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오해? 시기? 운? (1)
김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무리한 일일 수도 있었다. 잠시 김지훈을 보던 방사선과 과장이 웃으며 돌아섰다.
“너 김지훈이고, 응급실 인턴 맞지?”
“예, 응급실 돌고 있습니다.”
“그저께 장 중첩증으로 왔던 애 바륨 에네마(관장) 할 때 들어왔었지?”
“예, 걱정이 돼서요.”
“에휴! 다른 사람 부탁이었으면 내일 하겠는데, 너 때문에 한다. 가자. 지금 빨리 초음파실로 옮겨. 나 바쁘다.”
“예. 감사합니다, 과장님.”
김지훈이 헉헉거리며 응급실로 돌아와 아이를 옮겼다.
구선미와 함께 어두운 초음파실에서 모니터에 집중했다.
유문 협착증을 확진하기 위한 사인(sign)은 단 하나였다.
아이의 우상복부를 열심히 살피던 방사선과 과장이 화면을 정지시켰다. 마치 화살이나 총알 과녁처럼 크고 작은 동그라미가 겹쳐진 영상이 보였다.
타깃 사인(target sign).
진단이 확실해졌다.
구선미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이는 먼저 소아과에 입원을 했다.
일반 외과로 전원하기 전 소아과에서 할 일은 아기의 몸 상태를 정상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안전하게 수술을 할 수 있었다.
간호사들이 김지훈을 보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운이 좋았죠. 딱 보고 있을 때 토하지 않았으면 단순 장염으로 생각했을 거예요.”
“맞아요. 구선미 샘도 처음에는 고민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빨리 발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샘처럼 환자에게 관심을 주지 않으면 누가 알았겠어요.”
다들 환자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말도 하지 못하는 아기 환자들에게는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환하게 웃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실수로 인한 괴로움이 희석되고 있었다.
아직은 흐릿하지만 환자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점점 확실한 감이 오기 시작했다.
외래 진료가 완전히 끝나자 어김없이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잠깐 짬이 난 사이 간호사가 별다른 생각 없이 신현수에게 아이의 일을 말했다.
“신현수 쌤, 아까 단순 장염으로 본 아기 있죠? 유문 협착증이었어요. 김지훈 샘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정말 환자를 잘 보시지 않아요?”
신현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지훈이 먼저 도움을 청했다.
임프레션이 완전히 틀렸다면 당연히 알려 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더 뛰어나 보이려고 치사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는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훈, 이 치사한 자식. 네가 실수했다고 나도 실수를 해야 한다는 거야?’
순간 화가 치민 신현수는 전후 사정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윤서연이 아니더라도 결코 지고 싶지도, 져서도 안 되는 상대였다. 그때 정신없이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스테이션으로 와 오더를 냈다.
따가운 눈빛에 무심코 신현수를 본 김지훈이 머리를 톡톡 쳤다. 이제야 생각이 났다.
“아! 현수야, 아까 그 애 있잖아. 단순 장염이 아니고…….”
“됐어.”
트레이드마크처럼 따라붙던 냉정함마저 잃었다.
신현수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당직실로 들어갔다.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간호사에게 물었다.
“쟤, 왜 저래요?”
간호사도 영문을 모르겠는지 고개만 저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임프레션이 틀렸다는 말을 안 해도 무방한 일이었다. 바쁘면 잊을 수도 있었고, 인턴이 그 많은 환자의 질환을 모두 맞힐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전문의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소한 오해에 불과한 일이 그간의 일과 맞물리면서 신현수의 자존심을 다시 뭉갰다.
저녁 9시가 넘어서야 한숨을 돌린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신현수의 표정이 여전히 차가웠다.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고, 목소리에서는 찬 기운만이 풀풀 날렸다.
‘도대체 왜 저래? 에휴! 애새끼,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야 알지. 애들도 아니고.’
김지훈이 잠시 신현수를 보다 기지개를 켰다.
