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픽스턴(fix-tern) (2)
가족력 하나만 해도 부모와 조부모는 물론 친가와 외가에 특별한 질환을 앓은 사람이 있는지 모두 확인해야 했다.
이학 검사로 넘어가자 다들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인할 사항만 80개가 넘었다.
더구나 약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Wt. loss라고 쓰던 체중 감소조차 weight loss라고 정확하게 써야 했다. 그나마 쓰기 쉬운 영어라 다행이었다. 한글이었으면 필기하다 날밤을 새야 할 판이었다.
“이상이 있든, 없든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록해야 돼. 확실하게 외워 두는 게 좋을 거야.”
수술 기록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간단한 수술이라고 할 수 있는 충수 돌기 절제술마저 깨알 같은 글씨로 A4 용지의 앞뒤를 꽉 채워야 했다. 정말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모두 기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메이저 수술에 관한 기록은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수술 기록은 외과의 핵심이야. 모든 수술 기록지는 수술한 날 바로 작성해. 다음 날 아침 회진 돌 때까지 작성이 안 돼 있으면 깨지는 것으로 안 끝난다. 그리고 수술로 병명이 확정되면 차트에 진단명 확실히 적고.”
왠지 최철한의 목소리가 으스스하게 들렸다.
매일 작성해야 하는 환자의 기록에 대해 들었을 때는 절로 고개를 젓고 말았다. 별 변화가 없는 경우에도 기본 양식에 맞춰 다 쓰고 이상이 없다는 기록을 해야 했다.
마이너 수술을 받은 환자의 기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메이저 수술을 받은 환자의 기록은 하루에 거의 한 페이지였다.
얼핏 필기만 하다 하루를 다 보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밖에서 보는 것과 실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1년차에게 중요한 일은 기록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다음 날 수술 스케줄을 확실하게 챙겨야 돼. 검사 결과 확인해서 이상 있으면 바로 노티 하고 컨설트까지 모두 봐야 된다. 이거 빵꾸 나면 옷 벗을 각오해.”
말만 들어도 힘이 들었다.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사항만 말했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드레싱(상처 치료)을 하고 수술까지 들어가야 한다면 24시간을 다 써도 모자랄 것 같았다.
거기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잘한 일들은 또 언제 한단 말인가?
‘휴우! 나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1년차 선생님들에 비하면 정말 편하게 돌았네.’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최철한이 씨익 웃었다.
“김지훈, 일이 많아 보여?”
“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도 다 그렇게 했어. 니들도 그렇게 하게 될 거고. 오늘 말한 사항들은 일단 다 외워. 1년차들이 작성한 기록들 보면서 3주 동안 그대로 따라 해. 그래야 1년차 생활이 조금은 편해질 거야.”
다들 막막한 상황에 입을 다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선생님. 그런데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왜, 불만이야?”
“아닙니다. 그래도 이유를 안다면 목적을 가지고 보다 열심히 하지 않을까 해서요.”
최철한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2년 전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작년에는 석재가 똑같은 질문을 하더니, 해마다 꼭 요런 놈들이 있네. 이유는 다른 거 없어. 이게 기본이야. 환자에 대한 모든 기록은 너희들만 보는 게 아니잖아. 생각을 해 봐. 내가 네 환자를 보러 오면 차트부터 보지 않겠어?”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에 대한 정보가 방대하고 정확할수록 모든 의사들이 쉽게 환자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년차가 응급실에서 입원 환자를 올리면 다음 날 치프(chief)들이 차트만 보고도 환자를 볼 수 있는 이유였다.
1년차들을 힘들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환자를 위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말문을 열자 다들 궁금한 것을 물었다. 최철한이 일일이 대답을 해 주었다.
듣기만 하던 정갑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약자를 써도 무방하잖아요. 왜 힘들게 스펠링을 모두 다 씁니까? 쓸데없는 일 아니에요?”
좋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말투가 문제였다.
‘요’ 자만 붙였지, 거의 친구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최철한과 학교 동기라고 해도 1년차에게 3년차는 하늘이었다. 엄격한 위계질서가 아니면 수련을 제대로 시키기 힘들기 때문에 연차 간의 서열은 당연히 지켜야 할 일이었다.
최철한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정갑수 선생.”
“예, 선생님.”
아직도 건들건들한 목소리였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학교 동기지만, 지금은 의국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 말투부터 고쳐. 안 그러면 고생한다.”
정갑수가 고개를 숙이며 눈가를 찡그렸다.
