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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89화 (89/1,329)

제9화 마음이 아픈 사람들 Ⅰ (1)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자식을 버렸고, 자식은 아버지를 버렸다.

누구도 안호석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도리어 그 아픔을 헤아려야 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훔친 윤숙자가 김지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보내야 할 때였다.

“지훈아, 이제…….”

그때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들어 왔다.

“호석이 엄마, 잠시만.”

“왜요, 고모.”

“호석이가 온대요. 자기가 올 때까지 기다려 달래요.”

윤숙자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오직 자식의 마음에 멍에가 남지 않기만을 바랐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본다면 분노든 증오든 모든 것을 훌훌 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지훈아, 호석이 올 때까지만 기다려 줘.”

“예, 어머니. 걱정 마세요.”

친척 중 한 명이 앰뷸런스 기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숱하게 호프리스를 봐 왔을 테지만, 기사 역시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아들이었다.

한 시간이 지났다.

낡은 대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호석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지훈이 형, 죄송합니다. 어머니, 저 사람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어머니 때문에 왔어요.”

“그래, 잘했다. 고맙다, 호석아.”

윤숙자가 안호석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한동안 생기를 잃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던 안호석이 숨을 몰아쉬었다.

“지훈이 형, 시작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정각 8시였다.

조심스럽게 튜브를 뽑으려던 김지훈이 돌연 입술을 깨물었다. 좀처럼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도 이랬었나?’

문득 8년 전이 생각났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단 한마디라도 들었으면 원이라도 없었을지도 몰랐다.

환자의 얼굴과 아버지의 얼굴이 겹쳤다.

순간 눈물을 흘릴 뻔했다.

윤숙자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안호석에게 더 이상 상처를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다시 튜브를 잡았다.

“어머니, 빼겠습니다. 호석아.”

“예.”

김지훈이 튜브를 고정한 테이프를 제거했다.

손에서 환자의 미약하고 나직한 숨이 느껴졌다.

마지막 호흡일 것이다.

그 순간 눈을 꼭 감고 있던 안호석이 환자의 손을 잡았다.

벌벌벌 어깨를 떨고 있었다.

손이 하얗게 변하도록 힘을 꽉 준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슬픔인지, 원망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그게 너한테는 편할지도 모르겠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튜브를 뽑았다.

환자가 마지막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때 환자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자식에게 미안하다는 눈물이었다.

안호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악에 받친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왜? 왜?”

설움에 복받친 안호석이 엉엉 울었다.

윤숙자가 자식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난 죽어도 당신을 용서 못해.”

슬픔과 원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무언가 먹먹하고 서늘한 것이 김지훈의 가슴에 치밀어 올랐다. 자식의 원통한 울음과 아버지의 눈물을 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슬픔이 솟구쳤다.

김지훈이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아직도 그리운 이들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보내야 하는 사람은 안호석만이 아니었다.

이를 악물었지만 울음이 삐져나왔다.

결국 소리 내 울고 말았다.

격한 감정의 회오리가 터질 듯이 솟구쳤다.

안호석과 함께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김지훈의 슬픔과 원망이 이제야 사라지고 있었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별 2개가 보였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멍하니 별을 바라보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아버지의 눈물!

우연일 뿐이었다.

이미 혼수상태에 빠진 지 오래였다. 죽음 직전에 아들의 존재를 느끼고 눈물을 흘렸을 리도 없었다. 의학적으로는 죽기 전의 신체적 변화에 불과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눈물이라고 믿고 싶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죽기 직전까지 안호석을 기다렸던 아버지를 통해 그리운 이들이 보낸 눈물이라고 믿었다.

가슴 깊은 곳을 항상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바위가 사라졌다. 이젠 죽음과 당당히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나직한 한숨이 길게 퍼졌다.

뭔가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띠! 띠! 띠! 띠! 띠!

푸슈슉! 푸슈슉!

오늘도 중환자실은 기계의 소음으로 가득했다.

