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0화 (100/1,329)

제3화 전공의 선발 (1)

김지훈이 중환자실 안에 있는 당직실에 들어올 때마다 답답한 한숨만 내쉬었다. 함께 도는 동기도 한영철의 소식을 들었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스테이션에서 일이 있다고 전화가 왔다.

김지훈이 막 일어서려는 동기에게 손짓을 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짬이 나는 대로 병실에 올라갔다.

아직 눈에 슬픔과 불안이 가득한 한영철의 어머니가 김지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얼굴을 볼 수 없어 잠깐 한영철의 얼굴만 보고는 병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병동 간호사에게 내시경을 언제 하는지 물었다.

“내일 한다고 하네요.”

“수술 날짜는 안 잡혔어요?”

“글쎄요. 아직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당장 이혁민 교수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급히 외래로 향했다.

외래 간호사가 반갑게 맞이했다.

“김지훈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혹시 이혁민 선생님 수술 예약 좀 알 수 있어요?”

“왜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

“아니요. 뭐 좀 확인할 게 있어서요.”

외래 간호사가 조금은 의아한 눈으로 예약 서류를 뒤졌다.

수술 예약을 확인한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혁민 교수는 월, 수, 금에는 수술을 하고, 화, 목, 토에는 외래 진료를 봤다. 다음 주까지 예약이 꽉 차 있었지만 한영철의 이름은 없었다.

그다음 주에나 수술이 안 잡힌 날이 있었다.

‘후우! 이번 주나 다음 주에 해 주시면 좋겠는데.’

한영철이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받았으면 했다.

그래야 위암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근무를 마친 후 자신도 모르게 한영철의 병실을 찾았다. 이혁민 교수가 회진을 돌고 있었다.

“어머님, 수술은 열흘 후에 하겠습니다. 일단 퇴원을 했다가 수술 이틀 전에 다시 입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생님, 좀 더 빨리할 수는 없나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일단 검사 결과도 기다려야 하고, 수술 전에 계획도 세우고 준비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이 주 정도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제 말대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원망스러웠다. 다른 사람도 아닌 병원에 근무 중인 의사가 위암에 걸렸는데 원칙대로 대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병실 앞에서 서성거렸다.

회진을 마치고 나오던 이혁민 교수와 마주쳤다.

“니 한영철이 보러 왔나?”

“예, 선생님.”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나?”

김지훈이 불만에 찬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혁민 교수가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내가 하는 말 들었나?”

“예, 선생님.”

“그래서 서운하나?”

솔직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당연히 서운하고 원망스러웠다.

“니 맘은 안다. 하지만 니가 환자라고 생각해 봐라. 환자가 의사라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스케줄을 다 무시하고 중간에 끼워 넣는다면 니 마음이 어떻겠나? 좋겠나? 그렇게 되면 날 믿고 몸을 맡길 수 있겠나?”

머리로는 이해하고도 남는 말이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설혹 중간에 끼워 넣는다고 한들 환자들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김지훈, 잘 들어라. 한 번 환자의 신뢰를 잃은 의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믿음은 원칙에서 나오는 법이다. 내도 사람인데 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겠나? 하지만 남들이 아무리 아파해도 제 손에 박힌 가시만도 못한 것이 사람 마음이고, 급하지 않은 환자는 없다.”

복도를 걷는 이혁민 교수의 발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김지훈이 머리를 감싸며 벽에 기댔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이런 마음이 보호자들의 마음일지도 몰랐다. 환자만 아프고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들도 똑같이 힘들 것이다.

‘병원에 오는 사람 중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이럴 때는 내가 의사인 게 싫다. 영철아, 정말 미안하다.’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미안할 줄은 몰랐다.

의사가 치유해야 할 아픔을 가진 사람은 환자만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물론, 어쩌면 자기 자신도 그 대상일지 몰랐다.

김지훈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깊숙이 의자에 몸을 묻은 금경태 과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신동석의 비서가 병원 혁신 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위원들의 면면을 보니 강력한 경쟁자도 있었고, 예상대로 신동석에게 끈을 대 임명된 이들도 있었다. 위원장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들을 아래에 둔 것이다.

‘장례식장 문제를 내게 다 떠넘긴다고 해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내 약점은 신동석의 약점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후후후! 이렇게 되면 병원장 자리도 곧 내 것이 되겠어.’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짓던 금경태 과장이 힐끗 시계를 보았다. 뭐가 그리 급한지 임명이 됐다는 소식과 함께 오늘 첫 번째 회의를 주문한 것이다.

“병원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이라. 뭘 원하는 거지?”

위원장에 임명돼 위기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신동석에게 목을 잡혔다는 사실이 변할 수는 없었다. 신동석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금경태 과장이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특별한 용무보다는 병원 운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큰 흑자를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울이나 천안 병원은 문제가 없다는 평이었다. 구미가 다소 애매했지만 그래도 적자를 내는 병원은 아니었다.

살짝 의문을 표한 금경태 과장이 천천히 진료실을 나섰다.

첫 회의니만큼 누가 실권을 갖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정형외과 과장의 일그러진 얼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금경태 과장이 한껏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혁신 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한 자리씩 차지한 사람들의 이목이 일제히 금경태 과장에게 쏠렸다.

***

면접 날이다.

김지훈이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복장을 살폈다.

손일석을 비롯해 이경석까지 다들 마찬가지였다.

신현수 옆에 서서 실실 웃고 있는 정갑수만이 태평이었다.

