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라이벌 (2)
방사선과 과장의 말에 구선미가 엄마에게 설명을 했다.
“어머니, 장 중첩증이 맞네요. 바로 관장을 이용해 풀 거예요. 잘될 거니까 안심하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치료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바륨이 든 통을 더욱 높이 들어 대장에 많은 양을 주입한다. 환아의 몸자세를 바꿔 주며 대장 안의 압력을 가중시키면 소장인 회장이 그 압력에 밀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중첩이 된 부분이 길어서인지 좀처럼 회장이 대장에서 빠져나가질 않았다. 단단히 겹친 모양이었다.
30분이 넘게 실랑이를 했다.
아이는 잠시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방사선과 과장이 땀까지 흘렸다. 방사선 기계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이 아니라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아이 엄마도 초조한 눈으로 아이의 손만 꼭 잡고 있었다.
김지훈이 힐끗힐끗 시계를 보며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수술을 하는 것과 면하는 것은 아이에게 정말 큰 차이가 있었다.
‘돼라, 돼라. 이번에는 꼭.’
김지훈이 주먹을 흔들며 마음속으로 응원을 했다.
그 덕분일까?
좀처럼 대장에서 빠져나가지 않던 회장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속을 썩였는데 한번 밀리기 시작하자 쑥쑥 움직여 마침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모니터를 확인하고 X-ray까지 찍었다.
다들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사진이 나오는 순간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상적인 소견이었다.
아이의 항문에서 튜브를 제거하자 하얀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울며 보채던 아이가 이제야 편안해졌는지 엄마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아이 엄마가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휴우!”
김지훈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방사선실을 나왔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응급실로 돌아온 김지훈에게 간호사들의 시선이 쏠렸다.
“샘, 어떻게 됐어요?”
“30분도 더 지났는데 환자 없었어요?”
김지훈이 딴청을 부리며 애먼 말을 하자 간호사들이 안달을 했다.
“쌤, 어떻게 됐냐구요.”
샘이 쌤으로 바뀌었다. 긴장하라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쌤은! 농담도 못해요? 아슬아슬하게 성공했어요. 수술하게 될까 봐 얼마나 긴장했는지 온몸이 다 쑤시네. 다행이죠?”
“애기를 수술실에 올리면 얼마나 안쓰러운데. 정말 다행이에요.”
다들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잠시 후, 구선미와 아이 엄마가 들어왔다.
아이는 엄마의 품에 잠들어 있었고, 엄마도 한결 안정을 되찾은 얼굴이었다.
“어머니, 일단 삼사 일 정도 입원해서 치료를 해야 돼요. 매일 사진을 찍어서 재발하는지도 봐야 되고, 관장할 때 넣은 바륨도 어느 정도 빠져나가야 하거든요.”
“예,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엄마가 구선미에게 인사를 한 후 김지훈에게 웃음을 보였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방사선실에서 함께 있어 준 것을 잊지 않은 것이다.
김지훈이 뿌듯한 마음에 활짝 웃었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의사가 된 것에 정말 감사했다.
이런 종류의 보람은 어떤 직업에서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또한 실수를 어느 정도 잊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신현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당직실로 들어갔다.
‘처음 애를 본 사람은 난데, 지훈이한테 인사를 해?’
은근히 다가오는 짜증에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임프레션이 정확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
연속 2주를 오프도 없이 도는 탓에 엄청나게 힘들었다.
하지만 구미 응급실은 김지훈에게 천국이었다.
서울에 비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았다.
몸이 피곤한 만큼 즐거움과 보람이 더 커졌다. 가끔 악어가 말도 안 되는 오더를 내리는 것만 빼고 말이다.
막 응급실로 들어온 환자를 진료하던 김지훈의 눈에 짜증이 서렸다. 마음 같아서는 악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신현수에게 미루고 싶었다.
‘악어를 또 봐야 하네.’
개방성 골절 환자였다.
팔뼈가 부러지면서 피부를 뚫어 외부와 뼈 사이에 연결 통로가 생긴 상황이었다. 정형외과에서도 응급으로 다뤄야 하는 질환이었다. 특히 심한 통증과 상처 부위를 통한 감염의 우려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럽고도 신중한 처치가 필요했다.
기본적인 진단이 끝난 후 김지훈이 개방된 부위를 세척했다. 악어의 오더가 없었지만 당연한 해야 할 일이었다.
