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왜 내가! (2)
“방안이라니요?”
“일단 3개월간 정형외과에서는 혼자 수술이 가능한 4년차를 파견하고, 마취과는 3년차를 보내기로 했어. 다행히 두 과에서 모두 동의를 하더군. 그런데 말이야, 그 결정을 들으신 이사장님께서 한 가지 제안을 하셨어.”
전후 사정과 금경태 과장의 태도를 볼 때 일반 외과에서도 누군가를 파견해야 한다는 말이 분명했다.
“그럼 우리 과에서도 한 명을 보낼 생각이십니까? 이준영 과장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런데 공교롭게도 응급실 문제까지 겹쳤어. 알다시피 응급실을 커버할 의사가 없질 않나. 병원 시스템을 시험도 해 볼 겸 첫 3개월 동안만 1년차 중 한 명을 보냈으면 하네.”
이혁민 교수가 깜짝 놀랐다.
“1년차라니요? 이제 막 인턴을 마쳤는데, 안 됩니다. 게다가 1년 단위의 정식 트레이닝도 아니고, 3개월만 보내는 거라면 차라리 2년차나 3년차를 보내시는 것이…….”
“허어! 이 교수. 그래서 자네에게 항상 주변을 살피라고 말하는 거야. 어느 병원에서 전공의를 보내야겠나? 그나마 여력이 있다면 서울뿐이야. 그리고 오상익 교수와 임동완 교수 파트에서 사람을 빼면 동의를 하겠나?”
금경태 과장과 오상익 교수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과 다툼을 생각하면 힘든 일이었다. 과 내 힘 싸움에는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었지만, 서열에서 밀리는 이혁민 교수가 함부로 말 할 상황도 아니었다.
금경태 과장이 이혁민 교수의 표정을 주시하며 말했다.
“재단도 재단이지만, 우리도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해. 지금은 서울도 한 명이 아쉬워. 이 상황에서, 이제 알아서 일 좀 하는 2~3년차를 빼면 환자 보기 정말 힘들지 않겠나? 4년차를 보내는 건 아예 말이 안 되고. 그리고 음성 병원에 무슨 환자가 있겠어? 1년차 정도면 충분해.”
일견 합당해 보였지만 1년차는 환자를 보기 이전에 일반 외과 의사로서의 기본을 닦아야 할 때였다. 초반 3개월 동안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다면 자칫 수련 기간 내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과장님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1년차들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는 것이…….”
금경태 과장이 인상을 쓰면 말을 잘랐다.
“어허! 나라고 그걸 모르겠나. 하지만 재단의 결정이고, 병원 운영도 생각해야지. 솔직히 이 상황에서는 1년차 한 명보다 음성 병원이 더 중요해. 혁신 위원회에서도 이미 보내기로 결정된 일이니까 따를 수밖에 없어.”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첫 3개월이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1년차를 보낸다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것도 한시적이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왈가왈부해 봐야 이미 재단과 혁신 위원회에서 결정했다면 번복할 리가 없었다.
“그럼 누구를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고민을 많이 했네. 그런데 말이야, 생각을 해 보니까 1년차가 음성에서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더군. 응급실은 물론이고 외과 쪽은 다 커버를 해야 해. 더군다나 인턴을 3명 정도 파견할 건데, 기본적인 업무는 가르쳐야 하지 않겠나? 웬만한 실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어.”
이혁민 교수의 안색이 변했다.
1년차 중 4명이 서울에 배정된다.
그중 신현수와 김지훈이 가장 뛰어났다. 물론 손일석도 있지만 항상 최고를 원하는 금경태 과장의 눈에 들지는 못했을 테고, 남은 한 명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설마 김지훈을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금경태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이군. 신현수와 더불어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어. 사실 면접까지 하면 더 뛰어나다고 할 수도 있지. 나도 부인할 수가 없더군.”
이혁민 교수가 답답한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과장님, 말씀하셨다시피 김지훈은 상당히 뛰어납니다. 기본만 잘 세워 주면 우리 과의 기둥이 되고도 남습니다.”
