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8화 (108/1,329)

제6화 어디에 있든 난 의사다 (2)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에 없었던 일이니 뭔가 이상할 테고,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하겠지. 하지만 내게 최고의 써전이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때 분명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뭔가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음성 병원이야말로 자네를 시험해 볼 기회야. 내게 했던 말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겠지. 잘 넘겨 봐. 첫 3개월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도 잘 아네만, 마음먹기에 따라 그보다 더 중요한 걸 얻을 수도 있어. 자넬 지켜보는 눈이 생각보다 많아.”

김지훈은 몰랐지만 병원 내 여기저기서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좋은 평을 받고 있었다. 그 덕에 과는 다르다고 해도 여러 과 의사들의 이목을 끌었다. 뛰어나고 성실한 후배를 본다는 것은 선배들이 누리는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면 자넨 정말 훌륭한 의사가 될 걸세. 당당하게 부딪쳐 봐.’

말을 마친 소아과 과장이 손을 내밀었다.

김지훈이 엉겁결에 손을 잡았다.

“억울해도 그렇지, 다 큰 사람이 길거리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울면 쓰나. 난 못 본 걸로 하겠네. 남은 인생이 훨씬 길다는 것을 잊지 마.”

“안 울었습니다, 과장님.”

“그래, 그럼 안 운 것으로 하지.”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지금 당장 억울하고 화가 난다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을 잊은 것이다. 환자를 떠난 의사는 존재할 수 없다. 음성에도 의사의 마음과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는 많을 것이다.

이미 6명의 전문의가 근무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보다 김지훈이 잘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감사는 3개월 후에 받기로 하지. 음성에 가면 이준영 과장이 있을 거야. 사연이 많은 사람이지만, 자네가 원하는 것을 가르쳐 줄지도 몰라. 그렇다고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그럼 다음에 또 보세.”

깐깐하기로 소문난 소아과 신상민 과장이 이제 1년차가 되는 인턴을 상대로 정말 길게도 말했다.

‘날 시험한다? 더 많을 것을 얻을 수도 있다고?’

김지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긍정이야말로 김지훈을 지탱해 온 힘이었다.

어렵다고 주저앉았으면 이미 많은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다른 방법도 없었다. 지금은 모든 일정이 끝나 다른 병원 일반 외과에 지원할 수도 없었다. 홧김에 그만둔다면 3개월이 아니라 1년을 허비할 뿐이었다.

그동안 함께 일한 동기들과 자신을 가르친 수많은 선배 의사들을 떠나기도 싫었다. 지금까지 잘해 온 것도 그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지훈이 두 주먹을 힘차게 흔들었다.

답답한 마음이 모두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불만과 억울함을 가슴속에 품고 환자를 볼 수는 없었다.

‘그래, 음성에도 일반 외과 과장님이 계시잖아. 전문의가 나 하나 가르치지 못하겠어? 전공의 선배들에게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이 배울 수도 있어.’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길게 내뱉었다.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인데 자신을 기억해 주고 용기를 준 소아과 과장에게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이준영 과장님이라고 하셨나?’

이준영이란 세 글자를 마음에 새긴 김지훈이 가슴을 폈다.

고경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3개월은 음성에서, 다음 3개월은 구미에서 근무한다는 말에 한숨만 쉬었다. 6개월간 얼굴 보는 일조차 힘든 현실을 무척 힘들게 느끼는 것 같았다.

“틈이 나는 대로 연락할게요. 전화 받을 거죠?”

(네. 그럼 언제 출발하세요.)

“내일 아침에 바로 가야 해요. 오늘은 당직인데 잠시 나와서 경아 씨 얼굴도 못 보네요.”

(어떡하죠? 저도 내일 근무예요.)

“어쩔 수 없죠, 뭐. 전화할게요.”

(지훈 씨, 몸조심하세요. 꼭 전화하시고요.)

단지 얼굴을 못 보고 떠날 뿐인데 가슴이 시려 왔다.

얼굴을 찡그리던 김지훈이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정훈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음성에도 병원이 있었냐며 놀랐지만 밝은 목소리였다. 사정을 모른 탓이었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지훈아, 서울 올라오면 전화해.)

지금도 마치 친동생처럼 자신을 대하는 모습에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변한 것은 없었다.

밤이 제법 깊어졌다.

병원으로 돌아가 음성으로 출발할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어둡기만 했던 길이 환하게 보였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김지훈이 귀를 쫑긋거렸다.