한영철이 아프지만 않았어도 이 자리에 올 이유조차 없었을 테니 입이 찢어질 만도 했다.

‘재수 없는 새끼. 영철이 일을 알았을 텐데, 그러면 입이라도 닫든지. 하긴, 그런 생각을 할 정도면 평소에 그따위로 행동하지도 않았겠지.’

정갑수를 노려보던 김지훈이 아예 고개를 돌렸다.

관심을 둬 봤자 피곤하기만 할뿐이었다.

하나둘 면접실로 들어갔다.

바로 앞에 섰던 손일석이 주먹을 쥐며 파이팅을 외쳤다.

경쟁률이 일대일이라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합격을 해도 선발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야 확실하게 수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자칫 방심했다가 엄한 스케줄이 걸리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일 년을 보낼 수도 있었다. 1년차를 그렇게 보내면 남은 3년은 보나마나였다.

김지훈이 첫 번째 면접관 앞에 앉았다.

곧 은퇴를 앞두고 있었지만 아직도 깐깐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소아과 과장 신상민이었다. 검은 뿔테 너머로 김지훈을 본 신상민 과장이 평가서를 읽으며 물었다.

“부모님이 안 계신가?”

“예,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일반 외과를 해? 이왕이면 돈 잘 버는 과가 좋지 않겠어? 이 정도 성적이면 못 갈 과도 없을 것 같고, 어차피 고생은 똑같이 하는데 말이야.”

“최고의 써전이 되고 싶습니다.”

신상민 과장이 안경을 고쳐 썼다.

“올해 일반 외과를 지원한 선생들 욕심이 대단해. 신현수 선생도 그런 말을 하던데, 자네가 생각하는 최고의 써전은 뭐지?”

역시 신현수였다.

지금까지 항상 최고의 자리를 지켜 왔고, 앞으로도 목표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정말 확실한 라이벌이었다.

김지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좋은 점수를 얻고도 싶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최고의 실력을 쌓아 명예와 돈을 모두 얻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턴을 거치면서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게 아니야?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나?”

“실력을 쌓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환자의 아픔을 아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환자의 아픔이라고? 아프니까 환자지.”

소아과 과장이 흥미로운 눈으로 김지훈을 보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도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력하면 누구나 몸을 고칠 수 있겠지만, 마음은 노력 하나만으로는 고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며칠 전 같이 일반 외과를 지원하기로 한 친구가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소아과 과장이 슬쩍 평가서에 눈길을 주었다.

“나도 들었네. 한영철 선생인가? 오늘 면접 보는 인턴 선생들 얼굴이 다들 안 좋던데, 한영철 선생이 꽤 괜찮았던 모양이야. 친구라서 더 신경이 쓰여?”

“그런 것 같습니다. 영철이를 보면서 보호자들도 굉장히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인 나도 이렇게 마음이 안 좋은데 어머니는 어떨지 상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 오는 사람은 환자든, 보호자든 간에 정말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흐음!”

나직한 신음 소리를 낸 소아과 과장이 턱을 만지며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다.

소아과만큼 보호자가 중요한 과는 없었다. 보호자가 아니면 진료가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기에 소아과 지원자들을 면접할 때마다 항상 이런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반 외과 지원자에게 원하던 말을 들은 것이다.

“제가 가운을 입고 있는 한 평생 찾으려고 합니다.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겠습니다. 언젠가 환자와 보호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치료할 수 있다면 최고의 써전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마음에 실력이 뒷받침된다면 그게 최고의 의사일지도 모르지. 자네 말대로 평생 노력할 자신 있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소아과 과장이 평가서를 잡으며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수고했어. 그 마음 잊지 말고 열심히 해.”

“감사합니다.”

김지훈의 뒷모습을 보던 소아과 과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신현수는 최고의 실력과 지식을 조건으로 꼽았는데, 김지훈은 마음이라. 인턴 성적도 훌륭하니 노력만 하며 실력은 충분히 쌓을 테고. 흐음! 면접에서 19점을 주기는 처음이군.”

19점이라는 점수를 적은 소아과 과장이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 옆 신현수와 손일석의 칸에 나란히 18점이란 점수가 적혀 있었다. 정갑수는?

입맛을 쩝쩝 다시던 소아과 과장이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보사부 고위 공무원인데 제대로 가르치질 않은 모양이야. 금 과장이 부탁했다고 점수를 더 줄 수는 없지.”

15점.

역시 깐깐했다.

그 이하의 점수가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면접관이 남았다.

일반 외과 과장인 금경태였다.

소아과 과장과의 면접 시간이 길어진 탓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더 긴장된 김지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긴장을 풀었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들어섰다.

금경태 과장이 힐끗 눈길만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김지훈입니다.”

“앉아.”

평가서를 보는 금경태 과장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결격 사유 없음.

학교 성적 - 20점.

인턴 평가 - 20점.

인성 평가 - 20점.

전공의 선발 시험 성적 - 20점.

면접 - ???

신현수와 더불어 최고 점수였다.

10프로 내까지는 만점을 주는 학교 성적이야 범위가 넓으니 그렇다고 쳐도, 나머지 모든 항목에서 만점을 받을 줄은 몰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능한 인재였다.

각 과에서 첨가한 주관적인 평가에서는 도리어 신현수보다 낫다고 할 정도였다.

‘경쟁률이 일대일을 넘었어도 떨어뜨릴 수는 없었던 놈이군. 이 교수가 눈독을 들일 만해. 하지만 이번에는 이 교수 자네 뜻대로 하긴 힘들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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