“알지. 맞는 말이야.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게. 평범한 1년차를 보냈다가 문제가 생기면 회복할 방법이 없어. 반면 김지훈처럼 뛰어나다면 3개월 정도 늦는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거야. 솔직히 말해 신현수를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단순히 일반 외과 전문의를 키우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지훈의 경우는 달랐다. 될 성부른 나무는 새싹부터 알아본다고, 잘 키우면 교수로 임용되는 것을 떠나 일반 외과의 큰 기둥이 될 수도 있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진 이혁민 교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어떻게든 결정을 바꾸고 싶었다.
열 손가락 중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지만, 굳이 골라야 한다면 떠오르는 1년차가 있긴 했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핀 것은 아니지만, 일반 외과를 왜 지원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일단 기본적인 자세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은 확실했다.
‘전공의가 있으면 이준영 선생님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어. 후우! 정말 입장이 난처하군. 하지만 전문의로 만족할 놈은 하나뿐인데.’
다른 사람의 인생이다. 함부로 좌지우지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는 가야 한다. 음성 병원 일반 외과 과장인 이준영 과장이 마음에 걸렸지만 최악의 선택은 피해야 했다.
“과장님,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음성 병원 정도의 로딩이라면 차라리 정갑수가 어떻겠습니까?”
“정갑수?”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찡그리며 코웃음을 쳤다.
‘정갑수? 이 교수, 자네 정말 주변을 못 보는군. 보사부 아들을 음성에 보냈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 하긴, 자네의 이런 성격 때문에 내가 한결 마음이 놓이긴 해.’
속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놈 생각하면 내 머리가 다 아파. 꼴찌야, 꼴찌. 한영철이 아니었으면 우리 과에 들어오지도 못했어. 그런 놈을 음성에 보냈다간 욕만 먹을 게 빤해. 보사부 국장 아들이니까 눈 딱 감고 편하게 돌려서 일반 외과 전문의만 만들어 주면 돼.”
신현수와 함께 감싸고 돌 줄 알았는데, 이혁민 교수의 입장에서는 정말 뜻밖이었다.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자 금경태 과장이 식은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나도 고민이 많았네. 내 결정보다 더 좋은 방안이 있다면 말해 보게. 합당하다면 내 얼마든지 수용하겠네. 단, 이 교수가 우려하는 것처럼 3개월의 공백이 문제가 될 실력이면 안 돼. 솔직히 우리가 누구 한 명만을 아낄 수는 없지 않은가. 나중에 보면 다 제자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뾰족한 답이 없었다. 이혁민 교수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의 방안을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고맙네. 그럼 한 가지 부탁 좀 하겠네. 1년차 스케줄은 자네가 통지하게. 서울이 4명에서 3명으로 주니까 오상익 교수에게도 잘 설명하고. 내 말은 일단 색안경부터 끼고 들어서 말이야. 다들 우리 과를 위하는 내 마음을 몰라.”
한탄처럼 내뱉는 말에 이혁민 교수가 조용히 진료실을 나왔다. 막 문을 열려는 순간 금경태 과장이 불렀다.
“아! 한 가지 잊었네. 이번 주에 인턴 근무가 다 끝나지?”
“예, 마지막 근무입니다.”
“정식 근무 전에 며칠 휴가가 있을 텐데, 음성은 그럴 여유가 없어. 이번 주말부터 응급실이 빈다더군. 김지훈에게 잘 설명해서 바로 음성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조치하게. 그리고 1년차 스케줄 가져가야지.”
마음이 무거워 스케줄까지 잊었다.
받아 든 스케줄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병동으로 향했다.
내막이야 어찌 됐든, 음성에 1년차를 보내는 것은 결단코 반대였지만 이를 관철할 힘이 없었다.
처음으로 정치라는 것을 떠올렸다.
