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5화 (105/1,329)

제5화 왜 내가! (1)

잠시 짬이 난 김지훈이 신경외과 전공의에게 허락을 구했다.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달려가 덧가운을 입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이혁민 교수의 집도하에 한영철의 수술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일반 외과 수술실 근무인 고경아가 있었다. 살짝 눈인사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수술을 지켜보았다.

딱 때맞춰 들어왔다.

십이지장과 위의 연결부가 막 분리되고 있었다.

잠시 후, 3분의 2에 달하는 위가 절제됐다.

그제야 이혁민 교수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프로즌 나가자. 어? 김지훈이, 너 여기 왜 왔나? 밖에 무슨 일 있나?”

“아닙니다.”

이유가 따로 있을까?

이혁민 교수가 간호사에게 절제된 위를 건네며 김지훈에게 고갯짓을 했다.

“김지훈 선생, 빨리 가서 결과 받아 와라.”

절제된 위를 받아 든 김지훈이 부리나케 병리실로 향했다.

프로즌(Frozen)!

암 수술 시 절제된 부위에 암 조직이 남아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이를 위해 수술 중 조직이 나오면 병리과에서 절제된 면을 몇 군데 떼어 내어 임시로 조직 검사를 한다. 이를 프로즌 바이옵시(frozen biopsy:냉동 생검)라고 한다.

불과 15분 정도면 검사 결과가 나온다.

암 세포가 발견되지 않으면 모두 절제가 된 것이다. 반대로 암 세포가 남아 있으면 더 광범위한 수술을 요한다. 조기 위암이니 당연히 모두 제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김지훈이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초조해했다.

해부 병리 교수와 전공의가 조직을 확인했다.

“깨끗해.”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숨도 쉬지 않고 수술실로 돌아간 김지훈이 헐떡거리며 결과를 전했다.

“선생님, 깨끗하답니다.”

“그래. 잘됐네. 진행하자. 김지훈, 수고했다.”

잠시 멈췄던 수술이 다시 진행됐다.

시계를 본 김지훈이 고경아에게 속삭였다.

“수술 끝나면 신경외과 병동으로 연락 좀 줘요. 아니면 방송을 하든가.”

“방송해도 돼요?”

“괜찮아요. 부탁해요.”

간호사와 충분히 할 수 있은 말이었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특별히 중요한 일들도 없었지만 온 신경이 수술실로 쏠렸다. 어느새 시곗바늘이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지훈이 안절부절못하자 전공의가 빨리 퇴근하라는 손짓을 했다.

수술실로 향하는 동안 김지훈을 찾는 방송이 나왔다.

지금 막 수술이 끝난 것이다.

헐레벌떡 수술실 앞에 도착한 김지훈이 숨을 골랐다.

한영철의 어머니가 두 손을 꼭 잡은 채 서 있었다.

“어머니, 수술 끝난 모양입니다.”

“그래요? 잘 끝났대요?”

“중간에 확인하는 것이 있는데, 이혁민 교수님께서 잘됐다고 하셨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한시도 수술실 앞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 다른 병도 아닌 위암으로 수술을 받으니 어머니의 마음이 오죽할까?

정중하게 인사를 한 김지훈이 수술실로 들어갔다.

이미 수술이 모두 끝나 한영철이 회복실로 옮겨진 후였다.

마취가 풀려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신현수와 마취과 픽스턴을 도는 윤서연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윤서연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서연이도 있었구나. 현수야, 수술 잘 끝났지.”

“잘 끝났어.”

김지훈이 한영철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에 눈을 뜬 한영철이 김지훈을 보고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영철아, 수술 잘 끝났어. 숨 크게 쉬고 조금만 참아.”

“지… 지훈아, 우리 엄마는?”

“지금 밖에 계셔. 걱정하지 마.”

잠시 후, 한영철의 상태를 확인한 마취과 전공의가 병실로 가도 좋다는 사인을 냈다. 김지훈이 윤서연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하고는 한영철을 직접 병실로 옮겼다.

주렁주렁 매달린 온갖 줄과 아직 마취에서 덜 깬 한영철을 본 어머니가 입가를 막았다. 한영철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엄마, 나 괜찮아요.”

