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어쨌든 휴가는 즐겁다 (2)
정말 피를 나눈 형인 것만 같았다.
“네, 고맙습니다. 갔다 와서 연락드릴게요.”
“그래, 빨리 가. 처제, 잘 갔다 오고, 이 자식이 말 안 들으면 나한테 바로 얘기해. 혼내 줄게. 지훈아, 꼭 전화해.”
“네, 형부. 잘 갔다 올게요. 운전 조심하세요.”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던 김지훈이 고경아의 손에 들린 짐을 잡았다.
“이리 줘요.”
“괜찮아요, 지훈 씨.”
“어허! 이런 건 남자가 들어야죠.”
끙! 고경아가 챙길 것이 이렇게 많았나?
당일치기에 뭘 이렇게 많이 가져가는지, 희한한 일이었다.
“뭐가 이렇게 무겁지? 오늘 하루 가는데 도대체 뭘 가져온 거예요?”
고경아가 살짝 눈을 흘겼다.
“여자는 다 그래요. 화장품만 챙겨도 무게가 얼만데.”
오늘은 화장도 거의 안 했으면서 별일이었다.
하긴 연애 경험도 없는 김지훈이 뭘 알겠는가!
동네 목욕탕을 가도 가방 가득 짐을 가져가는 게 여자다.
고경아와 단둘이 청평을 간다니 무척 설레었다.
매표구 앞의 긴 줄도, 버스 앞에 늘어선 수많은 사람들을 봐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청평 가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줄이 줄어든 것 같지도 않은데 버스 안은 이미 콩나물시루였다. 승객들이 너무 많아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고경아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미안하면서도 즐거웠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이리저리 밀렸다.
등을 지고 섰던 고경아가 낯선 사람들과 몸이 부딪치자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다.
부르릉!
정차했던 버스가 급하게 출발하자 고경아가 한쪽으로 쏠렸다. 고경아의 머리카락이 코끝을 스치며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야릇한 감촉에 김지훈이 얼굴을 붉혔다.
청평으로 가는 길은 멀었고, 승객은 줄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편했으면 하는 마음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고경아의 앞을 막아섰다. 마음뿐이었다. 버스가 요동칠 때마다 앞으로, 뒤로 밀렸다.
때론 김지훈이, 때론 고경아가 안다시피 서로의 몸을 잡았다. 버스의 흔들림을 따라 야릇한 감촉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약간은 빠른 듯한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경아가 고개를 숙이며 빨개진 뺨을 감췄다.
북새통처럼 변한 버스 안.
한마디도 나누기 어려운 소음.
사람들의 땀 냄새.
섰다 가다를 반복할 때마다 중심을 잡아야 하는 불편함.
그래도 김지훈은 좋았다.
고경아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이 안쓰러웠다.
김지훈이 슬며시 땀을 닦아 주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던 고경아가 김지훈을 보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주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편안함과 즐거움이 감돌았다.
청평에 도착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아직 기승을 부리기 전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김지훈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사람이 꽤 많네요. 힘들었죠?”
“아니에요.”
고경아의 목소리가 왠지 기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버스 안에서 그렇게 몸을 비빌 수밖에 없었으니 무안할 법도 했다,
유명한 유원지답게 정류장이 막 도착한 사람들로 붐볐다.
음료수를 마시며 주변이 한산해지기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 오붓하게 둘은 강가로 향했다.
유난히도 맑고 청명한 날이었다.
강가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르른 벼들이 사라락 소리를 내며 상큼한 풀 향기를 전했다. 줄지어 선 시골집들이 정겨웠고, 나직한 담장을 따라 수줍게 핀 박꽃들이 햇볕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도시의 번잡함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한가로움을 만끽하던 고경아가 활짝 웃으며 뒤돌아섰다.
맑은 얼굴이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과 환한 미소에 가려졌던 아름다움이 보석처럼 빛났다.
그 순간, 마치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가슴에 들어박혔다.
스물셋 청춘의 미소는 순수했다.
꾸밈없는 얼굴과 수수한 옷차림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걸음을 멈춘 채 자신만 바라보는 김지훈을 보며 고경아가 수줍게 말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빨리 가요.”
‘경아 씨가 이렇게 예뻤나?’
