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0화 (80/1,329)

제5화 어쨌든 휴가는 즐겁다 (1)

정훈철의 집으로 향하는 내내 고경아의 입이 쉬질 않았다.

병원 얘기, 사는 얘기, 친구 얘기.

못 본 사이의 일을 다 말하려는 것처럼 끊임없이 조잘댔다.

호들갑스럽지 않고 듣기 좋은 톤의 목소리에 가는 내내 즐겁기만 했다. 간혹 김지훈이 맞장구를 쳐 주면 신이 나 웃기 바빴다. 고경아도 이젠 편하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좋다!’

이런 느낌은 도대체 어떤 감정 때문일까?

사랑일까?

외로움 때문일까?

편하고 좋기만 한 감정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정훈철의 집 앞에 도착했다.

한 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지만 금방 도착한 것 같았다.

6시도 안 됐는데 정훈철이 문을 열어 주었다.

“지훈이 왔구나. 어서 들어와.”

“안녕하세요, 형님. 그런데 벌써 퇴근하셨어요?”

“나도 휴가야. 쉴 땐 쉬어야지.”

“안녕하세요, 형부.”

“어! 처제 왔어? 어째 며칠 전보다 훨씬 예뻐졌다. 얼굴이 그냥 확 폈네. 지훈이 만나서 좋구나.”

정훈철의 말에 고경아의 뺨이 빨개졌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한수임과 승희가 달려 나왔다.

“지훈 씨 왔어요.”

“예, 형수님.”

“삼촌! 이모!”

본 지 벌써 몇 주가 지났다. 그런데 승희가 안아 달라고 팔을 활짝 벌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가슴이 따뜻해진 김지훈이 승희를 힘껏 안았다.

“우리 승희, 삼촌 보고 싶었어?”

“응, 삼촌. 몇 밤만 자면 온다더니 왜 이제 왔어.”

“미안해.”

김지훈이 살짝 눈짓을 하자 고경아가 초콜릿 2개를 흔들었다. 입이 쫙 벌어진 승희가 냉큼 받아 들고는 포장을 뜯었다.

한수임이 눈을 흘기며 초콜릿을 뺏었다.

“승희야, 밥 먹고 먹어야지.”

“엄마, 나 지금 먹고 싶어.”

김지훈이 투정을 부리며 징징거리는 승희를 안은 채 소파에 앉았다. 깔끔하고 깨끗하게 정리된 집 안이 평소 한수임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좋다!’

마치 정말 가족 중의 한 명이 된 느낌이었다.

정훈철이 큰 상을 펴고는 주방에서 열심히 음식을 날랐다.

김지훈이 일어나려고 하자 눈을 크게 뜨며 막았다.

함께 음식을 나르던 고경아가 눈을 흘겼다.

“형부, 나는 일해도 괜찮아요?”

“처제는 미리 해 봐야지. 그래야 시집가서 예쁨 받아. 일 못해 봐. 바로 쫓겨난다. 다 처제를 위한 일이야. 자! 그럼 나르실까요.”

그사이 정말 친해진 모양이었다.

혼자만 가만히 있으려니 뻘쭘했던 김지훈이 상 앞에 앉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 형수님, 이게 다 뭐예요?”

“지훈 씨 온다니까 승희 아빠가 얼마나 성화를 부리던지. 고생해서 만든 거니까 오늘 다 먹어야 돼요.”

“와! 이걸 다 먹으려면 배가 터지겠는데요.”

큼직한 새우와 낙지가 얹힌 매콤한 해물탕.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갈비찜.

파란 시금치와 버섯이 어우러진 잡채.

초고추장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오징어 숙회.

빨갛게 익은 김치와 갖은 반찬까지, 한마디로 진수성찬이었다. 밥과 국까지 나오자 상다리가 휠 정도였다.

“자! 먹읍시다. 우리 마눌 솜씨가 어떤지 봅시다.”

“잘 먹겠습니다.”

김지훈이 첫 수저를 뜨며 눈을 감고는 또 감탄했다.

“야! 예술이네. 형수님, 요리 전문가세요?”

“전문가요? 호호호!”

“지훈아, 우리 마눌이 새침데기처럼 생겼어도 음식 솜씨 하나는 끝내준다. 장모님 피를 고대로 이어받았어.”

“어후! 식당 하나 차리시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겠는데요. 정말 맛있네요.”

원래 먹성 좋은 김지훈이 허리띠까지 풀었다.

더 이상 들어갈 데가 없을 것 같은데도 수저를 놓지 않았다. 음식으로 가득했던 접시들이 하나둘 바닥을 보이자 정훈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수임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고경아가 커피를 타 왔다.

