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2화 (82/1,329)

제6화 간만에 한가한가? (1)

삼겹살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누렇게 익었다.

고경아와 사랑하는 후배들이 함께 있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한 잔의 술을 넘기자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가방을 찾은 고경아가 정갈하게 싸 온 과일을 내놨다. 참외와 수박을 먹기 좋게 잘라 왔다.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드는 후배들의 모습에 김지훈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나 먹으라고 싸 온 걸 이 자식들이 다 먹네.’

갑자기 술자리가 풍성해졌다.

여자들의 수다와 남자들의 허풍이 뒤섞였다.

한 병, 두 병 소주와 맥주가 사라졌다.

술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제법 벌게진 서도진이 고경아에게 잔을 권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형수님, 한잔해요. 어떻게 한 잔도 안 마셔요?”

형수?

아직은 연인 사이도 아닌데, 기분이 묘했다.

김지훈은 딴청을 부렸고, 고경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고경아가 잔을 받으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주세요.”

“에이! 그러면 안 되는데. 아직 모르시는구나. 예전에 형이 자기랑 결혼할 여자는 딱 한 가지만 본다고 했어요.”

“뭔데요?”

“주량이 소주 한 병인 여자.”

김지훈이 눈을 부라렸다,

“그건 인마, 술김에 한 말이지.”

“형, 취중 진담이란 말이 괜히 있는 줄 알아요? 형이 한 말이니까 난 몰라. 형수님, 앞으로 잘되시려면 이 잔 드셔야 합니다. 건배.”

“야, 경아 씨 술 못 마셔, 인마.”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고경아가 단번에 잔을 비웠다. 맥주도 아닌 소주였다. 다들 박수까지 치며 환호를 했다. 김지훈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경아가 서도훈의 잔까지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얼굴이 난로처럼 화끈거리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조용한 강민수까지 잔을 들었다.

김지훈이 서둘러 막았다.

“경아 씨, 괜찮아요?”

뭔가 치밀어 오르는지 고경아가 입을 막으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자식들이. 줘, 인마. 내가 대신 마실게.”

“어머! 흑기사!”

이번에는 후배 여자 친구들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잔을 권했다. 이래저래 마셔야 했다. 벌써 3일째다.

단둘만의 오붓한 시간은 빼앗겼지만 의외로 즐거웠다.

슬슬 술기운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김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났다.

“도진아, 막차가 몇 신 줄 알아?”

“그 정도는 이미 다 알아 놨죠. 9시까지 있어요. 오늘 가려구요? 그러지 말고 자고 가지.”

“가야 돼. 지금 몇 시냐?”

아직 주변이 환했지만 어느새 6시가 넘었다.

라면 국물로 해장을 하고 고경아와 단둘이 강가로 갔다.

고경아가 살짝 비틀거렸다.

“괜찮아요? 술도 못 마시면서.”

“지훈 씨 곤란할까 봐 그랬죠.”

농담이지만 결혼이라는 말까지 나온 마당에 술을 마신 게 더 곤란한 일이었다. 어색한 기분에 김지훈이 물장구를 쳤다.

‘경아 씨는 어떤 마음일까?’

자신의 마음도 모르면서 여자에게 대놓고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만나라는 정훈철의 말을 떠올린 김지훈이 빙그레 웃으며 후배들과의 추억을 들려주었다.

차가운 강물이 부드럽게 발목을 간질였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보니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술기운이 때문인지 고경아가 김지훈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김지훈은 말없이 강물만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8시가 훌쩍 넘었다.

정류장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하던 김지훈이 아쉬운 눈으로 고경아를 살며시 흔들었다. 눈을 뜬 고경아가 깜짝 놀라며 두리번거렸다.

“경아 씨, 8시가 넘었어요.”

“어머! 가아죠.”

역시 아낄 수밖에 없는 후배들이었다.

이미 배낭까지 다 챙겼다.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었다.

정류장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째 후배 놈들의 웃음소리가 이상했다.

“히히히!”

뭔가 음흉하면서도 잔뜩 신이 난 웃음이었다.

그랬다.

막차는 9시가 아니라 8시 30분이었다.

멀리 마지막 버스의 희미한 불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 자식들을 그냥.’