“지훈아, 어디 갔었어, 인마. 한참 찾았잖아.”

“일석아, 너 어떻게 나왔어?”

“어떻게 나오긴 걸어서 나왔지. 다들 너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서 뭘 한 거야? 하여간 내가 불안해서 한눈을 못 팔아요.”

“왜 날 기다려?”

“야, 인마. 내일 아침에 너 음성 가야 하는데 이렇게 보낼 수는 없잖아. 최철한 선생님하고 석재 형도 나왔어.”

김지훈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뭐, 최철한 선생님이 나오셨어?”

“그래. 지금 이모네 집에서 기다리고 계셔. 오늘 술 한 잔 사신단다. 30분 내로 너 못 찾으면 3개월 동안 죽은 줄 알라고 그러시더라. 내가 너랑 친한 게 죄지. 빨리 가자.”

급히 포장마차로 달려갔다.

최철한과 유석재가 인상을 썼다.

“김지훈, 당직이 말도 없이 나가? 죽고 싶구나.”

“죄송합니다, 선생님.”

“일단 오늘 너 하는 거 보고 결정할 거니까 두고 보자.”

이경석과 김경수가 서로 자기 옆에 앉으라고 난리를 쳤다.

손일석이 콧방귀를 뀌며 김지훈을 끌어당겼다.

“경석이 형, 지훈이는 항상 내 옆입니다. 경수야, 미안한데 한 칸 옆으로 이동 좀 해 줄래?”

김경수가 투덜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대충 사정을 들었는지 주인아주머니가 말없이 소주와 골뱅이를 내왔다. 김지훈을 보는 눈빛이 어두웠다.

“김지훈, 잘난 게 죄다. 음성을 서울로 바꾸면 네가 이거 아냐?”

엄지를 쭉 펴는 유석재를 보며 김지훈이 머리를 긁었다.

최철한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휴가가 없는 대신 오늘 다 오프니까 마음껏 마셔. 김지훈, 3개월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다. 파이팅!”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리고 이경석 선생님, 앞으로 험한 말 많이 들으실 겁니다. 서운해하지 마시고요.”

“예, 선생님.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럼 한잔하실까요? 지훈아, 먹자. 우리 스타일 알지?”

마치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다들 김지훈을 보며 웃고 있었다. 웃음 속에 담긴 선배들과 동기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랬다. 정말 별일 아니었다.

오프까지 주며 술을 먹을 일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맞서면 3개월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남은 기간 동안 더 열심히 하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신현수라는 막강한 라이벌이 있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힘차게 술잔을 들었다.

“그럼요. 형, 원 샷!”

밤이 깊도록 웃고 떠들었다.

이런 시간이 또 언제 올지 몰랐다.

점점 뜨거워진 가슴이 답답함을 훌훌 날렸다.

술이 약한 김경수가 엎드린 채 중얼거렸다.

“너랑 일하고 싶었는데. 아깝다, 지훈아.”

“왜?”

“너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방 너 잡고 만다.”

손일석도 눈이 풀려 있었다.

“경수야, 지훈이 이 자식, 쉬운 놈 아니다. 그 전에 나부터 넘어라. 근데 그게 될까? 이거 뭐 상대가 돼야 긴장을 하지.”

“뭐? 너 죽을래. 내가 왜 상대가 안 돼. 넌 껌이야, 인마. 바닥에 붙은 껌.”

“껌? 김경수, 은근히 세네. 하지만 지랄을 하세요. 세상에 나같이 스마트한 껌 봤어? 떼기 쉽지 않을 거다.”

“안 되면 내가 대패질을 하고 만다. 씨!”

시시껄렁한 소리에 다들 웃었다.

자정이 훌쩍 넘어 마지막 잔을 비우고 일어났다.

최철한과 유석재가 비틀거리며 김지훈과 어깨동무를 했다.

선배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술기운에 고개를 흔들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오프 줄 줄 알았으면 잠깐이라도 경아 씨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경희는 잘 지내나?’

그러고 보니 지난 3주간 수술실에서 잠깐 얼굴을 본 게 다였다. 연애하기도 참 쉽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출발하기 직전 이혁민 교수가 불렀다.

“기대 많이 하고 있다. 음성이라고 꾀부리지 말고 열심히 해라. 믿는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

“그래, 가 봐라.”

짧은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혁민 교수의 마음이 느껴졌다.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항상 응원하고 격려하는 선배 의사들이 있었다.

김지훈을 보낸 이혁민 교수가 뒷짐을 진 채 물끄러미 창밖을 보았다.

