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오해? 시기? 운? (2)
영문을 알아야 말이 곱게 나갈 것이 아닌가!
“아이! 애새끼, 답답하네. 정말. 꿍해 있지만 말고 말을 해 봐, 인마.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뭐냐?”
타박까지 하며 몇 번이나 물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김지훈이 속으로 욕을 하며 차에서 내렸다.
‘으이구! 이 새낄 그냥.’
“보호자에게 말해 놓을 테니까 조금만 쉬었다가 수처 해. 난 잠 좀 자야겠다. 내가 잘 차례니까 한두 시간만 부탁하자.”
김지훈의 말투도 곱지 않았다.
역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단단히 화가 난 건지, 뭐에 삐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응급실로 돌아가는 김지훈의 뒷모습을 보던 신현수가 이를 악물었다.
‘나랑 비교할 수도 없는 놈과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건가? 아냐, 그럴 리 없어. 저 자식은 운이 좋을 뿐이야.’
신현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장 중첩증도, 유문 협착증도 운이 좋아 맞혔을 뿐이라 여겼다. 아이가 토하는 것을 먼저 보았으면 자신은 단숨에 진단을 내렸을 것이다.
수처도 마찬가지였다. 아이 엄마의 생각에는 큰 아이를 꿰맨 김지훈이 믿음직스러웠을 것이다. 반대였다면 김지훈이 수처를 했으면 하는 따위의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실력이 운에 밀리다니, 답답하면서도 화가 났다.
최고의 의사가 돼야 할 자신이 김지훈조차 압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차에서 내린 신현수가 거칠게 문을 닫았다.
답답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김지훈이 응급실로 돌아왔다.
수처를 할 수는 없었다.
신현수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대신 수처를 한다면 자칫 신현수와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질 수 있었다.
아이 엄마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시간을 다투는 응급 상황이라면 모르지만, 그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아이 엄마도 자신이 한 행동이 있어서인지 고개만 끄덕거렸다.
머리가 멍한 탓에 신현수의 말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너랑 말할 기분 아니다.’
화가 난 대상이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김지훈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했는지도 몰랐다.
그런 속을 알 리 없는 김지훈이 고민에 잠겼다.
분위기가 냉랭하다 못해 얼음이 얼 지경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 차갑고 냉정한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 보니 찬바람이 불 이유는 많았다.
같은 과를 지원했기에 은연중에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신현수의 태도를 볼 때 윤서연도 관련이 있었다.
찬바람이 불고 난 후의 일이지만, 수처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워낙 자존심이 강한 탓에 생각한 것 이상으로 화가 났을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악어나 정갑수라면 싸우거나 무시라도 하지.”
차라리 하는 행동이 옳지 못하다면 편할 것이다.
차가운 성격을 빼면 신현수는 승부욕을 자극하는 훌륭한 라이벌이었다. 절대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함께 일반 외과를 해야 하니 이대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해결책이 없었다.
김지훈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후우! 어디 성격 고치는 약 없나? 저놈의 차가운 성격 때문에 말을 붙이기도 쉽지 않네. 에라! 모르겠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이젠 무엇보다 잠이 우선이었다. 머리가 맑지 않으면 환자는 물론 신현수와의 일도 해결할 수 없었다.
문득 혼미한 와중에 인턴을 시작하기 직전이 떠올랐다.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1년차 정도는 아니지만, 잠을 아끼면 엑설런트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체력이 돼야 잠을 줄이지. 이렇게 살다간 1년차도 못 되어 보고 죽겠다. 으이씨!’
근 2주를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응급실을 돌았다.
조각 잠만으로는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단 서너 시간만이라도 방해받지 않고 내리 자고 싶었다.
체력의 한계가 왔는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바람일 뿐이었다.
귓가를 울리는 잔인한 전화벨 소리에 김지훈이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세면대에 찬물을 가득 담아 머리를 박았다.
김지훈의 체력 배터리가 방전되기 직전까지 몰렸다.
간신히 시동만 걸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체력이 남아 있는 신현수 덕에 버틸 수 있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분위기는 여전히 갑갑했지만, 피곤에 절어 다른 일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유일한 희망은 오늘로 딱 하루가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하루만 버티자. 파이팅!’