손일석이 눈가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간호사들은 어떻게 1년 내내 근무하는지 몰라. 난 저 소리가 자면서도 들려. 이러다 노이로제 걸리겠어.”

“너도 그래? 난 화장실에 있을 때도 들리더라. 오프가 오프 같지가 않아. 지훈아, 넌 안 그러냐?”

근무 교대를 하러 온 이경석도 투덜거렸다. 하긴 48시간 동안 종일 들어야 하니 환청처럼 들릴 법도 했다.

김지훈이 웃었다.

“형, 환자에게 집중하면 안 들려요.”

“얼래? 지랄하고 있네. 우리도 열심히 봐, 인마.”

“하하하! 그래요? 근데 난 왜 안 들릴까.”

크게 하품을 한 김지훈이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안 들리긴.

김지훈도 주변이 조용할 때면 어김없이 모니터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곤 했다. 그래도 이젠 마음이 편했다.

“경석이 형, 장례 치르고 그다음이 삼오제(삼우제)죠?”

“응. 장 치르고 5일째 되는 날 산소에 다녀오기도 하지. 왜? 호석인지 걔 때문에?”

“예. 일주일 지났는데 이젠 가 봐도 되겠죠?”

“글쎄, 들어 보니까 상황이 묘하던데. 넌 예전부터 친하다고 했으니까 가도 괜찮겠지.”

당직실을 나서는 김지훈의 등 뒤로 손일석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 지훈이 얼굴이 좀 달라지지 않았어요?”

“뭐가?”

“딱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는데, 하여간 달라졌어요. 뭔가 더 밝아지고 편해졌다고나 할까?”

“중환자실에서 그럴 일이 뭐가 있냐. 여자나 생겼다면 모를까? 근데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잖아.”

“어엇! 여자? 내가 그걸 왜 생각을 못했지? 시간이 없긴요. 여자 문제라면 싱글에게 불가능은 없죠.”

‘내 얼굴이 뭐가 어쨌다고 여자까지 나와.’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달린 거울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정말 뭐가 달라졌나?

숙소에서 한잠 자고 일어난 김지훈이 슈퍼로 향했다.

이틀 전까지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지금쯤이면 문을 여셨겠지?’

그날 이후, 안호석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

김지훈도 그리운 이들이 떠났을 때 정신이 없었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을 때라고 해도 안호석의 입장에서는 분명 힘든 시간일 것이다.

슈퍼 간판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슬그머니 안을 들여다보니 윤숙자가 홀로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응, 지훈아.”

윤숙자가 문밖으로 나오며 김지훈의 손을 잡았다.

“그땐 고마웠어. 내가 미리 연락했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안 그래도 호석이가 널 기다리고 있어.”

“호석이가요?”

“잠시만 기다려.”

잠시 후, 안호석이 나왔다.

김지훈을 보며 웃었다.

“형, 오셨어요?”

“날 기다렸다고? 연락을 하지.”

“아니에요. 형도 쉬셔야죠. 이때쯤이면 들를 것 같기도 했고요. 내가 딱 맞혔네. 엄마, 내 말이 맞죠?”

윤숙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끓였다.

번데기 탕이었다.

“서울에는 언제 올라가? 공부해야지.”

아직은 조심스러워 한다는 말이 고작 공부 소리였다.

“곧 가야죠. 엄마가 걱정돼서 며칠만 더 있으려고요.”

“자식, 역시 효자야.”

“효자는요.”

두런두런 이런 얘기 저런 얘기가 오고 갔다.

안호석이 간간이 소리 내 웃었다.

‘보기 좋다. 아버지 때문에 그만 힘들어해도 되지 않을까?’

윤숙자가 번데기 탕과 소주 한 병을 내오자 눈치를 보며 술도 마셨다.

“형, 내가 좀 이상해 보이지 않아요?”

“뭐가?”

“벌써 웃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마음이 너무 편해요. 아직은 생각도 하기 싫지만, 옛날처럼 화가 나거나 그러진 않네요.”

