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6화 (96/1,329)

제1화 원치 않았던 결과 (1)

대충 짐작이 간 이혁민 교수가 피식 웃었다.

“흐음! 뭐 정갑수까지 인원은 넘친다만, 니 난킴이잖아. 혹시 다른 애들이 불안해하나?”

역시 정갑수의 지원은 기정사실이었다.

김지훈이 얼른 둘러댔다.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해라. 일반 외과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동네가 아니다. 실력도 있어야 하고, 인성도 중요해.”

이혁민 교수는 예전부터 지원자들이 차면 학교와 인턴 성적은 물론 평판까지 감안해 평가를 했다.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인성에 문제가 있으면 서슴없이 반대를 하곤 했다.

정훈철이 슬쩍 끼어들었다.

“교수님, 김지훈 선생님은 안정권이죠?”

“하하하!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시험도 봐야 하고, 면접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설령 제가 꼭 뽑아야 한다고 말해도 심사하는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합니다.”

“어이쿠! 경쟁이 심하면 떨어질 수도 있겠군요.”

“그렇죠.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김지훈도 마찬가집니다.”

순간 긴장감을 느낀 김지훈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혁민 교수가 웃으며 일어났다.

“시간도 늦었는데, 전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정훈철이 이혁민 교수를 따라 나가며 말했다.

“교수님, 그리고 이번 일은 비밀에 부쳐 주셔야 합니다.”

“재단에도요?”

“예, 생각보다 여파가 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에는 알게 모르게 외압이 들어오거든요.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막상 내막을 알고 보니 정훈철의 걱정이 더 커진 모양이었다. 뜻밖의 말까지 했다.

“그리고 교수님이나 김지훈 선생님도 절 만났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제보를 한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물론 우리 셋만 아는 사실이니까 걱정은 안 합니다만, 혹시나 해서요.”

“오! 그래요. 하하하! 그럼 입을 확실히 막고 있겠습니다. 김지훈도 말을 함부로 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PD님도 공연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런데 언제까지 비밀을 유지해야 합니까?”

“보도가 나가기 전까지만 지켜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 끝났다.

공연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모두 제각각 집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돌아오던 김지훈이 답답한 마음에 포장마차를 찾았다.

“이모, 저 왔어요.”

“아이고! 우리 김지훈 선생님 오셨네.”

반갑게 맞아 주는 아주머니를 보자 조금은 마음이 풀렸다.

고소한 골뱅이에 소주 한 잔은 역시 꿀맛이었다.

6개월 만에 온 탓인지 할 말도 많았다.

“악어하고는 별일 없었어? 걔가 보통내기가 아니거든. 한 번 찍으면 끝까지 문다고 해서 별명도 악어잖니.”

“별일 없긴요, 아주 사람을 말려 죽여요. 하다못해 밥 먹는 것 같고도 지랄을 한다니까요. 그래도 이젠 두 달만 버티면 끝나네요. 악어라고 지 과도 아니고 일반 외과 전공의한테 계속 그럴 수 있겠어요?”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른다.”

주인아주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년에도 그러면 확 받아 버려야죠.”

“야! 지훈이가 확실히 세졌는데?”

“원래 셌어요. 선배라서 봐준 거지. 하하하!”

한동안 주인아주머니와 악어를 씹던 김지훈이 하품을 하며 병원으로 돌아갔다.

‘이번 기회에 확 뿌리를 뽑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돈과 사람을 맞바꿀 수가 있지? 나쁜 새끼들.’

며칠 후 나올 뉴스가 은근히 기대가 됐다.

***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었다.

한 통의 전화를 받은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곧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야.”

(무슨 일이에요?)

“문제가 생겼어. 장례식장에서 돈이 오간 걸 방송국에서 보도한다는 정보가 있어. 빨리 손쓰지 않으면 운영권을 잃을지도 몰라.”

(운영권을 잃다니요? 무슨 소리예요?)

답답한지 금경태 과장이 넥타이를 풀었다.