온정신을 집중해 파이팅을 외치며 일어서던 김지훈의 다리가 풀렸다. 응급실 밖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냥 주저앉았을 것이다.
사고가 크게 났다.
아침 댓바람부터 난리가 아니었다.
과속하다가 전봇대를 들이받으며 운전자는 물론 동승자 3명까지 크게 다쳤다. 간호사들이 바이탈을 체크하고 수액을 다느라 정신이 없었다.
환자는 넷이고, 의사는 둘이다.
신현수가 원칙대로 가장 급하고 중한 환자부터 보고 있었다. 처치실로 들어간 김지훈이 바이탈을 확인한 후에 차례차례 환자를 살폈다.
이런 사고를 당한 환자들이 오면 공연히 바쁜 것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외상부터 확인해야 한다. 대개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 상처를 확인하는 시간이 꽤 걸렸다.
진찰이 끝날 때마다 잽싸게 오더를 내렸다.
곧 검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북하게 쌓인 X-ray를 일일이 확인했다.
환자마다 여기저기 찢어진 것은 물론 골절까지 있었다.
관련된 과에 노티를 하느라 전화통에 불이 났다.
가장 뒤늦게 나온 CT를 확인한 신현수가 급히 일반 외과에 노티를 했다. 혈복강(Hemoperitoneum)이 의심됐다.
유석재와 김경수가 급히 내려왔다.
마지막 환자의 X-ray를 확인하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유석재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빤뻬리(Panperitonitis:복막염)도 있습니다. 프리 에어(Free Air)가 떴습니다.”
“뭐, 빤뻬리? 큰일 났네. 양방을 벌일 상황이 아닌데. 일단 엘 튜브하고 폴리 꽂아. 다른 과 손상 확인해서 빨리 노티하고.”
당장 수술을 요하는 환자가 둘이었다.
응급실이 더욱 바빠졌다.
대체로 교통사고가 그렇듯 동반 손상도 많았다.
수술 전 다른 문제들이 있는지 확실하게 파악해야 했다.
곧 흉부외과를 도는 이경석이 신경외과를 도는 손일석과 함께 응급실로 내려왔다.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일석아, 오늘까지 휴가잖아?”
“지훈아, 환자들이 날 기다리는데 하루 정도는 일찍 와야지. 근데 첫날부터 환영식을 거하게 하네.”
김지훈이 씩 웃었다.
손 하나라도 더 있으면 그만큼 몸이 편해지고 환자들에겐 더할 수 없는 이득이었다.
좀처럼 응급 질환이 발생하지 않는 정형외과 전공의답게 악어가 가장 늦게 모습을 보였다.
웬일인지 정갑수까지 보였다.
모든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전력을 다했다.
하얀 가운이 여기저기 피로 얼룩졌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북새통처럼 혼잡하던 응급실이 다소 여유를 찾았다. 예전보다 훨씬 빠르게 다른 환자의 처리까지 다 끝났다.
수술을 기다리는 복막염 환자에게만 주의를 기울이면 됐다.
인턴들의 공력이 제법 쌓인 모양이었다.
복막염 환자의 바이탈을 체크하고 스테이션으로 온 김지훈의 눈이 감기고 있었다. 이경석이 옆에 앉아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형, 아직 안 올라갔어요? 일석이 너도 볼 환자 없잖아.”
이경석이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너, 이러다 뻗겠다. 아주 제대로 뺑이를 쳤구나. 가서 좀 자, 인마. 일석이하고 내가 몇 시간 봐줄게.”
“그래, 지훈아. 거울 좀 봐. 꼴이 말이 아니다. 형 말대로 좀 자고 샤워도 해. 누가 보면 의사가 아니라 거지로 알겠다.”
아닌 게 아니라 떡 진 머리에 더러워진 가운까지, 꾀죄죄하기 짝이 없었다. 내심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응급실 인턴은 엄연히 김지훈과 신현수였다.
“나만 고생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되나. 근데 일석아, 현수는 어디 갔어?”
“가서 자라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직실로 갔어. 너도 이럴 시간에 잔말 말고 빨리 가서 자.”
미안하면서도 너무 고마웠다.
잠!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고마워요, 형. 다음에 술 한 잔 살게요.”
“야야, 그런 소리 마. 난 네 선배고, 일석이는 동기야. 힘들 때 서로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지, 인마. 솔직히 구미 아니면 이럴 수 있는 데도 없어.”
