“선생님, 얘가 예전에 열 경기를 자주 했는데, 괜찮을까요?”
“아이가 만 4살이네요. 이 정도면 앞으로 열 경기는 거의 하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만일 경기를 하면 도리어 열 때문이 아닐 수도 있는 나이니까 방심하지 마시고 바로 병원으로 오셔야 합니다.”
“다른 이유가 또 있나요?”
“만에 하나를 대비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보호자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웃으며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소곤거리던 간호사들이 시치미를 뚝 뗐다.
‘충청도라 사투리 좀 쓸 줄 알았는데 거의 안 쓰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의외로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없었다. 한가하니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최 간호사라고 했죠? 입원 환자들 좀 봐야 하니까 환자 오면 3층 병동으로 연락 주세요. 부탁해요.”
김지훈이 응급실을 나가자 간호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자마자 일을 할 줄은 몰랐다.
비록 3명뿐이었지만 환자들에게도 상당히 친절했다.
“내일까지 푹 쉬실 줄 알았는데 벌써 일을 시작하고, 환자들에게도 되게 친절하시네. 저 선생님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큰 게 멋지지 않니?”
“뭐, 생긴 건 그렇긴 하네. 하지만 환자들을 어떻게 볼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지. 응급실에서 근무했던 다른 선생님들도 처음에는 비슷했잖아.”
“하긴, 열심히 일한다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만 해 줘도 감지덕지지. 그래도 거만하지 않아서 정말 좋다.”
의사들 중 몇몇은 함부로 반말을 하고 거만하기까지 했다.
심하면 환자들에게도 반말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소규모 병원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애환이라면 애환이었다.
물론 사람 나름이긴 하지만, 특히 의사를 구하기 힘든 지역은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병동으로 올라간 김지훈은 웃고 말았다.
일단 반응은 다 똑같았다. 병동 간호사들이 모두 일어나 김지훈을 맞이했다. 덩달아 김지훈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일반 외과 환자 차트를 찾았다.
간호사 한 명이 급히 차트를 모았다. 다른 병원에서는 인턴이나 전공의가 직접 차트를 모아야 했다. 전과는 상당히 다른 성황에 자칫 1년차라는 사실까지 잊을 것 같았다.
‘어휴! 인사가 이렇게 부담되는 동네도 있었네.’
기분 좋은 고민에 빠졌던 김지훈이 이내 차트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일반 외과에 입원한 환자는 불과 15명이었다. 그나마 순수한 일반 외과 환자는 단 3명뿐이었다.
아뻬(충수 돌기염) 수술을 받은 환자 둘과 탈장 한 명이었다.
과장밖에 없으니 환자 리스트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정말 몸은 편하게 할 병원이었다.
환자가 없다고 불평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에휴! 환자 수가 문제가 아니잖아.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은 확실하게 하자.’
조금만 방심해도 나사가 풀릴 상황이었다. 나름 각오를 다진 김지훈이 환자 리스트를 작성하고, 순수 일반 외과 환자 차트 3개를 집었다.
이미 입원한 환자들이었지만, 입원 기록을 포함해 수술 기록까지 모두 정식으로 다시 적었다.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럼 환자들이 어떤지 볼까.’
막상 1년차가 돼 전공의 회진을 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게다가 간호사가 쪼르르 달려와 당연한 일인 것처럼 안내를 했다. 다른 병원에서는 기대도 할 수 없는 호사였다.
“특별한 문제가 있는 환자는 없나요?”
“예. 수술한 환자들도 다 괜찮아요.”
일단 회진을 돈 후 수술 환자들에게 드레싱을 했다.
간단한 드레싱은 해 봤지만 수술 부위 드레싱은 처음이었다.
김지훈은 유석재에게 배운 것을 떠올렸다.
일단 소독하기 전에 촉진을 해 혹시 상처가 곪았는지, 혹은 염증이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세심하게 살폈다. 수술 부위가 딱딱하면 제대로 아물고 있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물렁물렁하면 고름이 차 있다는 신호였다.
“잘 아물고 있네요. 불편하신 데는 없으신가요?”
“예. 그런데 오늘은 왜 치료를 두 번이나 합니까?”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새로 오신 선생님이세요.”
“그러세요.”
직원이나 간호사들과는 달리 환자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이준영 과장의 무뚝뚝함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의사와 환자 간의 묘한 긴장은 변할 수가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드레싱을 마친 김지훈이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기분이 묘했다.