“생리 식염수에 베타딘(소독액) 섞어서 1,000시시 준비해요.”
50시시 주사기로 20번 정도 뼈가 뚫고 나온 부위를 깨끗이 세척했다. 환자가 꽤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단순한 상처에 소독약만 닿아도 아파서 소리를 지른다. 뼈와 통한 부위에 주사기로 소독약을 쏘아 대니 비명을 지르고도 남았다.
“환자분, 조금만 참으세요. 지금 소독하지 않아서 염증이 생기면 정말 크게 고생하실 수 있어요.”
불행히도 진통제를 주는 것은 인턴의 권한이 아니었다.
정확한 진단 없이 함부로 통증을 감소시키면 증상이 가려질 수도 있었다. 오진의 빌미가 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경우는 상관없었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허락하지 않았다.
세척이 거의 다 끝났을 무렵 악어가 나타났다.
환자를 쓱 한번 보고는 오더를 낸 후 신현수와 노닥거렸다. 그나마 진통제를 주라는 오더 덕분에 환자가 조금은 편해졌다. 김지훈이 마지막 세척을 끝내고 소독 장갑을 벗으려는 순간 악어가 다가왔다.
“김지훈, 5,000시시 더 해.”
“5,000시시요? 지금 1,000시시 했는데요.”
“토 달지 말고 하라면 해. 결정은 내가 하는 거야, 이 자식아. 넌 왜 그렇게 말이 많아?”
악어가 잔뜩 인상을 썼다.
물론 정형외과 2년차인 악어에게 오더를 낼 권한이 있다. 하지만 개방성 골절이면 세척은 통상 1,000시시 정도 한다.
뼈가 뚫고 나와 개방된 부위가 아주 더럽거나 크면 이삼천 시시를 하기도 한다.
5,000시시는 들어 본 적도 없고, 더 효과가 있지도 않았다.
도리어 환자의 고통이 가중될 뿐이었다.
잠시 후, 간호사가 베타딘을 섞은 생리 식염수 5,000시시를 가져왔다. 강력한 진통제를 놓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샘, 왜 저런대요?”
김지훈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찍혔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한 번에 50시시씩 100번을 해야 한다. 말이 100번이지 뻑뻑한 주사기를 당겨 소독 액을 뽑고 다시 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짜증이 솟구쳤다.
그 탓에 주사기를 짜는 힘이 강해졌다.
환자가 통증을 느끼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김지훈이 숨을 골랐다.
‘피스! 참자. 지금 화를 못 참으면 환자만 힘들어 한다. 미운 놈은 악어다. 피스!’
마음의 평화를 두 번이나 외치고 나서야 마음이 다소 진정됐다. 팔이 뻐근해지다 못해 아플 때쯤 되어서야 끝났다.
김지훈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힘들어 하자 악어가 하얀 이를 드러냈다.
“전화 오면 환자 수술실로 올려. 환자를 잘 봐야 믿고 맡기지. 그런 실수를 했는데 안 죽은 게 다행이다.”
김지훈이 악어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환자를 위해 조언하는 것이라면 욕이 아니라 매라도 맞을 수 있었다.
“개새끼.”
욕을 먹어도 싼 놈이었다.
그래도 환자가 아플까 봐 강력한 진통제를 줬으니 정갑수보다는 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정형외과를 도는 정갑수는 왜 안 보일까?
김지훈이 인상을 확 구겼다.
이제야 정갑수의 일을 자신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선배지만 정말 징글징글한 놈들이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바빴다. 그 덕에 악어의 지나친 관심(?)도 잊을 수 있었다. 사실 신현수가 아니었으면 조각 잠을 자며 일하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능력이 뛰어난 동기가 있다는 사실은 어쨌든 큰 힘이었다.
아뻬(appendicitis:충수 돌기염)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았다.
거의 매일 본다고 할 정도로 많았지만, 애매모호한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아뻬의 진단은 흔히 손으로 한다고 한다.
전형적인 병력과 증상은 60프로 정도에서만 동반됐다. 혈액 검사상 백혈구 수치의 증가는 진단의 근거가 되지 못했다.
초음파로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힘들었고, 고가의 CT를 찍을 수도 없었다. 자칫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도 있었다(배경이 되는 시기에는 초음파 해상도가 낮아 진단이 어려웠지만 현재는 가장 확실한 진단 기구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사의 판단 역시 절대적인 진단 기준 중 하나입니다).