확실히 무리였다. 체력이 심하게 달리자 머리까지 멍해지고 있었다. 은근한 두통에 이마를 주무르던 김지훈이 응급실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애야? 구미 이 동네 정말 애들 많네.’
7살 정도 되는 아이였다.
이마에 붙인 반창고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놈의 새끼, 니 때문에 내가 몬 산다. 엄마가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벌써 몇 번째야. 오늘은 마취도 안 해 달라고 할 거니까 알아서 해.”
겁이 난 아이가 징징 울어 대자 엄마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이마를 다친 아이의 머리를 몇 번이나 쥐어박았다.
김지훈이 단단히 화가 난 엄마를 달래며 아이를 살폈다.
“어머니, 그렇다고 다친 애 머리를 때리면 어떡해요? 어쩌다 다친 거죠?”
단순 열상이었다. 이미 이마와 눈썹에 꿰맨 자국이 두 군데나 더 있었다. 아마도 지독한 개구쟁이인 모양이었다.
벌써 세 번째이니 엄마가 화를 낼 만도 했다.
간단한 검사 후에 수처(봉합)를 시작했다.
“선생님요, 웬만하면 그냥 꼬매 주이소. 저놈의 자슥, 그래야 조심할 것 같아요. 너 집에 가면 가만 안 둔데이. 각오 단디 해라.”
대개 병원에서는 심하게 사투리를 쓰지 않았는데 아이 엄마는 달랐다. 말도 빠른 데다 억양까지 강해 알아듣기가 힘들 정도였다.
겁을 잔뜩 먹은 아이가 꼼짝도 하지 않은 덕에 수월하긴 했다. 도리어 커튼 너머에서 느껴지는 엄마의 눈길이 더 부담스러웠다.
어떻게 보는지 아이가 손가락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도끼눈을 뜨며 소리를 질렀다. 마침 옆에서 다른 환자의 상처를 수처하고 있던 신현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문딩이 자슥, 마취까지 했는데 가만히 안 있을래? 선생님이 꼬매시는 데 방해되잖아.”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분명 애한테 화가 난 건데, 꼭 내가 잘 꿰매는지 감시하는 것 같네.’
은근한 부담에 마른침을 삼키며 열심히 꿰맸다.
장성기 과장에게 인정을 받은 이상 웬만큼 자신도 있었다.
인턴치고는 상당히 능숙한 솜씨로 수처를 마친 김지훈이 오더를 냈다. 신현수도 이미 깔끔하게 수처를 끝낸 후였다. 오더도 마무리해야 했지만 말을 붙일 얼굴이 아니었다.
분위기는 분위기고, 환자는 환자였다.
김지훈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다신 다치지 마, 인마. 그러다 너 엄마한테 맞아 죽겠다.”
주눅이 든 아이가 눈만 멀뚱거렸다.
“선생님, 이놈의 자슥, 혼 좀 내 주이소. 이러다 마빡에 흉만 보일 텐데 우짜면 좋겠습니까.”
하도 답답하니 하는 소리였다.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김지훈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혹시 인턴 선생님 맞습니까?”
“예? 맞는데요. 왜 그러시죠?”
“되게 잘 꼬매시네. 내가 저노무 자식 때문에 응급실을 내 집처럼 드나들지 않았는교. 이젠 전문가 다 돼서 볼 줄은 안다 아입니까. 다른 인턴 선생님들은 이 정도로 잘하진 못하던데, 용하시네.”
엄마 말대로 병원을 꽤 드나들었는지 인턴이 수처를 한다는 것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칭찬이 분명했지만 응대하기 참 난처한 말이었다.
김지훈이 살짝 웃으며 아이 엄마에게 서둘러 인사를 했다.
신현수가 나직하게 코웃음을 쳤다.
‘김지훈, 뭔가 그렇게 좋다고 웃어? 수처가 그게 그거지. 솔직히 장성기 과장님이 오버하는 거 아냐?’
