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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7화 (107/1,329)

제6화 어디에 있든 난 의사다 (1)

그 이상은 알지도 못했고, 수련 병원이 아닌 이상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 병원에 우리 과가 이번에 처음으로 전공의를 파견하기로 했다. 여러 방안이 있었지만, 현실적인 여건도 있고 해서 고심 끝에 널 보내기로 했다.”

“저를요?”

이혁민 교수가 눈빛을 굳혔다.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음성 병원에 도착하면 알게 되었기에 미리 실망을 줄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재단과 병원의 결정이었다.

“정형외과 4년차와 마취과 3년차도 간다. 음성 병원을 살린다는 취지 때문에 가는 거니까 다른 생각 말고 열심히 일해라. 니가 원래 서울 구미를 돌게 돼 있었지만 그만큼 네 능력을 믿고 보내는 거니까 다른 생각 하지 마라.”

최고 성적을 받았다는 말이었지만 위안이 될 리가 없었다.

아니, 김지훈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저 혼자 가는 건가요?”

“그래. 더 이상 인원을 뺄 여력이 없다. 그래서 네 어깨가 더 무겁다. 각오 단단히 하고. 최철한.”

어안이 벙벙한지 최철한이 미처 대답을 하지 못했다.

“최철한!”

이혁민 교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예? 예, 과장님.”

“음성 병원에서의 근무도 수련의 연장이다. 1년차가 해야 할 것들 빠짐없이 단단히 챙겨 줘라. 김지훈, 음성에서도 100일 당직은 그대로 서야 한다. 알았나?”

“예.”

정신이 멍한지 김지훈의 대답에 힘이 없었다.

“이번 주 픽스턴 끝나면 원래 휴가를 며칠 주는데, 김지훈이는 음성 병원에서 바로 근무를 시작한다. 그래서 니들도 휴가 없이 바로 픽스턴으로 근무를 연장하기로 했다. 다들 나가 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이혁민 교수가 최철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만 멀뚱거리던 김지훈이 물었다.

음성 병원이 정식 트레이닝 병원이 되는 걸까?

“선생님, 그러면 저 다음으로는 누가 음성에 갑니까?”

이혁민 교수가 나직한 신음을 터뜨렸다.

“음,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 그런 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고, 니는 다른 생각 말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의국에서 나온 김지훈은 한숨만 쉬었다.

난데없이 트레이닝 병원도 아닌 음성 병원에 3개월간 파견을 가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마른침을 삼키며 손일석에게 물었다.

“일석아, 너 음성 병원에 대해 아는 거 있어? 거기, 우리 병원 브랜치는 맞냐?”

손일석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씹었다.

“말 좀 해 봐.”

거푸 재촉을 받고 나서야 손일석이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모르지만, 음성은 그냥 개인 종합 병원 수준이라고 들었어. 솔직히 2년차도 없이 거기서 시작하라는 게 이해가 안 돼.”

“정식 트레이닝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지?”

“씨팔!”

손일석이 대답 대신 욕만 했다.

“일석아, 욕하지 말고 찬찬히 얘기 좀 해 봐. 트레이닝도 안 되는 병원에 왜 가라고 하는 거야? 너 인마, 병원 일에는 빠삭하잖아. 뭐 들은 거 없어?”

그걸 누가 알겠는가?

가장 성적이 좋다면서 음성으로 보낸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김지훈이 심각한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잠자코 앉아 인상을 찌푸리던 이경석이 헛기침을 했다.

“그 병원은 예전에 가 봐서 내가 잘 알아. 과라고 해야 고작 6개야. 그 정도 규모의 병원에 전공의를 보낼 수는 없어. 신현수, 혹시 너 뭐 아는 거 없어? 음성 병원이 전공의를 보낼 병원이 아니잖아.”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야, 솔직하게 말해 봐. 들은 것도 없어? 인턴도 파견하지 않았던 곳에 지훈이를 보내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신현수도 오늘 처음 들은 말이었다. 그런데 모두들 마치 알고 있지 않았냐는 듯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화가 났다. 이런 시선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저도 오늘 처음 들었고, 이미 모른다고 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참느라 신현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왜 이런 의심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손일석이 눈을 부릅뜨는 이경석을 막았다.

신현수가 차갑기는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경석이 형, 현수도 몰랐을 거예요.”

답답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잘못이 있다고 해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유나 알면 속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이혁민 교수에게 묻고 싶었지만 통보를 한 당사자였다.

김지훈은 아무 말도 없이 병동을 나섰다.

누구도 잡지 못했다.

손일석만이 조용히 뒤를 따를 뿐이었다.

정갑수가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투덜거렸다.

“씨팔! 이거 뭐야. 스케줄도 더러운데 왜 휴가까지 못 가게 해? 재수 없으려니까 정말 별일이 다 생기네. 아니, 김지훈 저 새끼가 음성을 가지 말아야 한다는 법 있어? 왜 우리까지 피해를 봐야 돼.”

이경석이 발끈했다.

“정갑수, 너 죽고 싶어? 지금 이 상황에서 휴가 소리가 나오냐. 이 새끼가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경석이 형, 내가 못할 말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래요. 나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 아는데, 나도 마찬가지예요. 같은 1년차끼리 서로 건들지 맙시다.”

“뭐야, 이런 개새끼가 있나?”

이경석이 벌떡 일어나며 주먹을 쥐자 김경수가 급히 팔을 잡았다. 신현수가 정갑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갑수 형,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숙소에 가 있어. 경석이 형, 이혁민 선생님 아직도 의국에 계세요.”

이경석이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잠시 전화기를 보던 신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보낼 만하니까 보냈겠지.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일도 아니었다.

김지훈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재단과 병원이 내린 결정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전공의도 안 된 인턴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사실 신현수도 답답했다.

