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픽스턴(fix-tern) (3)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고 했다. 과장님이 최종 결정을 내리시겠지만, 이변이 없는 한 김지훈, 신현수, 손일석이 돌지 않겠나. 나머지 한 명은 나도 모르겠다.”
“일단 3월 달 서울 텀은 걱정이 없겠는데요.”
“그래도 1년차는 1년차다. 확실히 해.”
3월 달에도 서울에서 근무하는 최철한과 유석재가 눈을 마주치며 씨익 웃었다. 1년차들이 엑설런트하면 일하기가 정말 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철한이 서울 텀을 물어본 이유가 또 있었다.
1년차들에게 근무 스케줄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서울 병원은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왔다. 대부분 암 환자이거나 큰 수술을 요했다. 그 덕에 일반 외과에 해당되는 주요 질환을 상당히 많이 경험할 수 있었다.
또한 가장 먼저 개원해 그간 축적된 경험으로 체계적이고도 엄격한 전공의 트레이닝을 시행했다.
반면 천안 병원은 외상 센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물론 주요 질환 수술도 많았지만, 외상으로 인한 수술이 두세 배가 넘을 정도였다. 일반 외과의 또 다른 축인 외상을 정말 원 없이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마지막으로 구미 병원은 마이너 수술이 많아 전공의들이 수술을 받을 기회가 많았다. 따라서 1년차 때 반드시 거쳐야 할 병원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가장 선망하는 근무 스케줄은 서울-구미-천안-서울을 순차적으로 도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기본과 주요 질환을 본다.
다음으로 구미를 돌면 첫 수술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힘든 병원인 천안에서 외상을 경험하고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수술까지 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서울에 와 일반 외과 전공의로서의 기본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다지면 1년차를 훌륭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1년차들이 그런 스케줄을 원했다. 하지만 구미에 파견되는 1년차는 분기당 단 한 명이었기에 가장 성적이 좋은 1년차에게 그런 스케줄이 주어졌다.
최철한에 이어 작년에는 유석재가 그렇게 돌았고, 올해는 김지훈과 신현수 중 한 명이 해당될 것이다. 물론 상황을 생각해 보면 80~90프로는 이미 확정된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과 궁금증을 못 이긴 유석재가 고개를 슥 뺐다.
“선생님, 6월 달에 누가 구미를 가는지 혹시 아세요?”
“누가 갈 것 같나?”
“현수나 지훈이 중 한 명일 것 같은데, 아무래도 현수가 아닐까요?”
이혁민 교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면접 때 소아과 과장님에게 처음으로 19점을 받은 놈이 있더라. 니들도 그 점수는 못 받았다.”
최철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3년차 정도 되면 병원 사정도 어느 정도는 알았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소아과 신상민 과장이 면접 때 그런 점수를 주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누가 19점을 받았습니까?”
“하하하! 누굴까. 오늘 본 놈들 중 하나겠지.”
이상스럽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유석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 신현수보다는 김지훈에게 더 신경을 썼던 이혁민 교수였다. 이 정도로 기분이 좋다는 것은 결국 김지훈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최철한도 같은 생각인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상 이사장인 신동석의 아들이 밀렸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말 가장 정치적인 의사인 금경태 과장이 그런 결정을 내렸단 말인가?
“다음 주면 확실히 결정이 날 거다. 서울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다른 생각 말고 교육이나 잘 시켜라.”
벌떡 일어나 이혁민 교수에게 인사를 한 최철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장님이 정말 김지훈을 서울 다음에 구미로 보낼까?”
“그러게요. 정말 뜻밖이지만, 이혁민 선생님의 얼굴로 봐서는 지훈이 같은데요.”
“그치. 정갑수를 정식 픽스턴으로 뽑은 양반이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이상하네.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유석재가 입맛을 다셨다.
“19점이라잖아요. 후배가 너무 뛰어나도 골치 아픈데. 그나저나 현수 그 자식 자존심이 보통이 아닌데 별일 없겠죠?”
“나이가 한두 살이냐. 그런 일로 엉뚱한 생각을 하진 않겠지. 아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정갑수 이 새끼는 아직도 안 나타나네. 다 모아. 오늘 곡소리 한번 듣자.”