눈에 콩깍지라도 씐 것처럼 고경아의 모든 것이 예뻤다.
단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빨간 입술이 눈에 확 들어왔다.
불현듯 고경아와 입을 맞추고 싶었다.
최소한 손이라도 잡고 싶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다가섰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고경아를 보며 막 손을 내미는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
‘형? 설마 날 부르는 건가?’
“지훈이 형!”
‘지훈이 형? 설마 이 목소리는?’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홱 돌렸다.
헉! 이럴 수가!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학교도, 병원도, 서울도 아닌 청평에서 후배들을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가장 아끼는 1년 후배들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다니, 이건 꿈이 분명했다.
김지훈이 마른침을 삼켰다.
“니들이 여기 웬일이냐?”
“와아! 정말 형 맞죠? 형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요. 휴가 온 거예요?”
“응? 응, 휴가 왔지.”
“설마 혼자 오지는 않았을 테고. 근데 형 여자 친구도 없잖아요. 누구랑 왔어요? 혹시 일석이 형하고 둘이?”
뻘쭘하면서도 뭔가 난감한 표정.
다소곳하게 서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당황한 여인.
후배들의 시선이 일제히 고경아에게 향했다.
“설마 형이랑 같이 온 거예요?”
설마라는 소리에 김지훈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이 자식들이 그동안 날 뭐로 본 거야? 일석이랑 같이 왔냐고? 나 참!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내가 미쳤냐, 남자들끼리 휴가를 오게?’
“서도진, 너 지금 설마라고 했어? 확실한 거지.”
김지훈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서도진이 흠칫하며 손을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졸업할 때까지 여자 친구 없었잖아요. 요즘 엄청 바쁘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뜻밖의 일이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김지훈이 고경아의 옆에 서며 후배들을 가리켰다.
“경아 씨, 인사해요. 학교 후배들이에요. 니들도 인사해.”
“안녕하세요, 고경아예요.”
“안녕하세요, 서도진입니다.”
“서도훈입니다.”
“강민수입니다.”
모두들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말이 길어져야 봐야 곤란한 일만 생길 것이 뻔했다.
김지훈이 태연한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물었다.
“니들은 국가 고시 준비도 안 해? 청평엔 웬일이야?”
서도진이 헤 웃으며 뒤를 가리켰다. 고경아보다 약간 어려 보이는 여자 3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 자식들이 공부는 안 하고.’
김지훈의 눈치를 본 서도진이 정색을 했다.
“형, 시험 보려면 아직도 멀었잖아요. 우리도 놀 땐 놀아야죠. 다들 인사해, 학교 선배님이셔.”
발랄한 인사에 고개를 숙인 김지훈이 눈짓을 하며 물었다.
“누구야?”
“형도 참! 누구겠어요. 여자 친구들이죠. 우리가 형 같은 줄 아시네. 아니구나, 지금은 똑같네요.”
“이게.”
김지훈이 눈을 부라리자 서도진이 슬쩍 물러나며 웃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적당히 핑계를 대고 단둘이 있고 싶었지만 어째 후배들의 눈초리가 묘했다.
어차피 다들 청평에 놀러 왔다.
아무리 떨어져 있는다고 해도 거기가 거기일 게 분명했다.
빤히 보는 앞에서 모른 척하고 데이트를 즐길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냥 얼굴만 아는 후배면 별 상관이 없겠지만, 예과 때부터 친하게 지내 온 후배들이었다.
따로따로 있는 것이 더 어색한 일이었다.
이놈들하고는 그렇게 살아왔다.
‘어떻게 하지? 밥 한 끼 사 주고 아예 다른 데로 가?’
이 시간에 움직였다가는 자리도 못 잡고 사람들에게 치일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뗐다.
‘일단 가 보자. 으휴! 이 자식들은 하필.’
김지훈과 고경아가 강가로 향하자 후배들이 당연하다는 듯 뒤따랐다. 서도진이 한술 더 떴다.
“형, 점심 뭐 먹을 거예요?”
“왜, 사 달라고?”
“뭐, 그건 아니고. 사실 우린 돈도 없고 그래서 라면밖에 못 먹거든요. 그냥 남는 음식 있으면 조금만 주세요. 주시면 좋고, 아니면 그냥 라면 먹죠, 뭐. 도훈아, 우리 김치는 있냐?”