“그래, 영철아. 우리 아들, 고생했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간호사들이 바삐 움직였다.

김지훈이 수술 후 처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던 한영철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병실에서 나왔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어머니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픽스턴의 일과는 바빴다.

1년차를 따라 거의 모든 일을 똑같이 했다.

응급실에 환자가 있으면 함께 내려갔고, 직접 할 수 없는 일들은 참관해야 했다. 잠깐 시간이 날 때마다 한영철에게 들른 김지훈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수술 후 회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열심히 걷고 움직인 덕에 한영철의 회복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한영철이 드디어 물을 마실 수 있게 됐다.

소화관을 수술한 환자가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은 본격적인 회복에 접어들었다는 말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는 모습에 김지훈이 유독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 밤, 신현수가 김지훈에게 엉뚱한 말을 했다.

“김지훈, 너 학교 다닐 때 한영철이랑 친했어?”

“친했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

“일석이만큼 친했던 거야?”

김지훈이 턱을 만지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석이가 조금 예외기는 하지만, 친구끼리 더 친하고 덜 친한 게 어디 있어. 6년 동안 같이 술 마시고 놀았는데 다 친구지.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

“아니다.”

신현수가 심각한 기색으로 돌아섰다.

한영철이 사람도 좋고 친구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김지훈과 특별히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다. 손일석도 비슷한 말을 했다. 도리어 김경수와 더 친했을 것이란 말까지 들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누구보다도 한영철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가끔 착 가라앉은 눈으로 한영철을 걱정할 때는 언뜻 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수술실에 들어와 프로즌(Frozen:임시 조직 생검)을 챙기고, 수술 후에도 틈만 나면 한영철을 찾는 모습이 생소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영철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었지, 다른 환자에게도 무척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가끔은 환자의 신변잡기에 불과한 일까지 듣고 와 진지하게 말을 하곤 했다.

‘이게 김지훈이 뛰어나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인가? 그렇다고 내가 환자에게 신경을 덜 쓰는 것은 아니잖아. 치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의의로 결론은 간단했다.

사고무친인 김지훈은 감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세하지는 않지만 부모에 대한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에게 감정을 개입시키면 안 된다. 자칫 사적인 감정은 판단력까지 흐리게 할 수 있었다.

감정보다는 냉철한 이성과 판단이 더 필요하다고 배웠다.

인턴은 모든 과를 돌지만, 전문적인 영역을 깊게 경험하거나 직접적인 치료를 담당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인턴 때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인턴과 전공의는 달라. 환자에 대한 사적인 감정보다는 이성과 지식이 더 필요해. 그래야 최고의 써전이 될 수 있는 실력을 가장 빠르게 쌓을 수가 있어.’

잠시나마 초조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놓친 것이 아니라, 인턴의 한계가 만들어 낸 일시적인 결과라고 믿었다. 좋고 나쁨을 떠나 한영철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더욱 확신하게 됐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신현수가 달력을 보았다.

내일이면 금경태 과장이 신임 1년차들의 1년 스케줄을 결정할 것이다. 자신이 서울-구미-천안-서울을 돌 것이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신현수는 선배 의사들이 말한 감정이란 단어를 정확하게 이해한 것일까?

과연 의사들은 감정을 갖고 환자를 대하면 안 되는 것일까?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딜레마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명확한 답이 나온 질문일지도 몰랐다.

이제 픽스턴도 불과 5일밖에 안 남았다.

이미 발표되었어야 할 스케줄이 아직도 안 나왔다.

다들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특히 누가 서울부터 시작하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최상의 코스를 누가 돌지는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데다 이사장의 아들인 신현수의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남은 세 자리 중 하나도 확실했다. 하지만 김지훈을 빼고도 아직 두 자리가 남았다. 가깝게는 자존심 싸움이자, 멀게는 장래가 걸린 일이었다. 일단 인정을 받고 시작하면 무엇을 원하든 한발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김지훈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신현수는 훌륭한 라이벌이었고, 반드시 앞서고 싶은 상대였다. 내심 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모든 것을 떠나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한영철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퇴원을 하게 된 것이다.