“경아 씨, 어떻게 하죠? 후배들이 시간을 잘못 안 모양이네요. 미안해요. 일단 경희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부터 하고 차근차근 생각해 보죠. 큰일 났네.”

김지훈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부산하게 움직였다.

고경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경희에게 전화를 했다.

“경희야, 못 들어갈지도 몰라. 사정이 생겨서 그렇게 됐어.”

고경희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미 떠난 버스를 잡아 탈 수는 없었다. 한숨 돌렸는지 한참 동안 사정을 설명한 고경아의 표정이 조금은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곤란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일단 다시 가죠. 사람이 많으니까 서울에 갈 방법을 알지도 모르잖아요.”

밤은 깊어 갔고, 달리 방법은 없었다.

김지훈이 나타나자 다들 의외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서도진의 눈빛이 특히 강렬했다.

‘형, 둘이 오붓하게 있어야지 여기는 왜 왔어요?’

‘지금 이게 날 위한 거냐?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 이 자식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흔한 드라마처럼 막차를 놓치면 역사가 이루어지나?

절대 선을 넘지 말라는 정훈철의 말이 아니더라도 순간적인 유혹에 불장난을 할 나이는 아니었다. 아직도 치기가 남은 학생과 어엿한 직장인의 차이인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를 높일 힘도 없었다.

“막차 시간이 8시 반이잖아. 어떻게 그걸 잘못 아냐, 이 자식들아.”

“어, 9시가 아니었어요? 큰일 났네.”

얼씨구, 이미 말을 맞췄을 서도훈까지 모르는 척한다.

“알았어, 인마. 지금 서울 갈 방법이 있나?”

“택시를 타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없죠. 근데 돈이 얼마예요, 형. 우리가 착각해서 미안한데, 오늘 꼭 갈 이유가 없으면 자고 가세요. 자리가 불편하면 민박이라도 알아볼까요?”

눈치가 심상치 않은지 이제야 진지해졌다.

마치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쉰 김지훈이 배낭을 내려놓았다. 민박은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이었다. 솔직히 손만 잡고 잘 자신이 없었다.

불타는 청춘이 아닌가!

난감한 일이었다.

“경아 씨, 어떡하죠?”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던 고경아가 웃고 말았다.

운다고, 화를 낸다고 서울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된 거 어떻게 하겠어요. 마침 텐트가 2개니까 전 동생들하고 같이 자죠, 뭐.”

“그래도 되겠어요?”

“괜찮아요. 지훈 씨도 하루라 아쉬웠을 텐데, 후배분들하고 재밌게 노시면 좋잖아요.”

마음이 참 넓다.

김지훈이 후배들을 째려보며 소리쳤다.

“에이! 자식들! 가서 맥주하고 안주나 사 와. 내일 아침에 찌개 끓일 것도 사 오고.”

만 원짜리 5장이었다.

횡재를 한 후배들이 부리나케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화가 풀리지 않는 표정으로 후배들을 보던 김지훈이 돌아서며 피식 웃었다. 내심 생각했던 계획이 모두 틀어졌지만 어쩌면 그 이상의 결과를 얻었는지도 몰랐다.

‘형님이 주신 10만 원이 고대로 날아갔네. 개시키들.’

본의 아닌 실수를 만회라도 하려는지 후배들이 장작까지 사 왔다. 모닥불까지 피우고 빙 둘러앉았다. 타닥, 불티가 튀는 소리에 은근한 흥분과 함께 기분이 살아났다.

맥주까지 돌자 분위기까지 달아올랐다.

서도진과 서도훈이 맥주를 따르며 물었다.

“형, 일반 외과 지원했다면서요.”

“응. 어떻게 알았어?”

“일석이 형한테 들었죠. 사실 우리도 일반 외과 하고 싶은데 고민이에요?”

“일반 외과 하고 싶다고? 니들이 오면 좋지.”

마음이 맞는 선후배들과 의국 생활을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마치 일반 외과 전공의라도 된 양 김지훈이 고개를 맞댔다.

“야야, 고민할 거 없어. 최고야, 최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비전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각자 목표와 희망이 다를 것이다. 그래도 멋진 후배들과 함께할 좋은 기회였다. 김지훈이 열의에 차 입을 열려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가만 그럼 경아 씨가 수술실 간호사인 걸 알게 되잖아. 이거 곤란한 일이 생기는 거 아냐?’