그런 이유로 의사의 진찰과 경험이 가장 중요했다.
환자를 앞에 둔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분, 다시 한 번 눌러 보겠습니다.”
아뻬는 복부의 우하부에 있다.
눌렀을 때 느껴지는 압통과 손을 갑자기 뗄 때 호소하는 반사통이 진단의 주요 근거였다. 그런데 압통은 확실한 반면 반사통이 미약했다.
심한 장염이나 장간막 임파선염에서도 이런 경우를 볼 수 있었다. 김지훈이 감별을 하기 위해 환자를 좌측이 밑으로 가도록 모로 눕혔다.
아뻬가 붙어 있는 맹장은 후복막에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환자가 모로 누워도 통증점이 변하지 않는다. 반면 소장은 자유롭게 움직이기 때문에 장염의 경우 아픈 위치가 바뀌게 된다.
김지훈이 배를 눌렀던 손을 갑자기 뗐다.
환자가 통증을 호소했지만 역시 상당히 미약했다.
김지훈이 고민에 잠겼다. 사실 이럴 땐 외과와 내과에 동시에 노티를 하면 끝이었다. 그러나 시간만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최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싶었다.
모르거나 자신이 없으면 손을 바꾸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김지훈이 신현수를 불렀다.
“현수야, 배 좀 봐줄래? 아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모호하네.”
힐끗 김지훈을 본 신현수가 환자를 진찰했다.
몇 마디 묻고 난 후 자신 있게 답을 했다.
“아뻬야. 유석재 선생님에게 노티 해.”
“압통하고 반사통을 빼고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나? 있으면 좀 가르쳐 줘.”
신현수가 간만에 웃었다.
“경험이 많아야지. 일반 외과 돌 기회가 또 있으면 그때 많이 만져 봐.”
확실히 한 번에 2마리의 토끼를 쉽게 잡을 방법은 없었다. 서울에서 돌 때는 수술실에만 있었다. 아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경험이 상당히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분명히 맞는 말인데 말투 때문인지 왠지 기분이 묘했다.
신현수의 경험이 전공의보다 많을 수는 없었다. 확실한 진단 기기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신중해야 할 질환이었다. 지나친 자신감이었다.
김지훈이 유석재에게 노티를 했다.
곧 응급실로 내려온 유석재도 확실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최철한까지 내려와서야 수술이 결정됐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철한 선생님, 아뻬가 확실한가요?”
“팔구십 프로 정도? 사실 이런 경우는 열어 봐야 알아.”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수술을 결정하기에는 확신이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닐까?
“그럼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맞지 않나요?”
“아뻬일 확률이 낮고, 증상이 심하다면 기다리는 것도 방법 중 하나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봐. 기다리다 터지면 환자가 더 고생하겠지. 그리고 아뻬는 없어도 되는 장기인 데다 의사들 손 이외에는 확실한 진단 방법이 없어. 수술했을 때와 안 했을 때의 이득과 손해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야.”
“어려운 문제네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환자의 상태가 수술을 해도 문제가 없고, 이 정도 확률로 의심이 된다면 여는 거야.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교과서에도 나온 말이다.”
김지훈은 그제야 수긍을 했다.
의사는 신이 아니다. 질환을 100프로 정확하게 진단할 수 없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수많은 데이터를 가진 미국이나 유럽의 견해가 그렇다면 따르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의학은 경험의 학문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최철한이 환자와 보호자에게 충분히 설명한 후 동의를 받았다. 신속하게 수술 준비가 진행됐다.
30분 정도 지나 환자가 수술실로 올라갔다.
김지훈이 짬이 나자마자 간호사들에게 또 부탁을 했다.
“나 수술실에 잠깐 갔다 올 테니까 환자 오면 연락해요.”
“수술실에는 왜요?”
“아뻬가 맞는지 틀린지 보고 싶어서요.”
대답도 듣지 않고 김지훈이 부리나케 수술실로 향했다.
신현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자신과 전공의들의 판단을 못 믿는단 말인가!
하긴 100프로 확실한 진단은 아니었다.
순간 자신도 수술실에 올라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발목을 잡았다. 김지훈과 비교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마당에 일하는 방식마저 따라 할 수는 없었다.