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간만에 한가한가? (2)
마치 한가족처럼 중국집에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대낮부터 탕수육에 양장피에 팔보채까지 시켰다.
정훈철이 빼갈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통에 딱 한 병만 마시기로 했다. 역시 술이 빠진 휴가는 앙꼬 없는 찐빵이었다.
재잘재잘.
어린아이답게 말할 때마다 이리 갔다가, 순식간에 저리로 가는 통에 김지훈은 대답하느라 쩔쩔맸다.
소곤소곤.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지 고경아와 한수임도 깔깔거리며 한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정훈철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빼갈을 탁탁 털어 넣었다.
“지훈아, 형 말대로 했지?”
“그럼요. 지킬 건 지켜야죠.”
“그렇지. 그래야 남자지. 확실하게 결정됐을 때 화끈하게 밀어붙이면 게임 끝이다.”
“예, 형님.”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고경아와 한수임을 보며 사내 둘이 음흉스럽게 웃었다.
승희가 삼촌과 이모를 번갈아 부르며 한시도 무릎에서 떠나질 않았다. 어디서 힘이 나는지 팔팔 날아다녔다.
즐거운 자리에서의 시간은 지독히도 빠르게 간다.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맥주 한 잔 가볍게 했는데 벌서 까맣게 어둠이 내렸다.
“언제 또 보지?”
“3주 후에 천안으로 가니까 그때는 지금보다 서울에 오기 편할 것 같아요. 시간 나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래. 그럼 고생하고 힘든 일 있거나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해.”
김지훈이 팔을 벌리자, 어린 눈에도 작별이 싫은지 승희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삼촌, 빨리 와.”
“그래, 승희야. 밥 잘 먹고 엄마 아빠 말씀 잘 들어야 한다. 그래야 삼촌이 빨리 오지.”
“응, 삼촌. 나 엄마 말, 아빠 말 잘 들을게.”
차마 품에서 떼어 놓기가 아쉬워 정훈철의 집까지 함께 갔다. 차에서 내린 정훈철이 슬며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써라.”
“이게 뭐예요, 형님?”
“응, 청진기. 환자 잘 보라고.”
상자를 받아 든 김지훈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조그마한 상자 하나를 건넸다. 정훈철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뭐냐?”
“만년필이에요. 형수님은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경아 씨하고 상의해서 화장품 하나 샀어요.”
의사인 김지훈에게, 방송국 PD인 정훈철에게 잘 어울리는 선물이었다. 정훈철과 한수임이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은근히 벅찬 가슴을 안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승희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이틀도 남지 않았다. 남은 시간을 더욱 알차게 보내야 했다. 즐거운 만남을 억지로 피할 이유가 없었다.
고경희 핑계를 대고 아침 일찍 고경아를 만났다.
명동에 놀러 가 하루 종일 싸돌아 다녔다.
“경아 씨, 여기 한번 들어가 볼까요? 경희야, 너도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
머뭇거리는 고경아를 끌고 화장품 가게에 들어갔다.
이것저것 구경하던 고경아가 립스틱 하나를 골랐다.
김지훈이 째려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몇 개 더.”
옆에 있던 고경희가 로션인지 뭔지 모를 병을 하나 들고 혀를 내밀었다. 김지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화장품 몇 개를 산 후 기분 좋게 돌아왔다.
소소한 일상과 비싸지 않은 선물이었지만 모두들 즐거워했다. 어쩌면 이것이 큰 행복일지도 몰랐다.
***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 갔다.
밤새 뒤척인 김지훈이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낯선 여인이 손을 흔들었다.
아앗! 저 여인이 설마 고경아?
세련된 옷에 화장 좀 진하게 했다고 이렇게 변해도 되는 걸까? 순수한 여자에서 섹시한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변신을 한 고경아는 유죄가 분명했다.
고경아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어제 고른 향수가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
종이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와이셔츠 두 벌이 들어 있었다.
김지훈이 종이 가방을 받으며 밝게 웃었다.
“고마워요. 전화할게요.”
“네, 지훈 씨. 몸조심하세요.”
버스가 터미널을 벗어날 때까지 고경아가 손을 흔들었다.
일주일간의 휴가가 그렇게 끝이 났다.
평생 잊지 못할 행복한 나날이었다.
