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4화 (84/1,329)

제6화 간만에 한가한가? (3)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간호사가 변을 담을 통 하나와 젤리를 더 가져왔다.

“환자분, 조금 아프실 거예요. 변이 너무 딱딱하네요.”

김지훈이 과감하게 손가락을 휘저었다.

돌처럼 딱딱한 변을 파냈다.

슬슬 고약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정말 오래도 참았다.

상당한 양의 딱딱한 변을 제거하고 나서야 무른 변이 나오기 시작했다. 점점 심한 냄새가 풍겼다. 간호사는 슬며시 응급실 문을 열었고, 다른 환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숨을 참으며 변을 파내던 김지훈의 눈에 문득 고통스러워하는 산모의 얼굴이 들어왔다.

임신은 그 자체로 여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이자 고통이다.

힘들어 하지 않는 산모는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42세에 10년 만에 간신히 들어선 아이였다.

임신 중독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육신 때문에 다른 산모들보다 수십 수백 배 더 힘들었을 것이다. 오직 배 속에 든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버텼을 것이다.

이깟 냄새 때문에 눈가를 찡그린 것이 미안했다.

김지훈이 최대한 변을 제거한 후 장갑을 벗었다.

“간호사, 글리세린 50시시로 관장 한 번 더 해요.”

잠시 후, 산모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곧 복통이 사라지고 혈압도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에겐 사소한 문제가 산모에겐 정말 고통스러운 일로 변할 수도 있었다.

남편이 김지훈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똥을 못 눠서 그런지도 모르고 밤새 고생만 할 뻔했습니다.”

적나라한 남편의 말에 김지훈이 웃자 산모의 얼굴이 빨개졌다. 간호사들도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창문과 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켰다.

얼마 후 내려온 산부인과 1년차가 김지훈의 어깨를 툭 쳤다.

“지훈아, 수고했어. 산모분, 혹시 몰라서 그러니까 일단 초음파는 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태아에게 이상이 없으면 집에 가셔도 될 것 같네요.”

김지훈이 초음파실까지 따라갔다.

태아는 건강했다.

산모와 남편이 환하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일종의 해프닝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새삼 환자를 보기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김지훈은 풀렸던 긴장을 살짝 끌어올렸다.

환자를 보다 보면 거의 모든 과와 관련이 있어 그와 연관된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의외일 정도로 산부인과는 기본적인 지식 이외에는 크게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 산부인과 환자를 볼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김지훈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산부인과에서도 배울 것은 많겠지만, 일반 외과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은 없었다. 그 탓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편한 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윤서연과 저녁을 함께했다.

정훈철의 말이 아니더라도 동기와 어색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큼 갑갑한 일은 없었다. 우연히 한 약속이었고, 김지훈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구미에서 가장 고급스럽다는 양식집에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윤서연이 선물로 받은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고 서운해했다. 하지만 인턴을 돌면서 넥타이를 매는 동기는 없었다.

솔직히 목만 갑갑해지고 일하는 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사실 윤서연도 그냥 말해 본 것에 불과할 것이다.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전에 돈가스를 먹은 이후 처음이었다. 맛도 좋았고 분위기도 괜찮았지만 김지훈은 뭔가 어색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은은하게 흐르는 클래식과 나직한 유서연의 목소리에 칼질할 때 나는 소리도 조심스러웠다. 밥을 먹으러 온 건지, 눈치를 보러 온 건지 알쏭달쏭했다.

같은 값이면 시끌벅적한 게 확실히 적성에 맞았다.

‘역시 한국 놈은 칼질보다는 젓가락질이야. 고기는 소주 한 잔 걸치면서 구워 먹어야 제맛이지.’

식사를 마치며 나오는 길에 윤서연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

“지훈아, 괜찮았어?”

이럴 땐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했다.

“괜찮네. 양식 자주 먹어?”

“응. 난 양식도 좋아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사실 시끄러운 데는 식당이 아니라 시장 같아서 딱 질색이거든. 이왕 먹는 거 우아하게 먹는 게 훨씬 좋지 않아? 한식도 전문 한식당에 가면 훨씬 깔끔하고 정갈해.”