향긋한 커피 향이 퍼졌다.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고 승희랑 놀다 보니 어느새 10시가 됐다. 김지훈이 시계를 보자 정훈철이 헛기침을 했다.

“지훈아,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술 한잔해야지.”

“그러게요. 근데 경아 씨가 늦어서.”

“처제도 자고 가면 되지. 넌 나랑 자고 처제는 승희 엄마랑 자면 딱 되네.”

“예? 저야 상관없지만, 내일 청평에 가려면 경아 씨는 준비를 해야 될 텐데요.”

정훈철이 씩 웃었다.

“나, 휴가다. 내일 아침 일찍 처제 집에 들렀다가 터미널로 가면 되지. 처제, 자고 가.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닌데 뭐 어때.”

고경아가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짓자 한수임이 한술 더 떴다.

“그래, 경아야, 오늘 나랑 자고 가. 밤새 얘기도 하고 좋잖아. 저이 술 마시면 코 심하게 고는데 잘됐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면 될 거야.”

모두들 고경아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정훈철이 크게 웃었다.

“그럼 낙찰. 지훈아, 나가 볼까? 역시 술은 포장마차가 최고 아니냐.”

“그럼요, 형님.”

한수임과 고경아가 같이 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남자들끼리 먹고 싶은 마음에 정훈철이 슬며시 모른 척을 했다. 김지훈도 무슨 생각인지 정훈철의 뒤만 졸졸 따랐다.

여인들의 원성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갔다.

환하게 밝혀진 백열등 빛 아래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보도국 PD답게 정훈철이 세상 얘기를 많이 했다.

“하도 외압이 많아서 어떤 때는 때려치우고 싶다니까. 후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승희만 아니었으면 벌써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거야.”

누구나 인생을 고민하고 있었다.

환자만 보면 되는 의사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데, 방송국 PD는 오죽할까? 정훈철도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지만, 가끔은 어용 방송이라는 비난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심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정치는 종교만큼이나 사람 사이를 어색하게 만든다. 김지훈이 소주를 따르며 화제를 돌렸다.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형님, 사랑이 뭐죠?”

다소 엉뚱한 말에 정훈철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웬 사랑 타령이야.”

“고민이 있어요. 어떤 여자가 날 좋다고 하는데 전 여자로 안 보이거든요.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보면 말을 하지 못하겠어요.”

“흐음! 처제 말고 너 좋다는 여자가 또 있다 이거지? 그게 뭐가 문젠데.”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젠 형부라고 부를 정도로 친해진 고경아와 자신이 만나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할 말이 아니었다.

“경아 씨한테 미안한 느낌이 들어요. 양다리 걸치는 것 같은 생각도 들고요.”

“너, 경아 씨 사랑하냐?”

“그게 문제죠.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정훈철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참! 너, 혹시 연애하는 게 처음이냐?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 고민해?”

대부분 몇 번 만나고 흐지부지 끝났지만, 여자를 만나 보긴 했다.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고경아처럼 만난 여자도 없었다.

스물여섯이 될 때까지 경험이 없다는 게 자랑은 아니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김지훈이 소주를 비웠다.

“없구나. 어떻게 네가 연애를 한 번도 못해 봤을까? 희한한 일이네. 야, 인마.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다 만나 봐. 그러다 보면 답이 그냥 나와.”

“둘 다 만나라구요? 그러다 서로 곤란해지면 그걸 어떻게 해결해요.”

정훈철이 피식 웃었다.

“너, 여자 깔보지 마라. 다들 성인이야. 너 좋다고 뭐 애들처럼 들러붙을 것 같아? 경아 씨도 그렇고, 너 좋아한다는 여자도 아니다 싶으면 먼저 깨끗하게 정리한다.”

“그럴까요?”

“당연하지. 남녀 간의 감정이 원하는 대로 다 돼?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잖아. 여자하고도 그래. 네가 싫으면 결국 깨지는 거야. 반대로 너 싫다는 여자 백날 따라다녀 봐라. 결과가 좋나. 드라마 믿지 마라.”

알쏭달쏭, 알 듯 말 듯했다.

“정말 형님 말대로 해도 괜찮은 거죠?”

“그럼, 날 믿어. 지금은 마눌한테 꽉 잡혀 살아도 내가 한때는 카사노바였다. 죽고 못 산다고 하다가 헤어지잖아? 남자는 뒤돌아봐도 여자는 고개도 안 돌려. 그게 여자야, 인마.”

“경아 씨도 그럴까요?”

정훈철이 헛기침을 했다.

