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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85화 (85/1,329)

제7화 이럴 땐 잠을 못 자도 좋다 (1)

1시간 정도 지나 4년차가 와서 유도 분만을 시작했다.

“산모분, 남편분, 설명을 들으셨겠지만, 약을 투여한다고 바로 출산이 되는 게 아닙니다. 초산이기 때문에 진통 시간이 꽤 오래갈 수도 있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마취의 위험을 무릅쓰고 제왕 절개를 할 수도 있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산모와 남편이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 옥시토신(자궁 수축제) 투여합시다.”

수액에 섞인 자궁 수축제가 산모의 자궁을 자극했다.

태아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산모의 불룩한 배에 단자가 연결됐다. 모니터에 산모의 혈압과 태아의 심박 수 등이 5분 간격으로 나타났다.

“김지훈, 밤 많이 새워 봤지?”

“예, 선생님.”

“그럼 산모의 혈압이 갑자기 상승하는지, 태아 심박 수는 유지되는지 잘 지켜 봐.”

얼마 후, 인위적으로 유도된 진통이 시작됐다.

산모가 이를 악물며 신음을 삼켰다.

점점 간격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4년차가 수시로 내진을 해 자궁 경부가 열렸는지 확인했다.

산모의 고통이 시작된 지 8시간이나 지났다.

내진을 한 4년차가 아직도 멀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답답해진 남편이 물었다.

“얼마나 더 걸릴까요?”

“자궁 입구가 이제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산모와 태아의 상태는 나빠지지 않았으니까 여유를 갖고 기다리세요. 초산이라 앞으로 10시간 정도는 더 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10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간만에 밤을 새워서인지 무척이나 피곤했다. 하지만 산모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책에서 본 것과 실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눈이 벌게진 김지훈을 본 4년차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4년차 역시 분만 때문에 조각 잠을 자야 하는 탓이었다.

“김지훈, 괜찮겠어? 힘들면 1년차와 교대시켜 줄게.”

“아닙니다.”

피곤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편한 사람이 김지훈이었다.

‘산부인과도 정말 힘들구나. 이유가 있겠지만, 차라리 제왕 절개를 하는 게 낫지 않나?’

별생각이 다 들었지만, 산모와 태아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편하게 분만하려고 했다면 벌써 수술실로 향했을 것이다.

분만실이 산모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으로 가득 찼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진통이 불과 일이 분 간격으로 오는 산모들이 급히 옮겨졌다. 그러고도 두세 시간은 지나야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이런 고통을 어떻게 참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으으으, 여보, 너무 아파.”

최경자의 고통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거의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안타까운 눈으로 최경자를 지켜보던 김지훈이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의사가 붙어 있는 산모는 없었다. 그 말은 언제든 산모와 태아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런! 내가 지금 졸 때가 아니구나.’

졸음이 몰려올 때마다 세수를 하며 잠을 쫓았다.

진통이 시작된 지 무려 15시간이 지났다.

최경자가 5분마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아아! 여보, 나 죽어.”

고통을 참기 위해 움켜쥔 남편의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김지훈이 산모였다면 내진을 한 4년차의 말에 절망했을지도 몰랐다.

“이제 7센티미터 정도 열렸네요. 빠르면 두세 시간 내에 분만을 시도할 수도 있겠습니다. 산모분,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참고, 특히 숨을 잘 쉬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태아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아직도 멀었다니, 정말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학생 때 잠깐 본 것은 허상이었다.

산모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피곤을 못 이기고 졸던 남편이 최경자의 비명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기를 반복했다. 김지훈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자리를 지켰다.

드디어 진통이 일이 분 간격으로 오기 시작했다.

자궁 경부가 10센티미터 정도 열린 것을 확인한 4년차가 산모를 분만 침대로 옮기라는 지시를 내렸다.

17시간 만에 출산이 시작됐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숨 크게 쉬고 힘주세요, 힘.”

“아아악! 후흡, 후흡.”

태아의 머리가 골반을 지나 산모의 자궁 경부를 통과해야 한다. 산모의 고통이 더욱 심해졌다. 무통 분만을 위해 수액에 연결된 진통제 키트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힘. 산모분, 힘주고, 숨 크게 쉬고.”

이런 고통 속에서 산부인과 과장의 말이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최경자는 고통을 참으며 배에 힘을 줬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아아악! 아아악! 후흡, 후흡.”

비명 소리마저 떨렸다.

고통이 극에 달한 것이다.

그때 과장이 크게 소리쳤다.

“자! 나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김지훈도 주먹을 꽉 쥔 채 초조한 눈으로 출산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밀려오던 잠은 어디론가 싹 사라졌고, 오로지 태아의 울음소리만 기다렸다.

“으으으! 후흡! 후흡! 으으으! 후흡! 후흡!”

막바지 고비였다.

자궁 경부를 통과한 태아가 산도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산부인과 과장이 손을 내밀었다.

간호사가 멧젬(metzem:끝이 둥글고 구부러진 수술용 가위)을 건넸다. 과장이 거침없이 회음부와 산도를 5센티미터 정도 잘랐다. 길고 깊게 벌어진 산도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마취도 하지 않고 생살을 잘랐다.

산모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출산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침내 태아의 머리가 보였다.

어깨가 보이고, 팔과 다리가 엄마의 몸을 빠져나왔다.

양수에 흠뻑 젖은 몸.

여기저기 허옇게 흔적을 남긴 태변.

소독된 천을 시뻘겋게 적신 엄마의 피.

탯줄을 자르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소아과 간호사가 아이의 몸을 닦았다. 흡입기로 입안에 든 이물을 제거하고 거꾸로 든 채 아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찰싹! 찰싹!

“응애! 응애!”

아이가 힘차게 울음을 터뜨렸다.

