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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98화 (98/1,329)

제2화 친구야! (1)

바깥세상은 떠들썩했지만 병원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굴러갔다. 제각각 자신의 일에 충실했고, 장례식장 문제도 서서히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김지훈도 가끔 생각은 났지만 응급실에 이어 중환자실을 도는 탓에 정신이 없었다. 더구나 곧 전공의 선발 시험을 치러야 했다. 경쟁률을 떠나 최선을 다해야 했다.

중환자실 근무를 끝내고 올라온 김지훈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떴다. 책상 위에 놓인 야마(족보집)가 흐릿하게 보였다.

이경석이 웃으며 마치 어린아이를 재우는 것처럼 등을 토닥거렸다.

“지훈아, 응급실에 이어 중환자실 도니까 힘들지? 졸리면 자, 인마. 아주 푹 자. 오프일 때는 자야지.”

“혀엉, 시험은 어떻게 하구요.”

누구나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느 과도 인턴들에게 공부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매일 오프인 과를 도는 정말 운 좋은 동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 특히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을 포함해 몇몇 과는 아예 글자 하나 보지도 못하고 시험을 치러야 할 수도 있었다.

“너랑 현수는 군대 갔다 온 놈들이랑 경쟁하는데 무슨 공부가 필요해? 문제는 나하고 저놈들이지.”

끄덕끄덕 졸던 손일석이 반짝 눈을 떴다.

“왜 이래요, 형? 우리도 안전 빵이에요.”

“갑수 정도는 우습다 이거지? 자식들, 그래, 잘났다. 나만 아슬아슬하네.”

김경수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근데 영철이는 왜 안 오지?”

“그러게, 이 시간이면 내시경이 끝나고도 남는데.”

손일석도 걱정되는지 턱을 괴고는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김지훈이 엎드린 채 코를 골고 있었다.

“이 자식은 세상모르고 자네.”

“그냥 자게 놔둬. 얼마나 피곤하겠냐. 스케줄도 참 더럽네. 응급실하고 중환자실만 돈 게 몇 주야? 15주냐?”

이경석의 말에 손일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15주 맞아요. 하여간 재수도 지지리 없는 놈이야. 그나마 내 기를 받아서 15주였지, 아니었으면 1년 내내 돌았을지도 몰라요. 자식이 그걸 몰라.”

손일석이 자고 있는 김지훈의 머리를 톡톡 쳤다.

김경수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난 솔직히 부럽던데.”

“뭐, 부럽다고? 미친놈 또 하나 나왔네. 경수야, 지훈이를 멀쩡하게 만드는 것도 벅차, 인마. 너까지 이러면 내 공력으로도 어쩔 수가 없어.”

“몸은 힘들어도 그 덕에 많이 배우잖아. 지훈이는 특별히 준비 안 해도 시험을 잘 볼 수밖에 없어.”

이경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수야, 그게 무슨 소리야?”

“형, 선배들 말로는 주로 인턴 때 경험하는 질환이나 술기에 관한 것들이 시험 문제로 나온대요. 그럼 당연히 지훈이가 제일 유리한 거 아니에요?”

모두들 다들 자고 있는 김지훈을 보았다.

‘재수 좋은 놈. 부러운 놈. 계속 자도 되는 놈.’

코까지 골며 자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따다닥, 소리와 동시에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꽤나 아픈지 등을 만지며 인상을 구겼다.

“누구야? 지금 나 때린 놈이 누구야?”

눈을 부릅뜨고 범인을 찾던 김지훈이 꼬리를 내렸다.

이경석의 눈에서 불길이 보였다.

“형, 왜 그래요?”

“몰라도 돼, 인마. 넌 맞아도 싸.”

손일석과 김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넌 더 맞아도 돼.”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김지훈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등만 긁었다.

그 덕에 잠이 깼다.

야마를 넘길 때마다 느껴지는 살벌한 눈초리에 김지훈이 슬며시 등을 돌렸다.

‘왜들 저래? 내가 잠결에 무슨 욕이라도 했나?’

별생각이 다 들었지만 이내 눈이 다시 감겼다.

역시 가장 강력한 수면제는 공부였다.

