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7화 (97/1,329)

제1화 원치 않았던 결과 (2)

갑갑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금경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장은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만, 시간이 좀 지나면 가라앉지 않겠습니까? 아마 일주일이면 모두들 이번 보도를 잊을 겁니다.”

“사람들은 잊을지 몰라도 나는 용납할 수 없어요.”

“이사장님!”

금경태의 목소리가 다급해지자 신동석이 잠시 뜸을 들였다.

“난 금 과장님이나 부인 되시는 분에게 책임을 묻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병원 입장에서 보면 사안이 너무 중대합니다.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해 보니 이런 경우에는 즉시 해약을 해도 무방하다는군요.”

“그럼 운영자를 바꾸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한 가닥 남은 희망이었다.

입찰에 들어가면 어차피 결정은 병원 관계자들이 한다.

대리인을 세운다면 다시 운영권을 얻을 수도 있었다.

신동석이 고개를 저었다.

“말씀대로 관행이었다면 또 같은 일이 벌어지겠지요. 직영으로 바꿔서 병원이 직접 관리하는 합당한 조치인 것 같군요. 이미 아버님을 비롯해 이사들과 상의해 결정한 일입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세요.”

마지막 통보였다.

금경태가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지?’

제보를 한 사람이 누굴까?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셀 수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지푸라기 속에서 바늘을 찾는 편이 빠를지도 몰랐다. 이대로 간다면 장례식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과장을 끝으로 병원 생활을 접어야 할 수도 있었다.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정훈철 그놈만 아니었으면.’

MBS의 9시 뉴스를 책임진 사람은 정훈철이다.

신동석이나 되면 모를까,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때 문득 김지훈과 이혁민 교수가 방송에 나왔던 일이 생각났다.

얼마 전, 응급실에서 김지훈과 구급대원 간에 사소한 마찰이 있었다는 말까지 기억났다.

‘만일 둘이 아직도 만나고 있다면? 딸을 구해 줬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그렇다면 혹시?’

“이사장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금경태가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난데, 지난번에 응급실에서 구급대원과 마찰이 있었다는 인턴이 있었다고 했지? 무슨 문제였는지 확실하게 알아봐. 이유는 묻지 말고.”

나직한 목소리에 분노가 실려 있었다.

설마 인턴 따위가 이번 일의 도화선이었단 말인가?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이 지경에 빠뜨린 놈을 반드시 찾고 싶었다. 어떻게든 그만한 고통을 돌려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신동석이 다시 자리에 앉는 금경태 과장을 보았다.

‘돈과 명예에 목을 맨 사람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병원의 개혁을 위해 저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필요할 수밖에 없어. 장례식장까지 잃었으니 적절한 보상만 있다면 내 말대로 확실하게 이행하겠지.’

개원한 지 15년이 넘었다.

어엿한 대학 병원으로 만들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했다.

이젠 제2의 도약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런데 병원 내에 창업 공신 행세를 하는 의사들이 제법 있었다. 초기에는 분명 병원 발전에 이바지했지만, 이제는 핵심 보직에 앉아 도리어 발전을 저해하고 있었다.

흐르던 물이 고이기 시작한 것이다.

의사로서의 능력은 필요했지만, 병원 경영에서는 그들의 관여를 배제해야만 도약이 가능했다.

아직 재단 이사장으로 정식 취임한 것도 아니었다.

재단 이사장인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기기 전에 확실하게 병원을 장악해야만 했다.

자신에게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금경태 과장이야말로 적임자였다. 돈과 명예를 위해서는 동료들을 내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적절히 이용한다면 자신을 향한 비난과 잡음까지 줄일 수 있었다.

‘내가 모든 인사권을 쥐면 적당한 자리까지만 주고 이런 관계를 끝낼 수 있겠지.’

신동석이 어렵지만 옳은 길을 버리고 보다 쉬운 방법을 택했다.

“금 과장님, 장례식장 문제는 이쯤에서 확실하게 매듭을 지읍시다. 문제가 더 커지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텐데, 과연 누가 그 책임을 지겠습니까?”

책임을 지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빤한 일이었다.

확실하게 입을 다물라는 소리였다.

이권에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신동석으로서는 이사장으로 취임하기도 전에 구설수에 오를 수는 없었다.

금경태 과장이 납작 엎드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확실하게 입단속을 하겠습니다.”

신동석이 금경태 과장을 확실하게 손안에 쥐었다.

“좋아요. 그럼 금 과장님을 한 번 더 믿어 보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신 이사장님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을 겁니다.”

“이번 일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나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일을 상의하고 싶어요.”

“말씀만 하십시오.”

신동석이 잠시 뜸을 들이자 금경태 과장이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축였다.

“병원 전체를 수술하려고 합니다.”

금경태 과장의 귀가 활짝 열렸다.

신동석이 병원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에게 구명의 동아줄을 던진 것이다. 무조건 잡아야 했다.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병원 혁신 위원회를 만들어 한시적으로 모든 인사권을 부여할 겁니다. 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람에게는 적절한 자리를 보장하고, 반대인 사람은 본연의 직책만 수행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금 과장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신동석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행정직도 문제지만, 보직에 있는 의사들도 문제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내가 의사가 아니라서 누가 필요한 사람인지 확신할 수가 없어요. 금 과장이라면 잘 알 것 같은데.”

“맡겨만 주신다면 확실하게 진행시키겠습니다, 이사장님.”

방금 전까지 존칭을 썼던 신동석이 과장이라고 불렀지만 금경태 과장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말이었다.