두 다리 사이에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았다.

TV에서 흔히 봤던 아기는 없었다.

열 달 동안 양수 속에 있었던 탓에 온몸이 쪼글쪼글했다.

뽀얀 피부는 어디에도 없었고, 온통 새빨갛기만 했다.

하지만 엄마의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과 기쁨, 그리고 감사의 마음이 가득했다. 고통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깊게 절개했던 회음부를 꿰매는 것도 몰랐다.

10여 분 동안 엄마의 품에 안겼던 아이가 신생아실로 옮겨졌다. 그제야 산부인과 과장이 남편을 찾았다.

“남편분, 축하드립니다. 딸입니다. 엄마도 아주 잘해 주셨고, 모두 건강합니다.”

남편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눈만 껌벅거렸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된 남자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김지훈은 긴 숨만 내쉬었다.

새 생명이 탄생했다.

열 달 동안 지독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엄마의 눈물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고통과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이제야 알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근 24시간을 산모와 함께했다.

씻을 힘도 없어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가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출근할 시간이었다.

산부인과 병동과 분만실의 풍경이 어제와는 사뭇 다르게 보였다. 오늘도 분만실은 고통스러운 비명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속에 감긴 의미가 달랐다.

분만을 앞두고 있는 산모가 웃고 있었다. 이제 막 출산을 한 산모의 퉁퉁 부은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이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건강한 아이의 울음소리는 산모가 겪은 지독한 고통과 산부인과 의사들의 땀과 피로를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그들의 피곤한 얼굴에서 열정과 자부심을 엿보았다.

‘산모도, 선배들도 정말 대단하다. 이래서 산부인과를 메이저 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구나.’

공연히 일반 외과, 내과, 소아과와 더불어 산부인과를 메이저 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과였다.

김지훈은 남은 날 동안 산부인과 근무에 최선을 다했다.

여전히 잡일이 대부분이었다. 손이 모자랄 때나 수술과 분만에 참여했다. 사소한 일들이었고, 땜빵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산부인과 인턴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

어느덧 마지막 주, 마지막 밤이 왔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가던 김지훈이 윤서연과 딱 마주쳤다.

“지훈아, 근무 끝났어?”

“응. 너도 끝났지? 저녁은 먹었어?”

“아직.”

구내식당 이용 시간이 끝났는데도 아직 안 먹었다니, 여전히 외부 식당을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슬며시 고개를 흔들다 말고 한쪽 눈을 찡그렸다.

우연히 마주친 것 같지가 않았다.

감이 딱 왔다.

‘어째 내일 같이 올라가자고 하려고 온 것 같네. 서연이 입장도 있고, 혹시 내가 잘못 안 거면 창피할 수도 있으니까 은근슬쩍 물어보는 게 좋겠지.’

“배고프겠네. 근데 너도 내일 천안에 바로 가?”

“응, 그러려고. 집에 갔다가 천안으로 다시 오려면 너무 피곤할 것 같아. 넌?”

“나야 당연히 천안으로 직행이지. 잘됐다. 혹시 차에 남는 자리 있어?”

기대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반색을 하던 윤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와는 너무 다른 반응인 데다, 뭔가 뒷말이 남은 눈치였다.

“있긴 한데, 웬일이야?”

“웬일은, 자리 남으면 우리 좀 태우고 가라. 대신 가는 길에 저녁은 확실하게 책임진다.”

“우리? 일석이 말하는 거야?”

“응, 일석이하고 경석이 형.”

순간 윤서연의 눈가에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단번에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 지금은 김지훈과 최대한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급할 것 없어. 내가 너무 강하게 나가면 분명 부담스러워하겠지? 편안하게 조금씩 다가가면 언젠가는 마음을 열 거야.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마.’

입술을 꼭 깨물고 생각에 잠겼던 윤서연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일 2시에 주차장에서 볼까?”

“오케이, 고맙다.”

의외로 편안하게 답을 해 김지훈이 시원하게 웃었다.

속마음이야 어떤지 모르지만, 정훈철의 말대로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이 답이었다.

먼저 숙소에 와 있던 손일석이 김지훈의 말을 듣다 말고 부르르 두 주먹을 떨었다.

“김지훈, 잘했어. 드디어 내가 비엠따블유를 타 보는구나. 으하하하.”

손일석이 휘파람까지 불며 좋아했다.

“네 차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좋아?”

“지훈아, 뭐든 간절하게 원하면 이루어지는 법이다. 내 꿈은 말이야, 오픈카에 아리따운 여인 둘을 태우고 동해안을 달리는 거거든.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않냐? 그러려면 미리 오픈카가 나오는 회사의 차들을 타 봐야지. 그래야 어느 차를 살지 결정할 거 아니냐.”

“엄청 비쌀 텐데. 돈도 없는 게 오픈카는.”

“벌어야지, 모아야지.”

김지훈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잘도 모으겠다. 하긴, 여자들한테 쓰는 돈 착실하게 모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지훈아, 네 말이 맞다. 저 자식이 술 안 사는 이유가 있더라구. 저번에 보니까 치사하게 혼자 둘을 만나고 있데.”

어느새 이경석이 귀신처럼 손일석의 뒤에서 나타났다.

“어우! 깜짝이야. 형, 기척 좀 해요. 닌자도 아니고. 그리고 형은 유부남이잖아요. 난 총각이라구요. 초이스의 미덕도 몰라요?”

“총각? 법적으로는 총각이겠지.”

“어어! 왜 이래요, 형. 나 순수한 놈이에요.”

손일석의 말에 이경석이 코웃음을 쳤다.

“순수는, 얼어 죽을. 그럼 난 천진난만이다, 인마.”

때아닌 설전이 벌어졌다.

김지훈이 벌러덩 침대에 누워 세상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인 싸움 구경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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