학생 때나 지금이나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다들 졸려서 글자가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책을 놓지는 못했다. 전공의 선발 시험이 주는 압박감은 학교 다닐 때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만일 떨어진다면 킴은 군대를 가야 하고, 난킴은 일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수련의 강도를 생각하면 단 하루라도 빨리 받는 것이 좋았다. 체력이 받쳐 주지 못하면 4년 내내 힘에 부쳐 고생만 할 수도 있었다.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졌다.

가끔 책장 넘기는 소리와 나직하게 코 고는 소리만 들렸다.

그때 조용히 문이 열렸다.

한영철이었다.

“영철아, 왔냐? 내시경 받느라 수고했다. 안 힘들었어?”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손가락 굵기만 한 게 목에 들어오니까 숨도 못 쉬겠더라.”

“수면 내시경 한 거 아냐?”

손일석의 물음에 한영철이 입맛을 다셨다.

“일과 끝나고 3년차 선생님이 그냥 해 주시는 건데 수면 내시경까지 어떻게 부탁을 해? 비몽사몽간에 몸부림이라도 치면 미안해서 어쩌냐.”

“그렇긴 하네. 근데 뭐래?”

“궤양이야. 사이즈도 작던데, 왜 그렇게 속이 안 좋았는지 몰라. 일단 약 먹으면서 조직 검사 결과 기다리재.”

잠결에 대화를 듣던 김지훈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고개를 흔들었다.

“조직 검사까지 했어?”

“응. 별거는 없는데, 그래도 위염이 아니라 궤양이잖아. 일단 조직 검사는 기본적으로 해야 한다고 하시네.”

“하긴, 아는 사람일수록 기본을 따라야 한다고 그러더라. 결과는 언제 나온대?”

“이삼 일 후면 나오지 않겠어?”

한영철도 별걱정이 없는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26살에 궤양이 발생한 게 드문 일이긴 했지만 약만 제때 잘 먹으면 낫는 질환이었다.

김지훈이 다시 고개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술도 많이 안 먹는 놈이 무슨 위궤양이야. 일석아, 우리 나이에는 강철 위장을 가져야 하는 거 아니냐?”

“당연하지. 앞으로 영철이 너는 술자리에서 빠져. 우린 약한 놈들과는 상대 안 한다.”

“지훈아, 일석아, 약 먹고 강철 위장으로 만들어 올 테니까 그러지 말고 나 끼워 줘.”

한영철이 울상을 지으며 매달리자 다들 웃었다.

***

드디어 전공의 선발 시험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인턴들 사이에 은근한 긴장이 감돌았다.

경쟁이 센 과를 지원한 인턴들은 정식 업무까지 빼먹었지만, 전공의들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어떤 마음일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었다. 김지훈도 중환자실 근무 중 틈틈이 족보를 보며 시험에 대비했다.

‘에이! 범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도움이 되려나?’

내외 산소에 방사선과까지 다섯 과목만 보지만, 문제는 시험 범위가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것이었다. 족보집 몇 장을 본다고 도움이 될 리 없었다.

나름 시험공부를 했다는 마음의 위안일 뿐이었다.

눈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족보집을 넘기던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아침 9시였다. 오늘은 오프였기에 시험 날인 내일까지 이틀을 쉰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던 김지훈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중환자실 근무를 도는 동기가 아니라 한영철이었다.

“어? 영철아, 웬일이야?”

“지나가다 들렀어. 오늘 조직 검사 나오잖아.”

“아직 못 봤어?”

“응. 혹시 시간 있으면 같이 갈래?”

아무래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의 입장일 테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지훈이 가운을 입으며 일어났다.

일단 한숨 잤으면 했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친구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지금은 한가하니까 같이 가자. 임상 병리?”

“아니, 소화기 내과 내시경실에서 결과 보기로 했어.”

함께 내시경실로 향했다. 내시경을 기다리는 환자들로 복도가 붐볐다. 김지훈이 한영철을 툭 쳤다.

“왜 이렇게 긴장을 해. 천하의 한영철이 어디 간 거야?”

“야, 너도 내시경하고 조직 검사 해 봐. 은근히 떨린다.”

“별거 없다고 그랬다며. 쓸데없이 걱정은.”

슬쩍 틈을 보던 김지훈과 한영철이 막 내시경을 마치고 차팅을 하는 3년차를 찾았다.

“안녕하세요.”

“응, 영철이구나. 넌 누구냐?”

“예, 안녕하세요. 김지훈입니다.”