구미로 내려가는 내내 하얀 박꽃과 고경아의 웃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 느꼈던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랑의 시작일까?
아니면 한 여인에게 숨어 있던 아름다움이 준 충격?
***
새로운 한 주를 시작했다.
일주일간의 휴가가 가져다준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몸과 마음이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고경아가 준 와이셔츠에 담긴 마음과 새 옷이 주는 뽀송뽀송함이 아니었다면 기분까지 우울할 뻔했다.
전공의에겐 상당히 힘들다는 구미 산부인과가 인턴에게는 천국이었다. 야밤에 갑자기 벌어지는 제왕 절개만 아니라면 부담될 업무가 없었다.
그 점이 도리어 김지훈을 힘들게 했다.
인턴들이 가장 싫어하는 잡일이 많았다.
수술도 가끔 들어가는 데다 그나마 대부분 제왕 절개였다.
산모뿐만 아니라 태아까지 고려해야 하는 탓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빠르게 진행됐다. 뭐 좀 볼라치면 어느새 수술이 끝나 있었다.
더구나 산부인과는 적성에도 맞질 않았다.
몸은 편하지만, 솔직히 지루한 나날이었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어느새 금요일 밤이 왔다.
산부인과 1년차에게 전화가 왔다.
(지훈아, 응급실에 산모 한 명 있는데, 내가 내려갈 때까지 좀 보고 있어.)
“응급실이요?”
또 잡일이겠거니 하고 전화를 받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응급실로 내원하는 산부인과 환자는 극히 드물었다.
심한 하혈을 동반하는 부인과 질환 정도?
대부분의 산모들은 출산 기미가 보이면 바로 외래를 통해 입원했고, 응급실에서 해 줄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부인과라면 혹시 모르지만, 산과에 관련된 문제라면 인턴이 볼 환자가 아니었다. 김지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1년차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응. 지금 분만 때문에 손이 달려서 못 내려가. 임신 중독을 동반한 산모인데, 배가 아프다고 왔다니까 일단 산모가 불안하지 않게만 해.)
“임신 중독이요?”
분만이 급한지 1년차가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툭 끊었다. 김지훈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산부인과 쪽은 정말 기본적인 지식뿐이었다.
응급실로 왔을 때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다. 출산을 앞둔 산모도 불안한데 임신 중독까지 동반했다니, 상당히 갑갑한 일이었다.
‘임신 중독의 삼대 증상이 뭐였지?’
김지훈이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리며 부랴부랴 응급실로 내려갔다.
“지훈아, 산모가 왔는데 왜 네가 내려와?”
“1년차 선생님은 분만 때문에 지금 못 내려오신대. 무슨 환자야?”
“배가 아프다는데 겁나서 뭘 할 수가 있어야지. 임신 중독이라는데 얼굴이 장난이 아니다.”
응급실을 도는 동기가 고개를 흔들며 차트를 내밀었다.
최경자, 나이 42세
IUP(Intrauterine Pregnancy:자궁 내 임신) at 8month
임신한 지 8개월째로, 출산을 불과 한 달 정도 앞둔 산모였다. 초산인데도 불구하고 나이가 40이 넘었다.
원래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퉁퉁 부은 얼굴.
정상을 한참 벗어나 160/90mmHg까지 오른 혈압.
응급으로 시행한 소변 검사상 단백뇨 양성 소견.
전형적인 임신 중독 증상에 나이까지 많아 인턴은커녕 1년차가 보기에도 벅찬 산모였다. 은근히 다가오는 긴장감에 김지훈이 마른침을 삼켰다.
“안녕하세요. 산부인과 인턴 김지훈입니다. 산부인과 선생님들은 분만 때문에 조금 이따가 내려오실 겁니다. 배가 아파서 오셨다구요?”
“예, 배가 너무 아파요.”
출산을 암시하는 진통일까?
나이가 많은 산모지만 초산이다. 그렇다면 10시간 전후에 걸쳐 10분에서 20분 간격으로 진통이 발생할 수 있었다. 간격이 더 빠르다면 출산이 임박했다는 의미였다.
김지훈이 아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언제부터 아프셨고, 간격은 얼마나 되죠?”
