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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86화 (86/1,329)

제7화 이럴 땐 잠을 못 자도 좋다 (2)

토요일이 왔다.

구미에서의 생활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12시쯤 산부인과에 인사를 한 김지훈이 부리나케 외래로 향했다. 반드시 인사해야 할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수처를 통해 술기의 기본을 알려 준 성형외과의 장성기 과장.

흉부 도관을 비롯해 은비의 일까지 잊지 못할 기억과 가르침을 준 흉부외과의 변상훈 과장.

바이탈의 유지와 마취에 대해 알려 준 마취과의 이용철 과장과 김진호.

당연히 인사를 해야 할 일반 외과의 박경일 과장.

“김지훈, 그동안 수고했다. 내년에 보자.”

누군가는 어깨를 두드리고, 누군가는 슬쩍 고갯짓만 했지만 그들 모두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김지훈 역시 아쉬우면서도 뿌듯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과장님.’

1년 후 다시 온다면 그땐 어엿한 일반 외과 전공의로서 오게 될 것이다. 그때 역시 지금처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랐다.

***

부르릉!

BMW 316G의 묵직한 배기음에 손일석이 감탄을 터뜨렸다. 당장이라도 살 것처럼 요리조리 꼼꼼하게 살피는 모습에 김지훈이 목을 잡고 흔들었다.

“그만 보고 타, 인마. 눈 빠지겠다.”

“알았어. 차 좋네. 역시 돈값을 해. 트렁크가 작은 게 조금 흠이지만 아주 단단해 보여. 아니지. 넷이 탈 일이 흔하겠어?”

손일석이 혼자 중얼중얼 품평을 하는 동안 윤서연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에 탄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잘됐네.’

“지훈아, 빨리 타. 경석이 형, 뒤에 타세요.”

김지훈이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았다.

손일석이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이경석 옆에 앉았다.

부르릉!

힘찬 엔진음과 함께 출발했다.

김지훈이 가끔 깜짝 놀라며 손에 힘을 주었다.

분명 구미에 올 때는 느릿느릿 얌전하게 운전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레이서였다. 속도계 눈금이 140킬로미터를 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밟아? 저번에는 다른 여자가 운전했나?’

은근히 등짝에 식은땀이 흘렀다.

뒷자리에 앉은 손일석이 차가 잘 나간다며 환호를 했다. 조수석과는 체감이 다른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속도감에 익숙해지자 슬슬 무료해졌다. 무료함을 달랠 이야기가 필요했다.

인턴 넷이 한 차에 탔다. 할 얘기는 뻔했다.

병원 일에 이어 저마다 인턴들의 불만과 비애를 터뜨렸다.

이야깃거리가 거의 떨어지자 이경석이 악어와 정갑수까지 거론했다.

“나중에 사회 나가면 피눈물을 흘리고 후회할 텐데, 그 자식들은 왜 그런지 몰라. 근데 신현수는 왜 걔들하고 어울리는 거야? 전에 보니까 꽤 친해 보이던데.”

손일석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걸 누가 알겠어요. 아! 서연아, 너 현수하고 친하지? 현수도 그 성격이면 우리보다 더 악어하고 정갑수를 싫어할 것 같은데, 도대체 왜 만나는 거야?”

윤서연이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신현수가 자신에게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만일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신현수 얘기가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김지훈이 도리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래, 서연아. 넌 이유를 알아? 현수가 그 인간들하고 학교 다닐 때부터 원래 서로 친했나?”

약간은 서운했지만 모르고 있다면 차라리 그편이 훨씬 나았다. 윤서연도 신현수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는 이상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현수도 싫어해.”

“싫어해? 근데 왜 만나. 셋이 자주 만나잖아.”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윤서연이 알고 있는 것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악어 형 아버지가 재단 이사고, 갑수 형 아버지는 보사부 고위 공무원이야. 속사정은 잘 몰라도 그래서 만날 수밖에 없나 봐. 겉으로는 친해 보여도 아니야. 예전에 이사장님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면서 짜증까지 내던데.”