“좋습니다. 난 금 과장을 믿어요. 하지만 후보자가 금 과장만 있는 건 아니고, 아버님과도 상의할 부분이 있으니 일단 기다리세요.”

“이사장님,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장례식장의 일로 심려까지 끼쳐 드렸는데, 더 이상 실망을 드리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신동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급해진 금경태 과장이 벌떡 일어나며 직접 출입문까지 열었다.

“이삼 일 내로 비서가 찾아오면 확정된 것으로 알면 됩니다. 혹시 아무 연락이 없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게, 아버님의 허락도 있어야 해서 말이죠. 아! 그리고 더 이상 장례식장이란 말 자체가 내 귀에 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책임 소재는 확실하니까 말이에요.”

신동석이 운만 띄워 놓고 끝까지 확답을 주지 않았다.

금경태 과장에겐 피가 마르는 일이었다.

다음 날, 일반 외과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연히 장례식장에 대한 문제가 거론됐다. 금경태 과장 입장에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거참! 병원 장례식장에 그런 문제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신문과 뉴스에 모두 보도가 됐으니 확실하게 처리가 되겠군요.”

금경태 과장을 바짝 뒤쫓고 있는 오상익 교수의 말에 다들 동의를 했다. 특히 이혁민 교수는 목소리까지 높이며 흥분을 참지 못했다. 환자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라면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분개하자 금경태 과장도 마지못해 거들었다. 물론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했다. 누구도 자신이 장례식장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했다.

이혁민 교수와 라이벌인 임동완 교수가 오래간만에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전 누가 이런 사실을 방송국에 알렸는지 그게 참 궁금하더군요. 고발한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일인데 말입니다. 과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허허허! 나도 동감이네. 우리 사회에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다니, 희망이 있어.”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은 장례식장과는 철저하게 무관한 사람이어야 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부인 대신 바지 사장을 내세운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신동석이 문제 삼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두들 한목소리를 내자 이혁민 교수가 크게 웃었다.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좁혔다.

평소 성격을 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문득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장례식장만이 아니라 구급대도 문제가 많겠지. 흐흠!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얼핏 응급실에서 인턴하고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 교수, 뭐 들은 얘기라도 있나?”

“김지훈 선생 말씀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김지훈? 혹시 우리 과에 지원한 인턴 아닌가?”

금경태는 단순히 궁금한 정도에 불과한 것처럼 최대한 평상시의 표정을 유지했다.

“맞습니다. D.O.A 문제로 구급대원과 마찰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것 참 묘한 일이군. 예전에도 MBS에 근무하는 PD의 아이를 구해 줘서 방송을 탔잖아? 이번에도 MBS와 김지훈이라니. 우연치고는 묘한 인연이야. 혹시 무슨 연관이 있는 건 아닌가?”

이혁민 교수가 망설였다. 이미 다 까발려진 일이었지만 말을 해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금경태가 눈을 가늘게 뜨다 말고 크게 웃었다.

“허허허! 우연한 일이겠지. 한편으로는 아쉽네. 이번 일에 우리 병원 인턴이 도움이 됐다면 상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임 교수, 안 그래?”

“맞는 말씀입니다, 과장님.”

이혁민 교수가 고민에 잠겼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올바른 일이었다.

이미 방송과 신문에 보도가 됐고, 여론까지 들끓었다.

어떻게 보면 훌륭한 일을 했다고 할 수도 있었다.

문득 금경태 과장이 신현수에게만 관심을 보였던 예전 일이 떠올랐다. 김지훈 역시 인재였기에 관심을 가져 준다면 더욱 훌륭한 외과 의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적인 면이 강해서 그렇지, 금경태 과장이 가진 외과 의사로서의 뛰어난 능력까지 부인할 수는 없었다.

정훈철도 보도 전까지만 비밀을 유지해 달라고 했다.

김지훈에게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될 일이 아니었다.

“과장님, 사실 이번 일 역시 김지훈 선생이 아니었으면 뉴스에까지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임동완 교수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요? 이 교수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김지훈 선생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아주 똑똑하고 일도 열심히 해서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을 해결하는 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까지 했어요.”

“결정적인 역할이라니요?”

“응급실에서 구급대원들이 D.O.A 환자부터 이송하는 것을 보고 MBS의 정훈철 PD에게 먼저 연락을 했더라구요.”

이혁민 교수가 그간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좁혔다.

“그럼 이 교수도 이미 알고 있었나? 왜 말을 안 한 거야?”

“죄송합니다, 과장님. 정훈철 PD가 보도되기 전까지는 비밀을 지켜 달라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는 미리 언질을 주었어야지. 다행히 별일은 없지만, 병원이 발칵 뒤집힐 수도 있는 일이었어. 그리고 잘못한 일도 아닌데 숨길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금경태 과장의 목소리가 은근히 흔들리고 있었다.

“의사들하고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제라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니까 그 얘긴 그만하지. 그럼 김지훈이 최초로 제보한 사람이네.”

“그렇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들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그런 일까지 신경을 쓰다니, 선배 의사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드네. 게다가 방송국 PD하고도 친하다니 꽤 친화력도 있어 보이고 말이야. 여러모로 내년이 정말 기대되는군. 이만 일어들 나지.”

진료실로 돌아가는 금경태 과장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다른 놈도 아니고, 우리 과에 지원한 놈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인가? 후우! 내 이놈을 어떻게 하지? 게다가 이 교수는 내게 말도 안 했단 말이지.’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되고 있는 이혁민 교수도 내치고 싶은 판이었다. 인턴에 불과한 의사 한 명의 장래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김지훈 한 명 없다고 병원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금경태 과장이 이를 갈며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지나가기에는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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