‘나도 눈도장을 찍어야 하나. 진료만 열심히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공연한 생각일 뿐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신현수가 김지훈에게 신경을 쓰는 것 같았는데 마침 음성 병원 문제가 거론되다니, 아주 잘됐어. 3개월이면 만회하기가 쉽지 않겠지. 그래서 아무리 뛰어나도 처신을 잘해야 하는 거야. 인턴 주제에 장례식장 문제를 거론해? 내가 손해 본 만큼은 책임을 져야지. 그게 사회야. 이준영이야 어차피 퇴물이 됐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김지훈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자신의 눈에 들어야 했다. 어차피 수족처럼 부릴 전공의들은 넘쳐 났다. 이혁민 교수조차도 필요가 없었다면 어떻게든 대가를 치르게 했을 것이다.
‘이혁민, 너도 이번 일에 일조를 했지만 아직은 쓸모가 많아. 지금처럼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일만 열심히 해. 그러면 별 탈 없이 병원 생활을 마치게 될 거야.’
문득 10년 전의 생각을 떠올린 금경태 과장이 피식 웃었다.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이준영을 음성 병원에 묻었다.
자신의 앞날을 방해했거나 밉보인 놈들을 모두 음성 병원으로 보내다니, 묘한 일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이혁민 교수가 오질 않았다.
“바쁘신 모양이네. 지훈아, 이젠 가야겠다. 이혁민 교수님 보면 인사 못 드리고 가서 죄송하다고 대신 말씀 좀 드려 줘. 너도 파이팅하고. 서울에서 구미 가는 스케줄은 당연히 너겠지?”
“그걸 누가 알겠어. 꼭 말씀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음 달에 보자.”
김지훈이 한영철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마침 이혁민 교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이혁민 교수가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만 끄덕이고는 의국으로 들어갔다. 곧 교육 치프인 최철한이 유석재와 함께 불려 들어갔다. 한참 후, 모두 들어오라는 전화가 왔다.
스케줄이 발표됐다.
서울부터 근무한단 소리에 손일석과 김경수가 활짝 웃으며 김지훈을 보았다. 이경석이 유창수, 오성민과 함께 천안부터 돌고, 정갑수는 구미에 배정됐다.
‘뭐야, 초반 3개월을 나 혼자 돌라구? 에이, 정말. 아버지는 과장님한테 말한다고 하더니 도대체 뭐 한 거야? 이거 바꿀 수 없나.’
똥 씹은 표정을 짓던 정갑수가 이혁민 교수의 말에 잔뜩 움츠렸다.
“정갑수, 불만 있나?”
“아닙니다.”
“구미 가서 일 똑바로 해라. 니 인턴 초반에 있었던 일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예, 과장님.”
어떻게든 스케줄을 바꾸고 싶었지만 아버지에게 그럴 힘까지는 없었다. 푹 숙인 얼굴에서 불만이 떠나질 않았다.
이제 남은 자리는 서울의 두 자리뿐이었다.
김지훈이 신현수와 눈을 마주쳤다.
서울 다음에 누가 구미를 가는지는 자존심 싸움이었다.
결코 지고 싶지 않은 싸움이었다.
“신현수, 니 스케줄이 묘하다. 서울, 천안, 천안, 서울이다. 서울이나 천안이나 구미보다 훨씬 힘든 곳이니까 고생 좀 해야겠다.”
신현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지훈에게 밀리다니,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손일석이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슬며시 김지훈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고 있었다.
너무 자존심이 상해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혁민 교수가 마지막으로 남은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예, 과장님.”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비록 인턴이지만, 모든 조건에서 비교도 되지 않는 신현수를 앞선 것이다. 지금처럼 열심히 하기만 하면 전공의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혁민 교수의 표정이 이상했다.
‘왜 표정이 안 좋으시지?’
문득 묘한 기분이 든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동기들을 보았다. 손일석은 역시 최고라는 미소를 보냈고, 김경수도 탁자 밑으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냥 기우일 뿐이었다.
김지훈이 보일락 말락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이혁민 교수의 말을 기다렸다.
“우리 재단 산하에 음성 병원이 있는 건 아나?”
“음성 병원이요?”
지역 발전에 기여한다는 모토 아래 의료 사각지대였던 음성에 병원을 지었다는 말은 들었다.
김지훈이 알고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