뜻밖의 말이었다.

신현수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손일석이 콧방귀를 뀌었다.

“현수도 악어를 싫어한다니까 꽤 의외네? 정갑수 아버지가 복지부 고위 공무원이란 말이지. 내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저번에 지훈이랑 붙었을 때 아버지 찾는 게 영 이상하더니, 그 백 믿고 설쳐 댄 거네. 치사한 새끼들. 에이! 우리처럼 돈 없고 백도 없는 놈들은 뭘 믿고 사나.”

은근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서연이 네 말이 사실이면 현수도 문제다. 아버지 때문에 만나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 하지만 우리하고는 친해질 수 있잖아. 요새 왜 그렇게 차가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아주 찬바람이 쌩쌩 불어요.”

이경석이 코웃음을 쳤다.

“지훈아, 사람은 크게 뭔 일이 나기 전에는 쉽게 안 변해. 원래 성격이 차가운 놈이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 사실 신현수가 우리한테 아쉬워할 것도 없잖아.”

“맞는 말이에요, 형. 나도 현수 성격이 변했으면 좋겠지만 그럴 놈이 아니죠. 저 혼자 잘난 줄 아는데, 뭐.”

손일석도 신현수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윤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현수 성격이 원래 차갑기는 하지만 사이에 내가 끼면서 더 심해졌어. 하지만 난 지훈이가 좋고, 현수는 남자로도 보이지 않는 걸 어떡해.’

윤서연도 약간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김지훈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거의 천안 근처에 다 왔을 무렵,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든 윤서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훈아, 근데 경석이 형하고 오늘 보니까 되게 친하네. 원래부터 알았어?”

아무리 목소리를 낮춰도 차 안이다.

윤서연의 말에 김지훈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서연아, 경석이 형하고 우리가 얼마나 공통점이 많은 줄 알아? 같이 일반 외과 지원했지, 술 좋아하지, 남자답지. 거기다 천안에서 이번 텀에는 셋이 중환자실까지 같이 돈다. 거의 일반 외과 삼총사라고 봐도 돼. 형, 맞죠?”

“삼총사? 야! 좋은데. 자식! 역시 지훈이가 머리는 좋아. 딱 맞는 말이네.”

손일석이 정색을 했다.

“형, 그거 내가 먼저 한 말이에요. 지훈아, 맞지?”

“니가 언제?”

마침 천안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시치미를 뚝 떼며 이경석에게 물었다.

“형, 배고프지 않아요? 서연이 점심도 못 먹었는데 맛있게 먹을 데 없어요?”

“음식이 그게 그거지, 뭐. 영양탕 맛있게 하는 데는 안다만, 서연이 넌 못 먹지?”

윤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석이 형, 개 말하는 거예요?”

“응. 흔히 보신탕이라고도 하지. 맛이 기가 막혀.”

“아우! 개를 어떻게 먹어. 식욕이 싹 사라졌어요.”

음! 그렇다면?

남자들의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식당이 없었다.

사실 맛있는 집을 찾아다닌 적도 없고, 그럴 시간이나 여유도 없었다. 결국 윤서연이 아는 식당으로 갔다.

정갈하고 깔끔한 음식.

한정식!

물경 일인당 15,000원이었다.

“가격치고는 괜찮은 집이야.”

절반 가격이라면 모를까, 아무도 윤서연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먹는 찌개와 반찬에 몇 가지 음식을 추가했을 뿐이었다. 왜 이렇게 비싼 돈 주고 먹어야 하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2만 원을 꺼내는 남자들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한정식? 다신 안 온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눈빛이 통했다.

***

인턴 숙소에 활기가 넘쳤다.

이제 7개월차에 들어서며 인턴들 대부분이 자신의 업무나 병원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환자에 대한 자신감까지 붙어 천안 병원이라는 새로운 환경에도 긴장하는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후반기에는 또 다른 복병이 있었다. 바로 4년차들의 부재였다.