근 10년 동안 쌓인 앙금이 한순간에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안호석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과는 분명 달랐다.

김지훈이 웃으며 안호석의 어깨를 잡았다.

“난 지금 네 모습이 정말 보기 좋다. 이제야 예전의 안호석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

“그래요? 근데 형도 얼굴이 좋아 보여요. 솔직히 형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어두운 구석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환하시네요. 좋은 일 있으셨어요?”

안호석도 손일석과 똑같은 소리를 했다.

김지훈이 얼굴을 만지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일? 그런 거 없는데. 내 얼굴이 그렇게 좋아 보여?”

“예, 형. 꼭 연애하는 사람 같아요.”

“그래?”

희한한 일이었다. 곰곰이 이유를 생각하던 김지훈이 안호석을 보며 씨익 웃었다. 가슴을 짓눌렀던 바위가 한결 가벼워진 탓일지도 몰랐다.

“니 덕인가 보다.”

“예?”

안호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해했다.

김지훈이 빈 소주잔을 흔들었다.

***

특별했던 중환자실 근무가 끝이 났다.

어려운 술기를 배운 것도 아니었고, 환자에 대한 지식이 크게 깊어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마음이 아프면 얼굴이나 행동에 고스란히 나타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손일석이 만세를 불렀다.

“어후! 드디어 끝이다. 지훈아, 넌 다음 근무가 어디야?”

“정신과.”

“역시 김지훈이야. 평탄한 과가 없어요. 고문 받으러 가는구나.”

“그러게 말이다. 갑갑해서 어떻게 살지?”

“난 날마다 오프니까 형이 놀아 줄게. 그 이름도 찬란한 피부과 아니냐. 우하하하! 간만에 술로 불태워 보자. 어때?”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난 공부해야 되는데.”

“공부? 이 자식이, 이게 정신과 가기 전에 아주 미쳐서 가려고 그러네. 너 학생 아니야, 인마. 인턴이라고, 인턴.”

“손일석도 다 됐네. 농담하고 진담을 구별을 못하네.”

김지훈이 씨익 웃자 손일석이 코웃음을 쳤다.

“맞장구를 쳐주니까 별 개소리를 다 듣네. 에구! 이 형이 잘못했다.”

졌다. 손일석에겐 이상하게 밀렸다.

인수인계가 끝난 후, 고경아에게 전화를 하고 숙소로 올라갔다. 주말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주중은 물론 주말 오프까지 확실하게 보장되는 정신과를 도는 덕에 약속을 어길 일도 없었다.

다음 날, 정신과 근무를 위해 본관 9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를 완전히 막은 회색빛 철문이 보였다.

정신과롤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문이었다.

인터폰을 누르자 간호사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인턴 김지훈입니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굳게 닫혔던 철문이 열렸다.

화이트 가운(간호사 면허가 없는 남자 보조 인력)이 문을 열었다.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탁구대와 책장 등이 들어선 제법 넓은 공간이 보였다.

정신과 환자들이 휴식을 즐기는 공간이었다.

지금은 휴식 시간이 아닌지 아무도 없었다.

화이트 가운을 따라 두 번째 철문 앞에 섰다.

철문 중간에 조그만 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눈이 보였다.

김지훈이 인턴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진료실과 간호사들이 있는 스테이션, 그리고 당직실 입구로 보이는 조그만 문이 다였다. 역시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정면에 보이는 세 번째 문을 통과해야 환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감옥 같은 풍경에 갑갑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환자의 안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구조였다.

정신과 과장은 특별한 말이 없었다.

“열심히 돌고, 환자 리포트만 잘 제출해.”

별 기대를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과 영역은 정말 어려웠다.

교과서를 읽다 보면 나도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증상들이 광범위했다.

어쩌면 정상과 정신 질환을 가진 환자들과의 경계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더구나 평소에는 환자를 볼 기회가 없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지만 가족들마저 쉬쉬하는 마당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탓에 정신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한, 학생 때는 물론 인턴 때도 열의를 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김지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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