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D.O.A (1)
드디어 천안 근무도 끝났다.
옷가방을 들고 나오던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중환자실과 정신과를 돌며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했다.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로 목숨이 달린 환자 앞에서는 결코 주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든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은 끝이 없었다.
찬바람을 뚫고 서울로 향했다.
천안이나 구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복잡한 도시에 도착했다. 네온사인 불빛으로 휘황찬란한 거리를 보며 김지훈이 감회에 젖었다.
‘6개월 만이구나. 처음과 끝을 다 서울에서 맞이하네. 이제 3개월이면 인턴도 끝이다.’
서울 병원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이젠 최강의 인턴들이었지만 생활은 더 힘들어졌다.
4년차들의 공백은 메워지지 않았고, 여름보다는 확실히 겨울에 환자가 더 많았다.
이혁민 교수에게 인사를 할 기회가 없었다. 간혹 시간이 나 외래로 가 보면 이혁민 교수가 부재중이었다. 수술과 외래 진료에 입원 환자까지 교수들도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3주가 지나 응급실 근무가 시작될 때까지 인사를 하지 못했다.
간호사들이 호들갑을 떨며 김지훈을 환영했다. 다들 처음과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원래 이때쯤 되면 인턴들 간의 차이는 거의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단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처럼 직접적으로 환자를 봐야 하는 경우는 달랐다.
역시 매끈하고 확실하게 환자를 보았다.
간호사들의 눈에도 3월 달과는 확연한 차이가 보일 정도였다. 도리어 환자와 일에 대한 열정은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아직도 참 열심히 보시네. 정말 멋있는 선생님이야.”
수간호사의 말에 다들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현수 선생님도 대단해지셨던데, 두 선생님 다 일반 외과를 하신다니 내년엔 콜 안 받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요.”
“그렇겠지? 근데 신현수 선생님은 우리한테도 그렇지만 환자에게도 너무 냉정하고 차가워. 김지훈 선생님이 환자 대하는 모습의 반만 따라 하면 지금보다 훨씬 칭찬을 많이 받을 텐데 말이야.”
“확실히 차갑긴 해요.”
김지훈이 스테이션으로 오자 수다를 떨던 간호사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빠르게 검사 오더를 낸 김지훈이 살짝 미소를 보이고는 곧 다른 환자를 살폈다.
이미 모든 검사가 끝나고 진단 및 치료만 남은 환자였다.
인턴이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란 의미였다.
간호사 한 명이 길게 고개를 빼며 김지훈을 보았다.
“아까 본 환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시네요. 빠트리신 게 있나?”
“그러게. 저 환자를 왜 또 보시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간호사들이 고개만 갸웃거렸다.
다음 날 아침, 드디어 이혁민 교수에게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꽤나 반가워하는 눈치를 보이면서도 김지훈을 보며 혀를 찼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김지훈, 올라온 지가 언젠데 이제 인사를 해?”
“아닙니다, 선생님. 몇 번 찾아뵀었는데 그때마다 안 계셔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그래? 나 때는 밤을 새서라도 인사를 할 때까지 진료실 앞에서 기다렸는데 요즘은 안 그러네.”
이혁민 교수의 농담에 김지훈이 쩔쩔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시치미를 뚝 떼며 이혁민 교수가 회진을 돌았다.
“어젯밤에는 별일 없었나.”
“예, 선생님. 특별한 환자는 없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을 가리키며 수간호사를 보았다.
“수간호사, 6개월 만인데 좀 나졌드나.”
“그럼요, 선생님. 물어볼 걸 물어보셔야죠.”
“하긴 말턴(인턴 말)인데 일을 못하는 게 이상하지. 쓸데없는 걸 물었네. 김지훈, 막판이라고 방심하지 말고 열심히 하래이. 이럴 때 사고 난다.”
“예, 선생님.”
김지훈을 보며 씩 웃은 이혁민 교수가 응급실을 나서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참! 김지훈, 니 어제 처음 보는 환자 없었나?”