9월부터는 전문의 시험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업무에서 손을 놓았다. 한순간에 전공의 4분의 1이 주는 것이다.

더구나 4년차는 가장 숙련된 인력들이기 때문에 병원은 물론 남은 전공의들에게도 상당한 타격이었다.

그 여파는 당연히 인턴들에게도 미쳤다.

물론 아무리 손이 달려도 인턴의 업무는 변하지 않는다. 의사가 된 지 6개월이 지났다고 해도 전공이 없기 때문에 한계 역시 명확했다.

문제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전공의들이 직접 했던 잡일들이 모조리 인턴들에게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환자와 관련된 업무 역시 어느 정도는 늘 수밖에 없었다.

손일석이 동기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자식들, 다시 삼월의 아름다운 분위기가 돌아올 텐데 좋아하기는.”

김지훈도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잡잡(雜 job)이란 말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러게 말이야. 잡일만 무지하게 많아지지 않으면 좋겠다. 잡잡이를 피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래도 우린 중환자실로 시작하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뭐.”

손일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힘들기로 악명이 드높은데, 천안 중환자실을 도는 게 다행이라고? 너 미쳤어, 인마?”

“미치긴. 잡일로 힘든 것보다는 환자 때문에 힘든 게 백 배 낫지, 인마.”

한숨을 내쉬던 손일석이 갑자기 김지훈의 손을 잡았다.

“그래! 지훈아, 고맙다. 중환자실 일은 다 네게 맡기마. 난 잡일만 할게.”

김지훈이 코웃음을 쳤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는 아예 하지도 마. 그리고 경석이 형하고 돌 때도 잡일만 할래?”

“에휴! 그렇구나. 이상하네. 왜 점점 일복이 는 것 같지? 설마 너 때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손일석에게 주먹을 흔든 김지훈이 중환자실을 함께 돌아야 하는 이경석을 찾았다.

중환자실은 한시도 비울 수 없는 곳이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데다 상주하는 전공의들도 없었다. 그만큼 근무하는 인턴들이 대단한 압박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도착하자마자 전임 인턴들이 빠르게 인수인계를 하며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응급실 이상으로 업무가 과중한 곳이었다.

손일석과 이경석이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흔들었다.

“휘유! 정말 만만치 않은데.”

중환자실은 모두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신경외과, 호흡기 및 흉부외과, 그리고 순환기와 일반 중환자실이었다.

구역이 구분돼 있긴 했지만 투명한 유리로 벽을 만들어 안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보다 효율적이고 집중적으로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삐! 삐! 삐!

심장을 모니터하는 소리.

위이잉! 슈욱!

감겼다 풀리기를 반복하는 자동 혈압 측정기 소리.

푸슉! 푸슉!

인공호흡기의 펌프 소리.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환자들의 나직한 신음 소리.

베드 사이를 오가는 간호사들의 분주함.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이었다.

중환자실 근무복인 푸른색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손일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흔들며 나가는 이경석이 부러워 죽겠다는 눈이었다.

“일석아,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더라.”

“난 아예 매를 맞고 싶은 생각이 없다, 지훈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개뿔. 너나 즐기세요.”

간호사들이 의외로 굉장히 반갑게 인사를 했다.

중환자실만큼 서로 간의 협조가 필수적인 곳은 없었다. 한 사람만 게으름을 피워도 전체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김지훈 선생님. 손일석 선생님도요.”

“우리도 잘 부탁해요.”

인사를 나눈 후 바로 첫 근무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3주간 생사의 경계에 선 환자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 식사 시간과 오프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 벗어나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명은 반드시 중환자실에 있어야 한다.

상당한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환자를 잃을 수도 있겠지. 지금까지 배운 대로, 하던 대로 최선을 다하자.’

김지훈이 콧소리를 내며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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