“아까 저녁때부터 아프기 시작했어요. 아프다 안 아프다 하는데 간격은 잘 모르겠어요.”
일단 복부 진찰을 했지만 판단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산모에 대한 문제는 능력 밖이었다.
출산 경력이 있다면 산모가 더 잘 알 테지만 초산이었다.
김지훈도 막막하기만 해 기다려 달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해 줄 것은 없었지만 불안한 마음에 아예 산모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았다.
문제가 생기면 총알처럼 노티를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초조한 표정으로 곁을 지키던 남편이 넋두리처럼 말했다.
“선생님, 괜찮겠습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혹시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구! 답답합니다. 결혼한 지 10년 만에 애가 들어섰는데, 와이프 몸이 너무 안 좋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도 힘들어 해서 차라리 애를 지우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와이프가 고집을 꺾지 않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남편의 표정만 봐도 산모의 고생이 정말 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0년 만에 얻은 아이를 포기하기 힘들겠지만, 산모를 보니 남편의 말이 이해가 됐다. 퉁퉁 부은 얼굴에 거친 숨소리까지,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잠시 잠잠했던 복통이 다시 시작됐다.
시계를 보니 불과 5분도 안 지났다.
‘설마 진통인가?’
한 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15분이 지나 또 복통을 호소했다.
진통인지 아닌지 더욱 헷갈렸다.
산부인과 1년차는 내려올 기미도 없었다.
산모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반적으로 출산을 앞둔 진통은 규칙적이다. 그런데 상당히 불규칙한 데다 왼쪽 아랫배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이상한데. 진통 같지가 않네.’
잠시 후, 또 복통이 왔다.
아무래도 진통이 아닌 것 같았다.
산모가 아니었다면 장염이나 변비로 인한 복통부터 의심했을 것이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화장실은 언제 마지막으로 가셨어요?”
가뜩이나 붉게 부어오른 산모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일주일은 됐어요. 사실 임신한 이후로 변을 제대로 본 적도 없어요.”
“일주일이요?”
혹시 변비 때문일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분만실에 연락을 했다.
잠시 고민하던 1년차가 오더를 내렸다.
“글리세린 50시시로 관장하는 정도는 괜찮으니까 해 봐.”
간호사가 50시시 주사기에 글리세린(관장 액)을 채우고 조심스럽게 관장을 했다. 변의를 느낀다고 바로 화장실에 가면 관장 액만 쏟는다. 30분 정도 참은 산모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실패였다.
배는 여전히 아프고, 관장 액만 나왔단다.
산모가 점점 더 힘들어했다.
‘산모라고 해도 출산과 관련되지 않으면 다를 게 없잖아. 일단 확인은 해 보자.’
신중하게 생각해 결정을 한 김지훈이 산모와 남편에게 설명을 했다.
“혹시 출산 진통이 아니라 변비가 심해 배가 아플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전문은 아니지만 진통처럼 보이지도 않고요. 그래서 일단 직장 검사를 해 봤으면 합니다.”
“직장 검사요?”
대단한 검사인 줄 안 남편이 깜짝 놀랐다.
“손가락으로 항문 안을 검사해 대장에 변이 차 있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아주 간단하니까 산모분이 조금만 불편을 참아 주시면 됩니다.”
잠시 고민하던 남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록 인턴이지만 응급실에 내려온 후 한시도 산모 곁을 떠나지 않는 모습을 보아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 렉탈 익잼(rectal exam:직장 검사) 준비해요. 보호자분은 잠깐만 나가 계세요.”
김지훈이 소독 장갑을 끼고는 젤리를 듬뿍 묻혔다.
조심스럽게 항문에 손을 넣었다.
곧바로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돌덩이처럼 굳은 변이었다.
얼마나 딱딱한지 손가락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김지훈이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이 정도면 배가 안 아픈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환자분, 어떻게 참으셨어요. 변을 못 본 지 일주일도 훨씬 더 지났죠?”
그제야 산모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도 아픈 데가 많고, 불편한 탓이었는지 변비는 생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몇 번을 한다고 해도 글리세린 관장으로는 이런 변비를 해결할 수 없었다. 고약하지만 방법은 하나였다.
손가락으로 직접 파내는 수밖에 없었다.
“핑거 에네마(finger enema:손가락 관장) 준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