1년차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대우를 받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받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배워야 한다는 갈증과 직원들의 태도가 준 묘한 부담감이 교차했다.
응급실이 무척이나 한가했다.
밤이 되도 한 시간에 두세 명 정도 내원을 했다.
인턴 때 응급실만 9주를 돈 김지훈이었다.
심할 때는 한 시간에 이삼십 명을 혼자 보기도 했다.
당연히 쉽게 생각했고, 그렇게 접근했다. 하지만 불과 몇 명도 보기 전에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 지역이라 그런지 젊은 환자보다는 확실히 나이가 많은 환자들이 많았다. 고령 자체가 환자의 주요 위험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이 문제였다.
젊은 사람에게는 문제도 되지 않을 가벼운 질환이 노인들에게는 상당히 심각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었다.
방금 내원한 환자 역시 80세가 넘었다. 단순한 복통을 호소했지만 김지훈이 눈빛을 굳히며 긴장된 기색을 보였다.
지금까지는 동료가 있었고, 선배 전공의들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환자의 증상이 심하다고 인턴처럼 바로 노티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려울수록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답이었다.
“간호사, 바이탈은 어때요?”
“괜찮아요.”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대학 병원이 아닌 탓인지 간호사들이 최소한의 기본도 잊은 것 같았다. 환자를 제대로 진료하기 위해서는 기본을 확실하게 지키도록 해야 했다.
간호사 또한 이미 필요한 교육을 받은 의료인이었다.
필요할 때는 화도 내야겠지만, 지금은 기본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솔직히 누굴 가르칠 실력도 아니었다.
“간호사, 앞으로 바이탈을 물으면 혈압, 맥박 수, 호흡수를 정확하게 말해 줄래요. 그래야 내가 환자를 제대로 볼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죠?”
간호사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기본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동안 해 왔던 대로 했을 뿐이었다. 지적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도 없다. 그런데 마치 부탁하는 것 같은 부드러운 말투 때문인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냥 해 오던 방식이었는데 죄송해요, 선생님. 혈압은 110에 80이고요. 맥박 수는…….”
간호사가 슬쩍 눈치를 보다 급히 환자의 맥박 수와 호흡수를 다시 체크했다.
“맥박은 90회구요 호흡은 20회 정도네요.”
“안정적이네요. 미안하지만, 인계할 때 다른 간호사들에게도 말 좀 해 줘요. 특히 수간호사에게는 꼭 전해 줘요. 앞으로 바이탈은 확실하게. 오케이?”
김지훈이 웃으며 말하자 간호사 역시 활짝 웃었다.
“네, 선생님.”
김지훈이 차근차근 환자의 증상과 과거 병력을 물은 후 진찰을 했다.
하루 전에 발생한 설사와 복통을 동반한 장염이었다.
설사 횟수도 두세 번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단순 장염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증상이었다. 그런데 80세가 넘어 쇠약한 탓인지 의외로 심한 탈수 증세를 보였다. 혀가 말라붙어 발음조차 확실하게 하지 못할 정도였다.
김지훈이 평상시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님, 소변은 보셨어요?”
환자가 두리번거리며 보호자를 찾았다.
“선생님, 아버님이 귀가 어두워서 잘 못 들으세요.”
“그래요? 아버님, 소변 언제 보셨어요?”
목소리를 높인다고 높였지만 여전히 듣지를 못했다.
옆에 있던 보호자가 응급실이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을 하자 그제야 알아들었다.
“어제 봤는데.”
“어제요?”
하루 가까이 소변을 보지 못했다면 콩팥 기능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었다. 빠른 검사가 필요했다.
“보호자분, 일단 장염이 심하신 것으로 보입니다만, 연세가 있으시고 탈수가 너무 심해서 몇 가지 검사를 해야겠습니다.”
“검사를 여러 가지 해야 하나요? 그렇게 심합니까?”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그동안 몇 번 응급실에 왔었지만 별다른 설명도 듣지 못하고 검사를 했다. 그렇다 보니 몇 가지 검사를 해야 한다는 말을 고가의 검사까지 하려는 것으로 오인해 겁을 낸 것이다.
“지금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없고요. 일단 복부 촬영을 하고 피를 뽑아서 신장 기능이 괜찮은지 확인하는 게 좋겠습니다. 두세 번 설사한 것치고는 너무 증상이 심하네요. 수액부터 투여하겠습니다.”
보호자가 안도하는 표정으로 동의를 했다.
뭔가 이상한 눈치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테이션으로 돌아온 김지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