‘씨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유세를 떠네. 너랑 나랑 동긴데 웬만한 일은 봐줘야 하는 거 아냐?’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눈치를 보이던 최철한이 혀를 차며 잠시 정갑수를 노려보았다.
싸늘한 분위기에 다들 눈치를 보았다.
“정갑수, 불만은 나중에 말하고 지금은 내 말 명심해. 약자를 쓰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개념을 확실하게 잡으라는 의미야. 약자와 뜻만 알면 반드시 엉뚱한 기록을 하게 돼. 당연히 쓸데없는 일 아니다.”
결국 기본과 개념이었다.
이것이 1년차가 가장 먼저 알고 익혀야 할 사항이었다.
“그리고 픽스턴 도는 동안에는 언제 누가 찾을지 모르니까 행선지를 서로에게 꼭 알려 줘야 한다. 사소하게 생각하지 마.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야.”
몇 가지 유의 사항을 더 말한 후 최철한이 의국을 나갔다.
다들 멍한 눈빛으로 서로를 보았다.
“다 끝난 건가? 우리 뭐 해야 하는 거야?”
김경수의 말에 김지훈이 조용히 일어나며 말했다.
“알아서 배우라는 거지, 뭐. 난 일단 1년차 선생님들이 작성한 차트부터 보고 달달 외워야겠다. 학교 다닐 때도 외우는 게 일이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네.”
김지훈이 의국에서 나와 스테이션에 있는 차트를 하나 집었다. 입원 기록부터 시작해 1년차들이 작성한 기본 사항들까지 외우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들 차트를 보며 중얼중얼하고 있었다.
“에휴! 난 가야겠다. 어차피 시간 많은데 내일 하지, 뭐. 현수야, 안 올라갈래?”
정갑수가 기지개를 펴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현수가 대꾸도 하지 않고 스테이션에 자리를 잡았다.
왠지 첫날부터 김지훈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 같아 찜찜했다. 하지만 누가 먼저 말을 했든 맞는 말이었다.
‘애새끼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벌써부터 난리야. 그래, 열심히들 해라. 니들 덕 좀 보자.’
정갑수가 피식 웃으며 사라졌다.
다음 날 7시가 넘어 마지막 수술을 끝낸 이혁민 교수가 회진을 돌고 의국으로 들어갔다. 최철한이 유석재를 보며 눈짓을 했다.
“일석아, 이혁민 선생님이 픽스턴들 찾으시니까 빨리 병동 의국으로 다 모여서 들어와.”
“예, 선생님.”
스테이션에 있던 손일석과 김경수가 재빨리 병동을 뒤졌다.
함께 있던 이경석이 급히 숙소로 전화를 했다. 신현수는 병실에서 환자 처치를 하고 있었지만 정갑수가 보이지 않았다.
“경석이 형, 갑수 형은요?”
이경석이 인상을 썼다.
“갑수 이 새끼는 또 안 보이네. 숙소에도 없대.”
“뭐야, 이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사라지네. 어떡하죠?”
“갑수는 그렇다 치고, 지훈이는?”
“차트 복사하러 간 지 30분쯤 됐으니까 곧 오겠죠.”
“무슨 복사를 이렇게 오래 해. 근데 갑자기 차트는 왜 복사하는 거야?”
“글쎄요. 필요한 게 있나 보죠. 어디에서 복사하는지 알아야 연락을 할 텐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혁민 교수가 찾는 중이다.
둘이나 없는 상황에서 의국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원내 방송을 할 수도 없었다. 픽스턴들이 농땡이 부린다고 광고를 하는 꼴이었다.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정갑수를 찾는 사이 유석재가 인상을 쓰며 빨리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다들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며 쭈뼛쭈뼛 의국으로 들어갔다.
‘지훈아, 너라도 빨리 와라. 무슨 복사를 아직까지 해. 이러다 우리 다 신나게 깨지겠다.’
손일석의 간절한 바람에도 김지훈은 나타나지 않았다.
픽스턴들을 본 이혁민 교수가 의자를 가리켰다.
“다들 앉아라. 나머지 둘은 어디 갔나? 누가 없는 거야?”
이경석까지 머뭇거리자 신현수가 특유의 다소 차가우면서도 담담한 톤으로 대답을 했다.
“김지훈은 복사를 하러 갔고, 정갑수는 연락이 안 됩니다.”
“연락이 안 된다고. 왜 안 되나?”
이혁민 교수가 신현수가 아닌 최철한을 보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최철한이, 니 일 똑바로 안 할래. 픽스턴이 서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니, 이건 교육 치프인 니 책임이다.”