“생각을 해 봐. 외주를 준 장례식장에서 돈 문제가 생겼는데 재단에서 가만히 있겠어? 그리고 요새 경영 문제가 없는 병원이 없어. 이 기회에 직영으로 바꿀 수도 있다고.”

부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이사장님이 뭐라고 해요?)

“지금까지는 장례식장 운영에 관심이 없었지만, 문제가 터지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병원의 명예가 손실되는 일이라면 자식도 내칠 사람이야.”

(그럼 어떻게 해요? 여기서 나오는 돈이 얼만데, 절대 안 되죠.)

“어떻게 하긴, 업주들 다 모아서 빨리 대책을 세워. 내가 직접 전화하고 전면에 나설 수는 없잖아. 이런 때를 대비해서 바지 사장을 내세운 거니까 당신도 함부로 얼굴 내비치지 말고, 조심해.”

(알았어요. 다른 업주들한테 바로 연락할게요.)

전화를 끊은 금경태 과장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다.

재단 이사장인 신동석은 돈과 자리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야 서울 병원장이 끝이 아니라 산하 병원들을 모두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신동석에게 끈을 댄 사람은 금경태 과장만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돈은 그 자체로도 중요했다. 한두 달이면 몰라도 연 단위로 계산하면 장례식장을 통해 버는 돈의 규모는 상당했다.

월급도 적지는 않았지만 비교조차 하기 힘들었다.

‘돈이 없으면 명예도 소용이 없지. 장례식장에서 들어오는 돈이 얼만데, 결코 놓쳐서는 안 돼.’

외과 과장으로서 드러내 놓고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자신이 장례식장 운영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바지 사장까지 내세웠다.

하루하루 초조한 시간이 지나갔다.

몇몇 장례식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만일 예정대로 방송이 된다면 장례식장을 운영하는 업주들 모두 한순간에 막대한 이권을 잃을 수 있었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부인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금경태 과장이 소리를 질렀다.

“정훈철 PD에게 돈이라도 먹여. 돈 앞에 안 무너지는 사람은 없어. 업주들이 다 모으면 일이억은 쉽잖아.”

“나라고 그걸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벌써 시도를 했어요. 그런데 씨도 안 먹혀요. 맨 처음에는 만나 주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아예 얼굴도 볼 수 없단 말이에요.”

“그럼 그 윗선을 만나. 얼마가 됐든 그냥 손에 쥐어 줘. 몇 달이면 그냥 회수되는 돈이잖아.”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MBS가 지금 자체 감사 중이래요. 하필 이럴 때 내부 비리 사건이 터질 건 또 뭔지 모르겠네.”

정말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제길! 뉴스에 나온다는 날이 언제야?

“내일이래요.”

“내일? 이 여편네야, 그런 건 미리 얘기를 해야지.”

“얘기를 했으면 당신한테 방법이 있어요? 돈도, 압력도 안 통하는 인간한테 어쩌란 말이에요?”

그날 밤 온 집안이 떠나갈 것처럼 고성이 오갔다.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분풀이에 불과했다.

다음 날 9시, 마침 오프인 덕에 숙소 휴게실 소파에서 뒹굴던 김지훈이 슬며시 뉴스를 틀었다. 함께 있던 동기들이 뉴스를 왜 보냐며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가끔 세상 돌아가는 것 정도는 알아야지.”

손일석이 빽 소리를 질렀다.

“김지훈 이 자식이 요새 점점 이상해지네. 피곤해 죽겠다. 뉴스 말고 신나는 거 틀어, 인마. 어쭈! 네가 지금 형한테 개기는 거냐? 리모컨 내놔.”

“어허! 잠깐만. 어? 저런 일이 다 있었네.”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딴청을 피우자 원성의 목소리가 터졌다. 리모컨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손일석이 성질을 내며 TV로 다가갔다.

“이 자식이 못 먹을 거 먹었나.”

그때 장례식장에 대한 보도가 시작됐다.

“잠깐만, 저거 뭐야?”