“그거야 모르지. 나는 일반적인 사실을 말하는 거고. 어디나 예외는 있겠지, 뭐. 처제는 좀 달라 보이긴 해. 널 쳐다보는 눈빛도 예사롭지 않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정말요?”

“자식, 좋아하기는. 내 생각이야. 김칫국 마시지 말고 잘해. 처제하고 문제 안 생기려면 딱 두 가지만 명심해라.”

“두 가지요?”

“첫째, 선을 넘지 마. 잘못 넘으면 남자 인생 끝이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끔찍하겠냐.”

“그렇죠. 끔찍한 일이죠. 두 번째는요.”

“둘째, 말을 조심해. 사랑한다는 말은 물론이고 결혼이라는 말은 절대 꺼내면 안 돼. 확신이 서야 돼. 아! 내가 정말 이 여자 아니면 못 살겠구나. 이런 확신 말이야.”

그럴듯했다.

김지훈이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정훈철이 열변을 토했다. 구구절절 와 닿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일단 경아 씨에 대한 내 감정부터 알아 가자. 문제는 서연인데, 형님 말대로 억지로 피해 다니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보는 게 좋겠어.’

나름 결심한 김지훈이 물었다.

“형님, 얼마나 걸릴까요?”

“뭐가?”

“언제쯤 확실하게 정리가 되냐고요.”

“내가 점쟁이냐, 그걸 알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사실 나도 마누라하고 만날 때 다른 여자를 만났거든. 근데 1년 정도 지나니까 딱 감이 오더라.”

“이 여자다, 하고 말이죠?”

“그렇지. 그때부터는 다른 여자가 눈에 안 들어와. 물론 결혼하면 달라지긴 한다. 하하하!”

음! 이럴 수가!

어째 연애 상담을 해도 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가자미눈을 뜬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지금은 마음을 터놓고 고민을 상담할 사람은 정훈철이 유일했다. 설마 엉뚱한 말을 하진 않을 것이다.

“형님, 감사합니다. 한 잔 드시죠.”

“그래, 신경 쓰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책임져야 할 말 하지 말고, 사고 치지 말고.”

짠!

맑은 소리와 함께 25도의 소주가 목을 적셨다.

쌉싸름하던 술이 달았다.

다음 날 아침,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짐을 찾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정훈철이 배가 불룩한 등산용 배낭을 내민 것이다.

“형님, 이게 뭐예요?”

“응, 삼겹살 구워 먹으라고 좀 챙겼다.”

“예? 그냥 사 먹으면 되는데요.”

“야야, 청평까지 가서 분위기 깨지게 밥을 사 먹냐, 인마! 그런 데 가서는 소주에 삼겹살이 최고야. 그래야 분위기가 쫙 산다. 필요한 거 다 챙겼으니까 도착해서 삼겹살만 사.”

자취하면서 지겹도록 혼자 밥을 해 먹은 김지훈이었다.

편하게 사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한수임이 자고 있는 승희를 안고 배웅을 나왔다.

“지훈 씨, 잘 다녀오세요. 모레 봐요. 경아도 잘 갔다 오고.”

“예, 형수님. 잘 먹고 갑니다.”

“언니, 갔다 올게요.”

얼마 전까지 생면부지였던 사람들이 마치 가족처럼 대해 주고 있었다. 가슴이 따뜻해진 김지훈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졸려서 눈도 뜨지 못하는 승희의 뺨에 살짝 뽀뽀를 하고 정훈철의 차에 탔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거리가 한산했다. 고경아의 집에 들러 짐을 챙기고 상봉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의 얼굴만 봐도 놀러 간다는 느낌이 팍 왔다.

버스를 제때 타지 못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서두르자 정훈철이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지훈아, 너 지금 휴가 온 거야. 좀 늦으면 어때? 처제랑 커피도 마시고, 얘기하면서 기다리면 되지.”

불과 몇 개월 사이 빨리빨리 움직이는 게 몸에 밴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역시 형님이세요.”

“그럼 형 말 들어서 나쁠 거 하나도 없다. 나도 가야겠다. 니들 청평까지 데려다주고 싶지만, 오늘 처갓집에 가야 해서 시간이 안 되네. 미안하다.”

“여기까지 태워다 주신 게 어딘데요.”

정훈철이 웃으며 김지훈의 주머니에 뭔가를 쑤셔 넣었다.

“형이 주는 용돈이야. 맛있는 거 사 먹어.”

“예? 형님, 저 돈 많아요. 그동안 월급 받은 거 하나도 못 썼어요.”

“인마, 돈이 있든 없든 형이 주면 네,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 거야. 자식이, 형 성의를 무시하네. 그리고 청평 갔다 오면 연락해. 언제 볼지 모르는데 한 번 더 보자.”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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