‘이준영 선생님! 이제는 예전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3개월 뿐이지만 김지훈이란 놈을 보냅니다. 정말 기대를 많이 하는 놈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지훈,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가진 걸 모두 쏟아 봐. 이준영 선생님을 웃게 만들 수만 있다면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야.’

그날의 일만 아니었다면, 당시 일개 교수였던 금경태 과장과의 알력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서울 병원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어쩌면 금경태 과장을 위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10년 전 이준영이라는 정말 아까운 인재 하나가 음성에 파묻혔다. 하필이면 그때 해외에 단기 연수를 떠나 있는 바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날 이후 마치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큰 기대를 걸었던 김지훈을 음성으로 보내고 있었다.

‘전화라도 할까? 아서라, 5년이 넘도록 전화조차 안 받은 양반인데 역효과만 날지도 모른다.’

답답한 하루였다.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구미만큼은 아니었지만 체감상 멀었다.

터미널에서 내린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군청 소재지라지만 전형적인 시골 읍내였다.

2월의 막바지 추위가 더욱 매섭게 느껴졌다.

한가로이 서 있는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정문을 지나 병원 건물을 보는 순간 말이 안 나왔다.

달랑 3층 건물 하나!

음성이 읍이라는 걸 생각하면 큰 병원이겠지만, 서울 병원에 비하면 동네 병원에 불과했다.

‘정말 난감하네.’

실망이 앞섰지만, 죽으나 사나 3개월간 근무해야 할 병원이었다. 미리 직원들과 인사도 하고, 분위기도 살필 겸 응급실부터 들렀다.

간호사 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토요일 오훈데 환자라고는 단 4명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푸근한 인상을 가진 간호사가 친절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음성 병원에서 근무하게 된 일반 외과 1년차 김지훈입니다.”

눈만 말똥거리던 간호사들이 벌떡 일어났다.

“어머! 서울에서 오셨어요? 전공의 선생님?”

“예, 맞습니다.”

“어머머! 어머머! 정말 오셨네. 안 그래도 총무과에서 응급실로 오실지 모른다고, 오시면 바로 연락 달라고 했어요. 저 따라오세요.”

간호사 중 한 명이 호들갑을 떨며 직접 안내를 했다.

김지훈을 본 총무과 직원이 마치 귀한 손님이라도 온 것처럼 자리를 권하고는 직접 커피를 내왔다. 대학 병원에서는 발에 걸리는 것이 인턴이고, 전공의인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총무과장 최치수입니다. 오늘 오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습니다.”

직원도 아니고 과장이 직접?

“일반 외과 1년차 김지훈입니다.”

“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일단 숙소는 3층에 마련했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피곤하실 텐데 짐부터 푸시죠. 근무는 월요일부터 하시면 됩니다.”

김지훈에 대한 말을 들었을 리가 없었다. 으레 하는 말이겠지만, 분에 넘칠 정도로 정중한 태도였다. 병원 규모가 작고 의사를 구하기 쉽지 않은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번 주말부터 응급실에 근무할 사람이 없다고 들었는데요.”

“응급실 환자가 많지도 않고, 이번 주는 과장님들이 직접 봐주시기로 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에 이어 신경외과와 픽스턴을 동시에 돌아 서울에서는 거의 쉬지 못했다.

순간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난 1년차잖아. 음성이라고 일까지 안 하면 정말 하나도 못 배운다.’

과감히 유혹을 뿌리쳤다.

“아닙니다. 바로 근무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셔도 되겠습니까?”

“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죄송한데, 이준영 과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연락이 가능할까요?”

“이준영 과장님이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최치수 과장이 부리나케 연락을 취하고는 정중하게 전화기를 건넸다. 이 정도면 전문의나 돼야 받는 대접이었다. 도리어 부담이 될 정도였다.

“1년차 김지훈입니다.”

(누구?)

“1년차 김지훈입니다, 과장님. 지금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김지훈? 알았다. 오늘부터 근무할 거냐?)

“예.”

(입원 환자는 별거 없고, 응급실 근무는 간호사에게 물어봐. 수술 환자 말고는 연락하지 마. 그리고 네가 치료할 수 있는 환자만 입원시켜.)

뚜뚜뚜뚜!

반갑다는 소리는커녕 할 말만 하고 툭 전화를 끊었다.

엄청 무뚝뚝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휴우! 시작부터 조짐이 이상하네.’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최치수 과장이 숙소까지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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