최철한의 얼굴이 벌게졌다.
분명히 말했건만 이틀도 안 돼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혁민 교수 앞에서 내색을 할 수도 없어 이만 부드득 갈았다.
이혁민 교수가 팔짱을 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석재가 슬며시 나가 정갑수와 김지훈을 찾았지만 연락이 되질 않았다. 짜증이 확 치솟는 순간 김지훈이 두 팔에 복사물을 가득 들고 나타났다.
“야, 김지훈. 너 뭐야, 인마?”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김지훈이 깜짝 놀라 후다닥 달려왔다.
“예? 복사 좀 하느라고…….”
“그럼 어디서 하고 있는지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빨리 따라 들어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급히 뒤를 따랐다.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떠올린 것이다.
시간도 없는데 하필이면 의국 복사기가 고장 났다.
다른 과에 부탁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이유가 뭐든 간에 변명할 여지는 없었다. 인턴과 픽스턴은 입장이 달라도 한참 다르기 때문이었다.
‘어머! 큰일 났네.’
의국으로 들어간 김지훈이 꿀꺽 침을 삼켰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혁민 교수의 굳은 표정과 시뻘게진 최철한의 얼굴.
고개를 푹 숙인 채 힐끗 자신을 째려보는 동기들.
분위기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복사물을 탁자 위에 놓고 슬그머니 의자에 앉았다.
“유석재 선생, 정갑수는?”
“죄송합니다. 연락이 아직 안 됐습니다.”
고개를 흔들던 이혁민 교수가 갑자기 손바닥을 치며 웃었다. 교수 체면에 픽스턴들 문제로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때는 은근한 암시가 제격이었다.
“김지훈, 뭐 하다 왔나.”
잘못했을 때는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구차한 변명은 도리어 화를 돋울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뭐가 죄송해. 이번이 마지막 인턴 근무라고 해도 픽스턴인 이상 정신 똑바로 차려라.”
“예, 선생님.”
변명을 하지 않는 모습에 조금은 화가 누그러진 이혁민 교수가 탁자 위를 보았다. 복사물이 제법 많았다.
“최철한 선생, 니 김지훈한테 뭐 시켰나?”
최철한이 유석재를 보았다.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시킨 것은 없습니다.”
“그래. 근데 무슨 복사를 이렇게 많이 했어?”
논문을 쓰는 전공의면 몰라도 인턴에게 이 정도로 많은 복사물이 필요한 경우는 없었다.
이혁민 교수가 맨 위에 있는 복사물 하나를 집었다.
잘 정리된 입원 기록지와 환자에 관한 다양한 기록지들, 그리고 종류별로 작성된 수술 기록까지, 모두 1년차에게 필요한 것들이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만 알아도 당장 근무를 시작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상당한 노력이 엿보였다.
“흐음!”
입술을 꾹 다문 이혁민 교수가 다음 복사물을 살폈다.
동일한 내용이었다.
모두 6부인 것을 보니 명수에 맞춰 복사를 한 모양이었다.
“이거 자네들이 만들었나?”
다들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신현수마저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들 모르네. 김지훈, 이거 뭐냐?”
“예. 저희들한테 필요한 것들을 모은 겁니다.”
“그래서 6부를 복사한 거야?”
“예, 선생님.”
이혁민 교수가 의자를 당겨 앉으며 피식 웃었다.
기대한 대로였다. 자신의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었다. 동기들을 위하는 마음이 기특했다. 은근히 화가 났던 기분이 어디론가 싹 사라졌다.
오늘 하려고 했던 말을 김지훈이 직접 보여 준 것이다.
“김지훈, 잘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 자네들 다 모이라고 한 건 별거 없다. 서울에서 근무를 하든, 지방 파견을 먼저 가든 일반 외과는 절대 혼자 일 못 한다. 서로 돕지 않으면 1년차 때는 물론 연차가 올라갈수록 더 힘들어진다. 어디서 누구와 함께 일할지 모르니까 지금부터 협조들 잘해라. 나가 봐.”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김지훈에게 복사물을 받으면 절로 깨달을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이혁민 교수가 픽스턴들이 나가자마자 최철한을 보며 웃었다.
“올해는 정말 기대가 크다. 철한아, 니 확실하게 가르쳐라.”
잔뜩 긴장했던 최철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혁민 교수의 앞에서는 4년차는 물론 총 치프라고 해도 잘못하면 얄짤 없었다. 대신 뒤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한 다신 잘못을 거론하지도 않았다.
“예, 선생님. 그런데 서울은 누가 먼저 돌게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