“없었습니다. 왜 그러시죠?”
“처음 보는 환자가 오면 알아서 리포트 써라.”
“예?”
이혁민 교수가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열다 또다시 고개를 돌렸다.
“참! 타이(tie:실에 매듭을 짓는 것) 연습은 많이 했나?”
“예.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
“두고 보자. 못하면 가만 안 둔다. 각오 많이 해라.”
김지훈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숨을 쉬었다.
타이는 몰라도 리포트는 너무했다.
“아이 씨! 말턴인데 웬 리포트를 쓰라고 하셔. 이젠 안 써도 되지 않나. 안 그래요?”
스테이션에 있던 간호사들이 모두 웃었다. 수간호사도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안 하셨는데, 김지훈 선생님만 보면 뭔가 시키고 싶으신 모양이네요. 열심히 하세요. 그래도 수처(상처 봉합) 얘기는 안 하셨잖아요.”
“수처요?”
“지나가는 말인지는 몰라도 가끔 수처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근데 꼭 느낌이 선생님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 같더라구요.”
순간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수간호사의 말이 맞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김지훈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휴우!”
깊은 한숨을 내쉰 김지훈이 말을 잃었다.
응급실만 세 번째다.
이젠 전공의들과도 많이 친해졌고, 업무 역시 익숙했다.
바쁘긴 했지만 첫 근무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다.
‘천안에서도 응급실을 돌았으면 더 확실했을 텐데 아쉽네. 흐음! 일석이 말대로 내가 미쳐 가고 있나?’
미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환자를 확인한 김지훈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D.O.A는 싫다.’
그때 또 한 명의 환자가 들어왔다.
차팅을 하다 보니 같은 사고를 당한 환자였다.
사람이 죽을 정도로 큰 사고였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다발성 손상을 입었다. 외관상으로도 상당히 심하게 다친 것처럼 보이는 환자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망자와 살아 있는 사람을 착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비록 지역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벌써 세 번째 같은 경험을 했다.
김지훈이 빠르게 환자를 진료한 후, 막 응급실에서 나가는 구급대원을 불렀다. 역시 사설 구급대원이었다.
“잠시만요.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구급대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상황은 이미 간호사들에게 모두 말한 후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사망자가 현장에서 사망한 상태였나요?”
“예.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숨도, 맥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 사고에서 사망한 사람이 환자보다 먼저 들어왔죠?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도 있었습니까?”
구급대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건 왜 물어요? 그리고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오해를 살 말이었다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그런데 구급대원의 목소리가 너무 높았다. 마치 역정을 내는 것 같았다.
이상한 낌새에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착각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같은 차를 타고 있다가 사고를 당했으니까 당연히 살아 있는 사람이 먼저 이송이 됐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 이 양반이!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들어온 환자가 죽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거요?”
말투가 거칠어졌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면 해명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럼 특별한 사정은 없었던 거네요.”
“사정은 무슨. 왜 그러는 거요? 아니, 고생해서 환자 이송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그리고 의사면 환자 치료만 하면 되지, 왜 이송 문제까지 관여를 해요. 그건 우리 일이고, 의사 선생님은 환자 치료나 열심히 하세요.”
말투도 말투였지만 단순하게 넘어갈 생각이 아니었다.
설혹 오해가 있다고 해도 이런 생각은 위험했다.
“환자가 발생하면 그 순간부터 의사가 관여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앰뷸런스에 괜히 산소하고 마스크를 비치하고, 무전기까지 갖다 놓은 게 아니잖아요. 현실이 뒷받침 못할 뿐이지, 구급대원들도 환자 이송을 하며 최소한의 처치는 할 수 있는 이유가 또 뭐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요? 아니, 바쁜 사람 붙잡고 뭐하는 거야! 의사면 의사답게 환자 치료나 잘해요. 애먼 사람 잡지 말고. 내 참! 인턴한테 이런 말까지 듣고 더러워서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순간 욱한 김지훈이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숨을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