잠시 눈만 말똥말똥 뜬 채 서도진을 보던 김지훈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슬쩍 고경아를 보니 뭐가 그렇게 좋은지 소리 내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1년 후의 일이다. 걱정도 팔자였다.

김지훈이 본격적으로 썰을 풀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 가자 누군가는 추억에 잠기고, 누군가는 오늘을 추억으로 삼았다.

즐거운 밤이었다.

강민수를 시작으로 하품이 전염병처럼 퍼졌다,

이제 잘 시간이었다.

고경아의 잠자리가 편한지 확인한 후 김지훈도 자리에 누웠다. 고경아 대신 마셨을 때 빼고는 적당히 조절해 마셔서인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고경아가 마신 두 잔의 술.

본의는 아니었지만 1박 2일이 된 여행.

우연처럼 벌어지는 일도 길게 이어 보면 필연인 경우가 많다. 오늘 일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유난히도 맑은 밤하늘이 별빛으로 가득했다.

하얀 박꽃 앞에서 환하게 웃던 고경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다음 날 늦은 아침, 김지훈이 부산을 떨었다.

6년간의 자취를 통해 얻은 요리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얼큰한 김치찌개뿐이었지만 꿀맛이었다.

“캬! 역시 김치찌개 끓이는 솜씨는 여전하네요. 형, 남은 소주 한 잔 더 할까요?”

누가 주당 아니랄까 봐 서도진이 주섬주섬 소주를 꺼내 왔다.

깰 만하면 술이 눈앞에 나타났고, 아직은 젊음이 넘치는지 잘도 들어갔다.

내친걸음이었다.

오전 내내 강가에서 물놀이를 했다.

병원에서는 의사지만 밖에서는 20대 중반의 청춘이었다.

웃고 떠들며 주어진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결국 후배들과 함께 마지막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후배들과 작별을 하고, 고경아의 집 앞까지 왔다.

11시였지만 한남동은 아직도 불야성이었다.

고경아와 더 있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 보였다.

“피곤해요?”

“아니요, 정말 즐거웠어요.”

눈이 거의 감기면서 피곤하지 않단다.

“아까 형님하고 통화했는데, 내일 꼭 오라고 하시네요. 같이 오라는데 어떻게 하죠? 피곤하면 전화해서 모레 간다고 말씀드릴게요.”

“전 괜찮아요. 형부도 휴간데 우리 때문에 시간을 뺏기면 안 되잖아요. 이미 약속하셨으면 내일 같이 밥 먹어요.”

“알았어요. 그럼 내일 11시에 만나요.”

정말 아쉬운 시간이었다.

고경아가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바라보던 김지훈이 병원으로 향했다. 휴가철이니 인턴 숙소에 빈 침대가 많을 것이다.

병원 앞에 도착한 김지훈은 잠시 망설이다 슈퍼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샀다. 응급실에 들어서자 간호사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머! 김지훈 선생님. 웬일이세요.”

그새 선생님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휴가 나왔어요. 한가하네요. 이거 먹고 밤새 힘내서 열심히.”

함께 일하고, 같이 힘들어서였는지 이상하게 응급실에는 정이 많이 갔다. 주먹을 흔든 김지훈은 인턴 숙소로 향했다.

멀리 떠난 것도 아닌데 정말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는 것 같았다. 얼마 후, 편안한 숨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

승희가 마구 달려와 와락 품에 안겼다.

“삼촌!”

“어우! 넘어지면 어떡하려구.”

조그마한 몸이 찰거머리처럼 목에 달라붙었다.

“삼촌, 우리 뭐 먹어.”

“뭐 먹을까? 승희 먹고 싶은 거 먹자.”

“아이스크림하고 초콜릿.”

“그건 밥 먹고 먹어야지. 다른 거.”

나오는 말이라고는 죄다 군것질거리였다.

김지훈이 웃으며 정훈철을 보았다.

“형님, 오늘은 제가 살게요. 뭐 드실래요?”

“어, 네가 산다고? 그럼 비싼 거 먹어야 될 텐데. 여보, 뭐 먹을까?”

“당신은.”

한수임이 눈을 흘기면서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른도, 아이도 좋아하는 음식이 무얼까?

간단했다.

짜장면이면 승희는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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