“응? 우아? 그… 그렇지.”

‘우아하게 먹는 것도 좋지만, 사람 사는 맛이 나야지.’

자라 온 환경이 다른 탓인지,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았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서연아, 뒷맛이 조금 느끼한데 맥주나 한잔하자.”

“맥주? 어디 조용한 데 알아?”

“그렇게 시끄럽지도 않던데. 전에 갔던 호프집 가자. 그 집 쥐포하고 노가리 맛있더라. 그리고 너도 술 마시면 운전 못 하잖아. 병원에 차 갖다 놓고 마시는 게 좋지 않겠어?”

윤서연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시내에 차를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원에 차를 세운 후 마침 오프인 손일석을 부르자고 했다.

윤서연이 망설이다가 무슨 생각인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둘이 있고 싶지만, 이 기회에 일석이한테 우리가 둘이 만났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좋겠지? 일석이라면 병원에 소문을 쫙 낼 게 분명해. 나쁘지 않아.’

곧 손일석이 합류했다.

“어! 김지훈, 윤서연. 이 시간에 둘이 어디 갔다가 날 부른 거야? 뭐야, 둘이 사귀는 거야? 분위기 묘한데.”

김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

“사귀긴, 이 자식아. 그냥 밥 한 끼 먹은 거야.”

“그냥 밥 한 끼? 불타는 청춘의 남녀가 단둘이 밥을 먹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지. 니들 지금 불꽃을 튀기는 중이야?”

“야, 그딴 소리 하려면 그냥 들어가. 자식이, 술 한잔하자고 불렀더니 아주 소설을 쓰고 앉았네.”

손일석이 입을 내밀며 눈을 반짝였다.

“알았어, 인마. 농담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거 아냐? 서연이는 가만히 있는데 말이야.”

윤서연이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손일석을 부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일석아, 마시자.”

“오! 윤서연이 먼저 술을 먹자는 날도 있네. 좋았어. 대신 전처럼 뻗지는 마라. 지훈이 아주 죽을 뻔했다.”

“지훈이가 먼저 마시자고 했으니까 난 몰라.”

윤서연이 묘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며 손일석과 잔을 마주쳤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실수한 것 같은데? 일석이를 부르는 게 아니었어. 안 되겠다. 이상한 소문이 나기 전에 들어가자.’

마음과 현실은 달랐다.

들어가자는 김지훈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결국 제법 잔을 비우고 나서야 자리가 끝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김지훈의 눈길에 윤서연이 술을 자제했다는 점이었다. 걸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가.”

“지훈아, 오늘 즐거웠어. 일석아, 잘 가.”

윤서연이 밝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숙소로 들어가던 손일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연이가 저런 스타일이 아닌데, 희한하네.”

“뭐가, 인마.”

“서연이가, 원래 조금이라도 시끄럽거나 지저분하면 안 들어가던 애거든. 전에는 그냥 지나갔는데, 아무리 봐도 이상해. 사람이 쉽게 변하진 않잖아.”

내심 뜨끔한 김지훈이 정색을 했다.

“야, 학생 때하고 인턴 때하고 같냐? 그리고 네가 서연이를 어떻게 알아.”

“그렇긴 한데 말이야. 혹시.”

“혹시 뭐?”

“그 자리에는 항상 네가 있었어. 이상하지 않아?”

손일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김지훈을 보았다.

엉뚱한 소리를 하기 전에 확실하게 제압을 해야 했다.

김지훈이 순발력을 발휘했다.

“너도 같이 있었잖아, 인마. 그렇게 따지면 서연이가 널 좋아하는 모양이네.”

“흐음! 헛소리 마라.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머리가 안 돌지? 뭔가 냄새가 나는데, 알 수가 없어.”

손일석이 점점 감을 잡아 오고 있었다.

이럴 땐 생각할 겨를을 주면 안 된다.

“에라, 이 자식아.”

김지훈이 냅다 손일석의 머리를 딱 소리가 나게 쳤다.