함께 짐을 싸는 김지훈을 보던 한영철이 웃었다.

“지훈아, 한 달 후에 또 보겠네.”

한영철에겐 여섯 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가 남았다.

심한 경우 밥도 먹지 못할 정도로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를 잘 알면서도 웃고 있는 한영철이 고마웠다. 한영철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김지훈이 고마웠다.

김지훈이 힐끗 눈길만 주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서울부터 근무해야 볼 수 있지.”

“뻔한 거 아냐? 너랑 현수랑 일석이. 이렇게 셋은 무조건 서울이라고 본다. 남은 한 명은 경수와 성민이 중 누굴까?”

“그걸 누가 알겠어. 사실 누가 되도 다 좋긴 하지.”

“부럽다. 너랑 같이 신나게 일해 보고 싶었는데.”

한영철이 일반 외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전 내년에 1년차와 2년차로 보자는 말은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은 한영철도 잘 알고 있었다.

위암 수술을 받은 몸으로 가장 힘들다는 외과 전공의 수련을 견딜 수는 없을 것이다.

‘영철아, 나도 너랑 함께 일하고 싶었다.’

김지훈이 묵묵히 짐만 꾸렸다.

한영철의 어머니가 퇴원 수속까지 모두 끝냈다.

이혁민 교수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 했다.

혹시나 찾을지 몰라 신경외과 병동에 연락을 한 김지훈이 함께 외래로 내려갔다.

진료하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이혁민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외래 앞 의자에 앉아 한영철과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며 이혁민 교수를 기다렸다.

그 시간, 이혁민 교수는 금경태 과장과 마주하고 있었다.

“과장님, 부르셨습니까?”

“이 교수, 앉지. 잠깐 시간 좀 냈으면 좋겠는데.”

“다행히 지금은 예약된 환자가 없습니다, 과장님.”

금경태 과장이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잠시 뜸을 들였다.

“다름이 아니고, 신임 1년차들 스케줄을 정해야 하는데 문제가 좀 있었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니까 따라 주길 바라네.”

오늘따라 평소와는 다르게 상당히 정중한 말투였다.

평소 다소 고압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스케줄에 문제가 있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해마다 반복되는 일로 고민할 것이 없었다. 성적대로 스케줄을 배정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정보다 이틀 이상이나 결정이 미뤄졌다.

문제가 있다면 한 가지뿐이었다.

‘혹시 김지훈과 신현수의 스케줄 때문에 이러시나?’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문제로 금경태 과장이 양해를 구할 리가 없었다.

누구나 이사장의 아들인 신현수를 더 배려할 것이란 생각을 했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교수, 이번에 병원 혁신 위원회에서 말이야, 음성 병원 문제가 나왔어.”

스케줄을 말하다 말고 엉뚱한 문제를 거론하자 이혁민 교수가 더욱 의아해했다.

“음성 병원이요?”

재단은 3개 대학 병원 이외에도 음성 병원을 하나 더 운영하고 있었다. 재단은 같았지만 음성 병원은 대학 병원이 아니라 조그만 개인 종합 병원 정도의 규모에 불과했다.

진료 과목도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마취과, 방사선과로 인가에 필요한 최소 요건만 갖춘 병원이었다. 따라서 전공의는 물론 인턴들도 파견할 상황이 아니었다.

진료는 둘째 치고, 대학 병원의 주요 기능인 전공의 수련과 교육을 시행할 시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애초에 의료 지원 사업으로 시작된 병원이고, 기본적인 진료는 가능하기에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없었지. 그런데 말이야, 이번에 신동석 이사장님께서 음성 병원을 보다 발전시키길 원하신다는 말씀을 하셨네.”

재단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왜 이 시점에서 음성 병원을 거론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재단이나 혁신 위원회에서 결정할 일이지 않습니까. 스케줄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관련이 있으니까 계속 들어 봐. 하필이면 이번에 정형외과 과장과 마취과 과장이 한꺼번에 그만둔다고 하더군. 당장 사람을 구할 수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혁신 위원회에서 한 가지 방안을 내놨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