감겨 오는 눈을 참기 힘든지 김지훈이 하품을 하며 살짝 기지개를 폈다. 그때 새로운 환자가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5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아빠로 보이는 남자였다.
정말 징글징글하게 아이들이 많았다.
입을 멈추지 않던 아이 엄마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막 내원한 부자가 사색이 된 채 움직이질 못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니는 또 뭐꼬?”
걸걸하기만 했던 아이의 엄마가 기가 찬지 가슴을 치며 털썩 주저앉았다.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천장을 바라보며 슬며시 아이를 밀었다.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아이의 얼굴이 어째 낯익었다.
누군가와 닮아도 너무 많이 닮았다.
방금 전 이마를 꿰맨 아이의 동생이 분명했다.
손을 부들부들 떠는 엄마를 보며 김지훈은 재빨리 당직실로 들어갔다. 어째 한바탕 폭풍이 칠 것 같았다. 신현수가 환자를 볼 차례라는 게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야! 이런 일도 다 있네. 엄마가 저렇게 무서운데 동생이 바로 찢어져서 왔으니 난리 나겠네. 아빠는 뭐 죄야.”
혼자 중얼거리며 침대에 누운 김지훈의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피곤에 절어 베게만 닿으면 잠이 들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고함이 자장가처럼 들렸다.
깜빡 잠이 들었다 싶은 순간 누군가의 기척에 눈을 떴다.
간호사가 몸을 흔들고 있었다.
“김지훈 샘, 일어나세요.”
“으음! 왜요, 환자 왔어요?”
“조금 전에 온 애 수처 좀 하셔야겠어요.”
“수처? 현수가 있잖아요.”
김지훈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샘, 정신 차리고 일단 나와 보세요. 난리 났어요.”
난리가 나?
간호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지훈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주무르며 간신히 일어났다. 평소 잠을 자는 눈치면 한두 시간 정도는 서로 환자를 봐주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둘 다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신환도 아니고 이미 내원한 환자의 수처라니,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김지훈이 밖으로 나갔다.
신현수는 보이지 않았고, 아이의 엄마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간호사가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현수 쌤이 환자를 볼 차례였잖아요. 그런데 애 엄마가 샘을 찾았어요. 샘이 수처를 했으면 하는 눈치더라구요. 사실 별말도 아니었고,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들렸는데 신현수 쌤이 들은 모양이에요. 갑자기 화난 표정을 짓더니 아무 말도 없이 나가셨어요.”
“나갔다고요?”
일 났다. 엄마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의사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갠 것이다. 아무리 호인이라도 동기에게 비교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하필이면 엄마가 보는 앞에서 둘이 동시에 수처를 하고 있었으니 오해하기도 딱 좋았다.
김지훈이 힐끗 아이의 엄마를 보았다.
“선생님, 잘 좀 말해 주이소. 내 뜻은 그게 아인데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그냥 별생각 없이……. 으이구! 이게 다 니 때문이다, 이노무 자슥. 니도 각오해.”
애먼 둘째가 호된 소리를 들었다.
김지훈이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갔다.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무책임하게 행동할 신현수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한참을 뒤진 끝에야 신현수를 찾았다.
자신의 차 안에서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김지훈이 창문을 두드렸다.
눈을 뜬 신현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얘기 좀 하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지훈이 다짜고짜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
“환자 기다리는데, 여기서 뭐 해?”
“무슨 환자?”
“수처 할 애 있잖아.”
“내가 그걸 왜 해? 너랑 말할 기분 아니다. 5분 후에 응급실로 갈 테니까 환자나 봐.”
신현수가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단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너랑 말할 기분 아니라고 했다.”
내심 이해는 됐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참에 찬바람이 부는 이유도 알고 싶었다. 서로 간의 협조가 가장 필요한 응급실을 이렇게 돌 수는 없었다.
“야, 무슨 문제 있어? 너 왜 이래. 나한테 불만 있으면 까놓고 말해. 그래야 고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냐.”
신현수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화가 난 김지훈의 말이 거칠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