김지훈이 소리를 지르며 목을 빼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학 병원 장례식장들이 줄줄이 화면에 비치던 중 마침 서울 병원 장례식장이 보였다.

모자이크 처리가 됐지만, 평소 지나가며 항상 보았던 곳이었다.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 저거 우리 병원 장례식장 아니냐?”

“뭐야? 정말 저런 일이 벌어진 거야?”

“나 참! 다른 대학 병원 장례식장들까지 다 저런 모양이네. 준 놈이나 받은 놈이나 다 개쌍놈들이네. 할 짓이 없어서 저런 짓을 하냐.”

“그러게 말이야. 어쩐지 가끔 죽은 사람이 먼저 들어오는 게 이상하다 싶었어.”

다들 한마디씩 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평소 골치 아픈 뉴스라면 학을 떼던 동기들까지 관심을 보였다. 김지훈이 내심 뿌듯한 마음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번 기회에 뿌리까지 싹 뽑혔으면 좋겠네.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특히 죽은 사람이나 환자한테는 더더욱 안 되는 일이지.’

잠시 소란스러웠던 휴게실이 조용해졌다.

인턴이 된 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장례식장 문제도 곧 뇌리에서 사라졌다. 제 코가 석 자라고, 일도 일이지만 전공의 선발 시험까지 앞둔 시기였다. 김지훈 역시 평상시처럼 남은 응급실 근무에 최선을 다했다.

김지훈은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장례식장 문제가 생각보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신문을 포함한 주요 언론 매체에 연일 보도되기 시작했다.

***

금경태 과장이 지그시 이를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이 터진 이상 후폭풍을 막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조금이라도 영향력이 있다면 무조건 전화를 했다.

“장례식장 문제가 더 커지면 병원들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저희 병원 이사장님도 말씀은 안 하시지만 그 점을 우려하고 계십니다. 최대한 조용히 넘어갈 방법이 없겠습니까?”

신동석과 병원까지 언급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곤란하다는 말뿐이었다.

이미 방송은 물론 모든 신문에까지 보도된 마당이었다. 더구나 환자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보도 내용 때문에 국민들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점점 사회적 파장이 커져 누구도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론은 대대적인 조사와 그에 따른 처벌뿐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답답한 표정으로 술만 들이켰다.

‘한 구당 20~30만 원씩 받아 처먹었는데 구급대에서 새어 나가지는 않았을 테고. 도대체 어떤 놈이 발설한 거지? 이사장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군. 그래도 설마 나와 관련이 있는데 직영으로 돌리진 않겠지.’

신동석의 반응이 가장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자칫 돈과 함께 명예까지 잃을지도 몰랐다.

‘나와 와이프는 무조건 모르는 일이다. 제길! 바지 사장의 입을 막는 데 들이는 돈까지, 날려야 하는 돈이 대체 얼마야?’

가장 우려했던 전화가 걸려 왔다.

(나 신동석입니다.)

금경태 과장이 전화를 받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예, 이사장님.”

(금 과장님, 지금 바로 만나야겠습니다. 저번에 만났던 곳에서 기다리죠.)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신동석이 내심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 병원 장례식장도 관련이 있더군요.”

금경태가 고개를 바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뉴스를 보고 알았습니다만,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무슨 조치요? 부인에게 경고라도 주실 셈인가요? 그런다고 실추된 병원의 명예가 회복되지는 않아요.”

“기회를 주십시오. 제 아내 역시 잘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임시로 내세운 사장이 다른 장례식장에서도 관행적으로 하는 일이라고 해서 따른 모양입니다. 장례식장에 소속된 직원들도 돈에 욕심을 냈던 것 같습니다.”

신동석이 눈가를 찌푸렸다.

“장례식장 전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까?”

금경태가 아차 싶은지 눈동자를 굴렸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피하고 장례식장을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다른 곳에서 옮겨 온 직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도 관행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일을 저질렀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명예를 회복할 방법은 있습니까?”

방법이 있었다면 얼굴을 보자마자 먼저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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