“네가 김지훈이구나. 그래, 무슨 일이야? 조직 검사 결과 보러 왔어? 궤양이라 그냥 한 건데, 뭘 벌써 와. 겁나?”

“아닙니다.”

한영철이 무안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곧 간호사가 한영철의 차트를 가져왔다.

별생각 없이 결과지를 보던 3년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기를 들었다. 왠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임상 병리 전공의와 한참을 통화하며 뭔가를 확인한 3년차가 심각한 눈으로 한영철을 보며 일어났다.

“영철아, 일단 병리실로 가 보자.”

임상 병리과로 가는 내내 불안했다.

3년차가 내민 차트를 본 임상 병리 전공의가 조직 슬라이드까지 가져와 확인했다. 혹시 몰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지만 한영철의 조직 검사 결과가 맞았다.

“이 슬라이드, 영철이 거 맞아. 진단도 확실해.”

3년차의 안색이 몹시도 어두웠다.

김지훈과 한영철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영철아, 내 말 잘 들어.”

한영철이 입술을 깨물며 3년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동안 답답한 표정을 짓던 3년차가 길게 숨을 내쉬며 조직 검사 결과지를 내밀었다.

EGC(Early Gastric Cancer:조기 위암)

순간 김지훈이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제 20대 중반인데 암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너무도 당황스러워 한영철은 눈만 깜박거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내과 3년차가 입을 열었다.

“영철아, 힘들겠지만 일단 입원하고 검사부터 하자. 너도 조기 위암이 어떤 질환인지는 잘 알잖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생각해. CT하고 초음파 잡아 놓을 테니까 넌 연락부터 해.”

“집에요?”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한영철의 얼굴은 멍하기만 했다.

“그래. 치료해야 할 거 아냐? 김지훈, 오늘 시간 있어?”

“예? 예, 있습니다.”

“그럼 영철이 검사하는 동안 같이 다녀. 방사선과에 연락할 테니까 너는 검사 빨리해 달라고 직접 부탁해.”

한영철의 머릿속이 텅 비워진 것처럼 보였다.

김지훈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최대한 냉정해져야 했다. 지금 한영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침착하자. 나까지 이러면 안 돼.’

나직한 목소리로 3년차에게 물었다.

“선생님, 조직 검사 결과가 확실한 건가요?”

3년차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모든 환자들의 검사 결과는 철저하게 관리됐다.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인 한영철의 조직과 검사 결과를 허술하게 다뤘을 리가 없었다.

김지훈이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물었다.

“입원은 어느 과로 할까요?”

“부모님들과 상의가 되는 대로 수술해야 하니까, 이혁민 선생님 앞으로 입원시키는 게 좋겠다.”

“예, 알겠습니다. 영철아, 가자.”

한영철이 일어서다 말고 비틀거렸다.

차트와 검사 결과지를 챙긴 김지훈이 묵묵히 한영철과 함께 일반 외과 외래로 향했다. 한영철의 손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마침 이혁민 교수가 외래에 있었다.

차트를 본 이혁민 교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영철 선생, 니도 조기 위암의 예후가 어떤지 잘 알 테니까 다른 설명은 안 해도 되겠지. 수술만 받으면 문제없다. 병이 더 진행되기 전에 발견한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다른 생각 말고 빨리 검사부터 받자.”

나직하지만 확신이 담겨 있었다.

“집에는 연락했나?”

아직도 정신이 없는 한영철을 본 김지훈이 대신 대답을 했다.

“아직 못했습니다.”

“한영철, 왜 김지훈이 대신 대답을 하나. 날 믿고 치료하면 아무 문제 없다.”

한영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저 정말 괜찮을까요?”

“날 믿어라. 조기 위암 정도는 잡고도 남아. 일반 외과 한다는 놈이 그것도 모르나.”

마치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이혁민 교수의 말은 단호하기만 했다. 한영철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불안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줄기 위안을 얻은 것 같았다.

김지훈이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에 눈가를 비볐다.

“한영철, 진정되면 부모님께서 걱정하지 않도록 전화 잘해라. 내 말 잊지 말고. 김지훈.”

“예, 선생님.”

“검사하는 동안 같이 다녀라. 입원 수속 좀 해 주고.”

김지훈과 한영철이 나가자 이혁민 교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 있게 말은 했지만 너무 젊다는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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