음성이 아니었다면 김지훈은 서울에 이어 구미에서 근무했을 것이다. 그 말은 곧 인턴 성적이 더 우수했다는 말이었다. 금경태 과장에게 다른 성적에 대해 들었다. 결국 면접이 최종 성적을 좌우한 것이다.

면접에 영향을 주는 것이 무얼까?

붙임성? 친화력?

무엇이 됐든 인간관계는 김지훈이 훨씬 좋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그런 사실이 위안이었다.

‘결코 실력으로 뒤진 게 아니다. 김지훈, 6개월 후 천안에서 만나자. 그땐 정말 확실하게 보여 주마.’

이제 전공의가 된 이상 김지훈에게 절대 밀릴 수 없었다.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지훈은 틈만 나면 음성 병원에 대해 알 만한 선배들을 찾아다녔다. 최소한의 조언이라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음성으로 간다는 말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음성 병원에 대해 알면 알수록 화가 났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내 능력을 믿어서 보낸 다고? 그게 말이 돼?’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던 김지훈이 웃음과 말을 잃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환하게 빛났던 길이 갑자기 어둠에 휩싸이며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음성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손일석이 챙겨 주지 않았다면 아예 손을 놓았을지도 몰랐다.

마지막 근무 날 짐을 싸던 김지훈이 병원 밖으로 나갔다.

따라 나오려는 손일석까지 막았다.

혼자 거리를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누구와도 상의를 할 수 없었다.

고경아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풀릴까?

아니면 정훈철에게 하소연이라도 해 볼까?

불쑥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해결할 방법도 없는데, 얼굴을 마주해 봐야 불편한 마음만 줄 것 같았다.

손일석과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실까?

술에 취하면 주정을 부리다 울 것 같았다.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8명이나 되는 1년차 중 가장 성적이 좋은데, 왜 음성으로 가야 하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없는 이혁민 교수까지 원망스러웠다.

정처 없이 걷던 김지훈의 눈에 공중전화 박스가 보였다.

처음 응급실에서 환자의 죽음을 경험한 날, 그리운 이들에게 전화를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전화기를 든 김지훈이 뿌연 유리 너머로 비치는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거리를 비추는 밝은 불빛 사이로 별 2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어떻게 해야 하죠? 정말 열심히 살아왔는데 지금은 너무 힘드네요. 왜 내가 음성으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요란한 경적 소리가 밤거리를 울렸다.

“대답 좀 해 주세요. 이렇게 살면 되는 거 아니었나요? 제가 무리한 꿈을 꾸는 것도 아니잖아요.”

터벅터벅 어깨가 쳐진 중년 신사가 지나갔다.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할까?

술기운이 약간 오른 취객들이 웃고 떠들었다.

저들은 또 무엇이 그렇게 즐거울까?

김지훈이 전화기를 든 채로 머리를 감쌌다.

화가 나고 괴로워 미칠 것 같았다.

“저 다른 욕심 없어요. 환자를 보고 싶고, 제대로 치료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배워야 하잖아요. 근데 음성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대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3개월은 1년차에게 3년과 같은 시간이에요. 그 시간을 어디서 다시 찾죠?”

음성 병원이 끝은 아니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부단히 노력하면 부족했던 부분을 다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외과 수련이 그렇게 만만하진 않았다.

한발 뒤처지는 순간 신현수는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신현수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병원에 남고 싶다는 꿈은 접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지금처럼 허무하게 기회를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를 가든 환자를 볼 것이다. 하지만 대학 병원과 일반 병원은 차원이 달랐다. 열보다는 백을 배우고 이룰 수 있는 병원이 그만큼 더 많은 가능성을 줄 것이다.

전화기를 든 김지훈의 손이 덜덜 떨렸다.

서러움인지, 화가 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환자만 생각할까요? 이만큼 왔으니 만족할까요? 어머니, 아버지, 전 최고의 써전이 되고 싶어요. 그 꿈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 누군가 김지훈을 불렀다.

“자네, 김지훈 아닌가?”

소아과 신상민 과장이었다.

김지훈이 얼른 눈가를 훔치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음! 그래. 자네, 음성으로 간다며?”

“예? 예, 그렇게 됐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든가?”

김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억울할 것이다. 좋은 성적으로 입사를 했는데 듣도 보도 못한 오지로 발령을 낸 꼴이었다. 일반 기업이었다면 당장 사표를 써도 모자랄 일이었다.

입술을 모은 채 김지훈을 보던 소아과 과장이 갑자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결코 김지훈의 마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지만 왠지 편안하게 보였다.

마치 걱정할 일이 없다는 것 같았다.

소아과 과장 역시 혁신 위원회 위원인 까닭에 김지훈이 음성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도가 유망한 김지훈을 보낸다는 말에 우려를 표명하며 반대를 했다. 그런데 금경태 과장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평소 성향을 생각할 때 뭔가 꿍꿍이가 있을 법했다. 예전 같았으면 김지훈은 당연히 금경태 과장의 파트를 돌았을 것이다. 그런데 트레이닝이 불가능한 음성 병원으로 보낸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평소 친분이 깊었던 재단 이사에게 금경태 과장이 장례식장과 관련이 있다는 말을 얼핏 들었다. 김지훈 때문에 그 문제가 방송을 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아귀가 딱 맞았다.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라지만, 10년 전에도 그러더니 참 치졸한 사람이야.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매서운 신동석 이사가 왜 그런 사람을 중용하는지 모르겠군.’

비록 면접 때 처음 봤지만 마음에 드는 답을 했던 김지훈이었다. 자칫 실망해 뜻이 꺾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득 떠오른 기억에 생각을 바꿨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보다니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김지훈 선생, 세상은 말이야, 무조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는 법이네. 이참에 자네의 마음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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