모르는 사람은 형제로 알겠지만, 서도진과 서도훈은 성과 돌림자가 같은 뿐이었다, 그러나 형제보다 더 죽이 잘 맞았다.
서도훈이 슬며시 김지훈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김치?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리고 우린 여섯인데 형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사달래냐. 하긴, 전에 일석이 형은 우리 만나니까 데이트하다 말고 밥을 사 주긴 했었지.”
한숨만 나왔다.
사실 김지훈도 학교 다닐 때 똑같이 행동했다.
그러니 누가 누굴 탓하겠는가?
다 자업자득이었다.
김지훈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고경아가 웃으며 말했다.
“지훈 씨, 언니가 삼겹살 싸 먹을 거 넉넉하게 준비해 주셨어요. 후배분들 만날 줄 아셨나 봐요.”
“삼겹살이요? 야! 맛있겠다.”
그나마 조용했던 강민수까지 침을 꼴깍 삼켰다.
“경아 씨, 괜찮겠어요?”
“어차피 놀러 온 건데요, 뭐. 같이 놀아요. 사람이 많으면 더 즐겁잖아요.”
김지훈의 입장을 고려한 말이었지만 그 덕에 구상했던 모든 작전이 깨졌다. 김지훈이 이를 갈고는 손가락으로 강가를 가리켰다.
스물네다섯이나 된 놈들이 애들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어라, 박수까지 치다니. 이 천진난만한 여대생들은 또 뭐냐?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
김지훈이 열심히 텐트를 치고 있는 후배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김지훈의 목소리에 여유가 넘쳤다.
“도진아, 니들은 언제 가냐?”
“내일 가는데요.”
“1박 2일로 왔어? 그럼 여자 친구들은.”
“어? 형, 왜 그런 눈으로 우릴 봐요. 텐트 2개 갖고 왔어요. 남자 여자 따로따로 잘 거예요.”
그럼 그렇지. 함부로 행동할 후배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1박 2일에 인원이 여섯인데 짐이 너무 적었다. 라면 몇 개에 코펠과 버너, 그리고 담요가 다였다.
“근데 니들 그거 갖고 이틀을 어떻게 지낼 생각이냐. 다 사 먹으려고? 돈은 갖고 왔어?”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에이! 형이 있는데 돈이 왜 필요해요. 덕분에 돈 굳었네.”
넉살 좋게 말을 받은 서도훈이 버너를 켜 보고는 코펠 뚜껑을 흔들었다.
“형, 준비 끝났습니다. 삼겹살만 사 오면 됩니다. 참! 싸 먹을 거 갖고 오셨다면서요.”
“어, 싸 먹을 거?”
고경아가 웃으며 배낭을 풀었다.
무거운 이유가 있었다.
상추에 쑥갓, 참기름과 소금, 그리고 쌈장, 적당히 쉰내가 나는 묵은 김치에 나무젓가락까지 많이도 싸 왔다.
“야! 완벽하네.”
서도진이 탄성을 지르며 김지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왜 이러세요. 돈을 줘야 삼겹살을 사 오죠.”
복수할 기회다.
김지훈이 씩 웃었다.
“그래, 알았어. 줘야지. 만 원 줄 테니까 삼겹살 3근하고 음료수에 술 사 오고, 남는 돈 있으면 여자들 먹게 과자도 좀 사 와. 아! 거스름돈은 됐다.”
서도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후유! 형, 그런 유머는 이제 통하지도 않아요. 도훈아, 10만 원이면 충분하겠지?”
10만 원? 이런 날강도 같은 놈들이 있나!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에휴! 내 수법을 고대로 써먹는구나.’
“5만 원, 오케이?”
“감사합니다, 형님. 자! 그럼 우린 먹을 거 사 올 테니까 니들은 삼겹살 먹을 준비 좀 해.”
“오빠, 과자 많이 사 와요.”
여자 친구들이 우르르 일어나 부산하게 준비를 했다.
고경아도 함께 쪼그리고 앉았다.
김지훈이 무릎을 포개고는 물끄러미 고경아를 보았다.
두런두런 대화가 오가더니 어느새 언니 동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보기와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