“예, 선생님. 죽이지는 마세요. 1년차 다시 하기 싫습니다.”
“다시 해야 할지도 몰라.”
최철한이 가운을 벗으며 전의를 다졌다.
잠시 후, 의국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들아. 반드시 행선지 알리라고 했지? 그 말 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이 따위로 행동해. 김지훈, 넌 복사를 하면 어디서 한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잘못했습니다.”
“잘못은. 이 새끼가. 너 지금 인턴 도는 것 같아? 픽스턴이야, 인마. 픽스턴. 똑바로 하란 말이야. 너 하나 때문에 지금 동기들까지 다 혼나는 거 아냐.”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김지훈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신현수, 정갑수는?”
“아직 연락이 안 됩니다.”
“이 새끼가 정말. 확 죽여 버릴 수도 없고. 다 나가서 찾아. 오늘 못 찾으면 니들 다 각오해. 유석재.”
“예, 선생님.”
“몽둥이 하나 준비해.”
유석재가 흠칫 놀라면서도 아무 말 없이 의국을 나갔다.
다들 인상을 팍팍 썼다.
자신들을 위해 복사까지 한 김지훈은 그렇다고 쳐도 정갑수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오프가 없다고 했는데 저녁 식사 이후 보이질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최철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가서 찾으라니까 뭐 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정말 주먹이라도 날아올 것 같아 우르르 의국에서 몰려 나왔다. 이경석이 주먹을 쥐며 이를 갈았다.
“이 자식, 찾기만 해 봐. 찾으면 최철한 선생님한테 연락하기 전에 나한테 먼저 연락해. 내가 아주 작살을 내 버린다.”
김지훈이 슬며시 옆으로 다가갔다.
“미안해요, 형. 너무 화내지 마세요.”
“너는 뭐가 미안해. 우리 준다고 땀 뻘뻘 흘리면서 복사까지 했는데 도리어 고맙지. 연락만 꼭 해.”
“예, 형님. 일석아, 현수야, 경수야, 미안하다.”
손일석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말 마, 인마. 빨리 정갑수나 찾자.”
픽스턴 5명이 병원을 샅샅이 뒤졌다.
도대체 어디 숨었는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표정을 짓던 신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되면 외부에 있다는 말인데. 무슨 볼일이 있다고 나갔지? 혹시? 아니야.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설마 그렇게까지 행동하지는 않을 거야.’
설마설마했지만 확인은 해 봐야 했다.
슬며시 병원 밖으로 나간 신현수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엑스 바죠? 혹시 정갑수 왔어요?”
(네. 지금 술 마시고 계시는데요. 누구세요?)
이런 미친놈이 있나?
정갑수와 통화를 하던 신현수가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오프 없다고 했잖아. 당장 들어와.”
(잠깐 맥주 한잔했어, 인마. 근무 시작되면 병원 밖에 나오지도 못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 왜 화를 내고 지랄이야. 일 있으면 다 픽스턴인데 니들이 잠깐 대신해 주면 되잖아. 왜, 누가 날 찾아?)
적반하장도 유분수고, 일을 저질러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신현수가 이를 악물었다.
“그만두고 싶으면 말해. 내가 아버지하고 과장님에게 부탁해서 그렇게 해 줄 테니까.”
(오버는. 알았어, 새끼야. 들어갈게.)
“의국으로 와. 최철한 선생님 화 많이 났으니까 각오해.”
(철한이? 내 동기인 거 알잖아. 걱정하지 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웬만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신현수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병원으로 들어가며 화를 삭이던 중 문득 김지훈 생각이 났다.
‘혹시 구미 응급실에서 내가 저랬을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고, 감정만 잘 절제하면 그럴 일도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이유에서인지 김지훈이 꼭 지금의 자신과 같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잖아.’
고개를 흔들며 병동에 도착한 신현수가 동기들에게 연락했다. 다들 욕을 하는 모습이 새삼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찾았으니까 다행이네. 현수 덕에 최악은 면했다. 고맙다, 현수야.”
김지훈의 말에 신현수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정갑수가 어떤 생각으로 일반 외과를 지원했는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런 생각을 알고도 그냥 지나친 일이 마음에 걸렸다.