이경석이 등을 떠밀었다.
듣고 있던 간호사까지 걱정을 했다.
“그래요, 샘. 조금이라도 더 주무세요. 2주 동안 내리 당직을 섰는데 힘들지도 않으세요? 경석 쌤하고 일석 샘도 정말 멋지네요. 나도 이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네.”
“내가 왜 지훈이 친구야, 이 사람아. 난 선배야.”
“호호호! 내가 보기엔 친구 같은데.”
김지훈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도 뿌듯한 마음에 가슴이 아릴 지경이었다.
이런 친구와 선배가 있기에 내일 또 일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경석이 형, 내년에 꼭 같이 일해요.”
“당연하지, 인마. 너랑 현수 빼고도 두 자리가 더 있어.”
“일석아, 부탁한다.”
“친구, 걱정하지 말고 푹 쉬게나. 응급실과 지구는 내가 지키겠네. 슈퍼맨!”
손일석이 양팔을 쭉 뻗으며 슈퍼맨 흉내를 냈다.
아픈 환자들 앞에서 소리 내 웃을 수는 없었다.
간호사들이 입을 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응급실과 웃음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항상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론 유머도 필요하고, 농담도 덜질 수 있는 여유가 필요했다.
당직실에 들어간 김지훈이 물끄러미 신현수를 보았다.
담요도 덮지 않은 채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너도 되게 피곤하겠지. 그러니까 웃어. 가뜩이나 힘든 게 인턴인데, 뭘 그렇게 딱딱하게 사냐.’
김지훈이 깨끗한 담요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덮어 주었다. 나직한 신음 소리를 낸 신현수가 담요를 꼭 끌어안았다.
간만에 김지훈이 편안하게 잠을 잤다.
얼마나 지났을까?
세상모르고 자던 김지훈이 눈을 떴다.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다 말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
‘응급실!’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았다.
몸이 한결 개운해진 덕에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웬일인지 응급실이 한산했다.
간호사들의 나직한 목소리가 똑똑하게 들릴 정도였다.
“벌써 1시네. 다들 어디 갔어요?”
“이경석 쌤하고 손일석 샘은 식당에 가셨구요. 신현수 쌤은 전과 동일.”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응급실을 돌다 보면 배가 엄청 고플 때가 많았다.
그래도 신현수는 끼니를 거르면 걸렀지, 구내식당은 이용하지 않았다. 한 달 반이 넘었는데 아직도 구내식당 밥이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윤서연은 여자라 그렇다고 쳐도 신현수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놈은 처음 봤다.
‘남자 놈이 까다롭기는. 가까운 식당 놔두고 밖으로는 왜 나가? 먹다 보면 맛있어지는구만. 너, 군대 안 가길 잘했다, 자식아.’
공연히 빈정이 상한 김지훈이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럼 나도 밥 좀 먹고 옵니다.”
“맛있게 드세요, 샘.”
“올라올 때 뭐 사다 줄까요?”
“어머! 좋죠. 과자하고, 주스.”
“오케이!”
한가한 시간이 이렇게 소중할 줄은 몰랐다.
콧노래를 부르며 구내식당에 들어서자 손일석과 이경석이 손을 흔들었다.
“지훈아, 여기야.”
김지훈도 손을 흔들며 배식구로 향했다.
뭘 어떻게 먹을까?
구미에 와 새로운 맛을 알았다.
뜨거운 밥에 날계란을 풀고, 그날의 입맛에 따라 고추장이나 간장을 넣고 비벼 먹으면 꿀맛이었다.
단 하나 단점이라면 악어에게 배운 법이라는 것이었다.
개똥도 필요할 때가 있다더니!
대접 한가득 밥을 푼 후 식당 아줌마에게 날계란 3개와 참기름을 조금 얻었다. 오늘은 고추장이 당겼다.
탁탁, 껍질을 깨고 계란과 고추장을 넣어 슥슥 비볐다.
고소한 참기름까지 더해지자 절로 군침이 돌았다.
한입 딱 물었다.
계란과 고추장과 참기름의 환상적인 조합에 절로 감탄이 터졌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여기에 싱글벙글 복 매운탕을 곁들이면 예술이겠는데.’
그때 밥맛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악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