눈앞에서 번쩍 튄 불똥에 손일석의 집중이 깨졌다.

툭탁거리며 숙소로 들어선 김지훈이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나랑 다른 점이 많네. 괜히 어색하다고 피하기보다는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대하는 게 훨씬 편하겠어.’

내심 걱정했지만, 호프집에서는 물론 둘이 있을 때도 일상적인 말들만 나눴다.

문득 윤서연과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서운해하겠지만, 김지훈에게는 대단한 변화였다.

***

인턴을 돌면서 피곤함은 정말 많이 느꼈지만, 지루함을 느낄 줄은 몰랐다. 잡일은 많았고, 수술실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제왕 절개 수술이었다.

분만실에서 들리는 산모들의 고통스러운 신음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혹시 여자라면 모를까, 출산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더구나 분만 과정을 참관하는 것은 인턴에게는 불가침의 성역이었다. 볼 것, 못 볼 것 다 본 남편도 분만을 지켜보진 못했다. 산부인과를 지원했다면 혹시 한두 차례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인턴에게 보여 줄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한 여인의 치부를 다 보아야 하는 일인 까닭에 최대한 산모의 권리를 존중해야 했다.

‘야! 일이 이렇게 없기는 처음이네. 일석이 이 자식은 뭐가 힘들었다는 거야?’

하도 일이 단조로워 애꿎은 손일석만 욕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탓에 가끔 식당에서 마주치는 악어의 말과 눈길에 더 신경이 쓰였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다.

악어는 오늘도 지랄이었다.

“많이 먹어라. 새끼, 일 열심히 하나 보네.”

다른 선배의 말이었다면 웃으며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악어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마치 두고 보자는 말처럼 들렸다.

‘수처 한 번 한 것 갖고 평생을 저러려나? 정말 지겨운 놈이네. 씨펄! 내년에는 이렇게 그냥 안 지나간다.’

식판을 싹 비운 김지훈이 일어나다 말고 귀를 쫑긋거렸다.

분만실에서 찾는다는 방송이 나왔다.

“분만실에서 왜 찾지?”

평소 없던 일에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급히 분만실로 달려갔다. 산부인과 4년차가 뜻밖의 말을 했다.

“김지훈, 산모 한 명 올라오는데 임신 중독이야. 혈압도 조절이 안 되고, 산모의 컨디션도 점점 나빠져서 유도 분만을 할 거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연락해.”

“예. 선생님께 직접 연락합니까?”

“응. 지금 수술 들어가니까 수술실로 연락해. 오늘따라 수술하고 분만이 왜 이렇게 많아.”

투덜거리며 수술실로 향하는 4년차를 보며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뭘 지켜보라는 걸까?

쩝쩝 입맛을 다시며 환자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간호사와 함께 분만실로 들어온 산모의 얼굴이 너무 낯익었다.

최경자, 나이 42세의 산모.

손으로 변을 파내 주었던 바로 그 산모였다.

김지훈을 알아본 최경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걷기도 힘든지 남편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남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김지훈 샘, 수술이 끝나는 대로 유도 분만을 시도하신대요. 그때까지 잘 보시래요.”

난감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차트를 받아 들었다.

“아직 예정일이 2주 정도 남았는데, 혹시 진통이 시작되셨나요?”

산모가 힘들어하자 남편이 대신 대답을 했다.

“와이프가 너무 힘들어 해서 왔더니, 몸 상태가 안 좋다고 지금 애를 낳는 게 안전하다고 하네요. 선생님, 괜찮을까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임신 중독을 동반한 산모의 경우 유도 분만이나 제왕 절개를 통해 출산한다는 원칙만 알 뿐이었다.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차트를 보았다.

유도 분만 전에 산모가 해야 할 것들이 쭉 적혀 있었다.

금식을 유지하고, 관장을 먼저 한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일에 대비해 수술에 필요한 검사를 하고, 분만실에서 대기하라는 오더였다.

김지훈이 할 일은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남편이 이것저것 물었지만 함께 걱정해 주는 것이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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