신현수에게는 정말 생각도 하지 못한 변화였다.
도대체 그사이에 무엇이 변할 걸까?
지금도 김지훈보다 훨씬 뛰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동기들의 도움이 없어도 최고의 써전이 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현수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김지훈은 지금까지 혼자 일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선배든, 간호사든, 동기든 망설이지 않고 도움을 청했다. 심지어 그렇게 차갑게 대했건만 자신에게도 손을 내밀었었다.
문득 일반 외과는 절대 혼자 일 못 한다는 이혁민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게 생각났다.
‘설마 이런 거였나?’
확신할 수 없었지만 놓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신현수가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다 말고 입을 열었다.
“아니야.”
김지훈이 고맙다고 한 지 한참이 지났다.
갑자기 들려온 말에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아니야?”
신현수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돌아섰다.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마음이 약해지면 목표를 이루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신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마음의 문을 닫았다.
한영철이 수술을 하루 앞두고 다시 입원을 했다.
그날 저녁, 김지훈이 약속대로 엘튜브(코 줄)와 폴리(소변 줄)를 하기 위해 병실을 찾았다. 10분이면 간단히 끝날 일을 두고 김지훈이 머뭇거렸다.
‘고통스럽고 힘들 텐데.’
문득 처음 엘튜브를 했을 때가 생각났다.
스스로 미숙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신중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점점 익숙해질수록 오더가 나오면 빠르고 정확하게 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가볍게 끝내고 나면 으쓱한 기분에 내심 뿌듯한 미소를 짓곤 했다. 조금씩 환자들의 고통에 무감각해져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인턴 초반에 느꼈던 부담감이 다시 다가왔다.
김지훈이 쉽사리 손을 뻗지 못했다.
눈을 감고 있던 한영철이 슬그머니 눈을 뜨며 말했다.
“지훈아, 왜 그래?”
한영철의 눈에 긴장과 불안이 가득했다.
그 순간 왜 시작조차 하기 힘든지 알았다. 수없이 해 온 일이었지만, 얼마나 힘들까 하는 걱정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설혹 실패한다고 해도 다시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영철은 환자이기 전에 친구였다.
친구를 더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앞섰다.
알지 못할 두려움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훈의 마음을 알았는지 한영철이 뜻밖의 말을 했다.
“저번에 내과 돌다가 우연히 들었는데, 의사한테 가장 힘든 일이 가족을 치료하는 거래. 부담도 크지만, 환자의 고통을 그대로 느낀다고 하더라. 어쩌면 친구한테도 똑같을지 몰라. 지훈아, 근데 난 너한테 받고 싶어.”
“왜?”
“그냥. 네가 해 주면 편할 것 같아.”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영철아!”
“나 환자야, 인마. 내일 수술 받으려면 일찍 자야 되잖아. 빨리해.”
한영철이 애써 웃었다.
입술을 깨물던 김지훈이 엘튜브를 들었다.
“영철아, 시작할게. 입으로 숨 쉬고, 목 뒤에서 줄이 느껴지면 침 삼키는 시늉하는 거 알지?”
한영철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기다란 줄이 코를 통해 목 뒤까지 들어갔다. 구토와 이물감에 얼굴을 찡그리던 한영철이 침 삼키는 시늉을 했다.
“한 번만 더 꿀꺽. 한 번만 더.”
식도 입구에서 전해지는 저항이 사라지며 엘튜브가 들어갔다. 튜브에 공기를 밀어 넣으며 위에서 나는 소리를 확인한 김지훈이 코에 엘튜브를 고정했다.
그렇게 쉽게 했던 일인데, 이상하게도 이마에서 땀이 났다.
소변 줄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젤리를 듬뿍 발라 최대한 부드럽게 넣으려 애를 썼지만, 한영철이 주먹을 꽉 쥐며 슬쩍 몸을 비틀었다.
한 번에 다 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힘들었지?”
“아니야. 생각보다 힘들지 않네. 네가 해 줘서 그런가 봐. 고맙다.”
김지훈이 웃으며 한영철의 어깨를 툭 쳤다.
병실을 나오자마자 길게 숨을 내뱉어야 했다.
친구도 가족이나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환자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이처럼 클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